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8
00927 A Poisoned Chalice, Two. =========================================================================
…뭐냐. 이 예의 바르고 정중하기 그지없는 노크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똑똑.
그러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봐도 현실은 똑같다. 저 큼지막한 그림자 주먹은 보호막을 힘껏 후려치기는커녕, 외려 점잖게 기척을 냈다.
– 열어봐.
‘응?’
– 괜찮으니까 열어보라고. 들어오고 싶다잖아. 주변 좀 둘러봐.
‘들어오고 싶다고?’
심지어 화정마저도 이상한 소리를 했다.
주변을 돌아보자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허허벌판을 가득히 물들인 실루엣은 어느새 다가오는 걸 멈춘 상태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친 보호막을 중심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하물며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말이다. 포위라기보다는 얌전히 기다리는 감이라면 내 착각일까?
그때였다. 긴가민가하고 있는 동안 고연주가 돌연히 몸을 움직였다. 무언가 홀린 듯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연주!”
어떻게든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결국에는 보호막 밖으로 걸어나가고 말았다.
그런데 고연주가 빠져나가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가 머릿속의 그림자 지대는 아주, 몹시 끔찍했던 공략 지역으로 기억한다. 물론 제로 코드를 지키는 지대치고 어디 하나 어렵지 않은 곳이 있겠느냐마는, 그림자 지대는 개중에서도 유별나게 잔인한 곳이었다. 눈에 보이는 그림자 형상뿐만이 아니라, 발을 디디는 땅도 항상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스치는 음영에 발목이 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옳지 옳지. 착하다.”
한데, 눈앞의 저 광경은 도대체 무어라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 보면, 고연주가 손으로 살살 쓸어 어루만져주자, 그림자 손은 간지럽다는 듯이 좌우로 배배 꼬는 중이다. 꼭 주인이 쓰다듬어주니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 저 그림자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잠깐만. 그림자?
“고연주. 괜찮습니까?”
“네? 네. 오히려 귀여운데요?”
아니.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혼자서만 너무 여유 낙낙하잖아.
내 간절한 속마음이 전해졌는지 고연주가 아차 하며 말을 잇는다.
“아…. 그냥 친숙한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친숙한 기운?”
“네. 이상하게 끌리는 기분이 들어서요. 굉장히 강렬하게요. 아무튼, 수현도 이만 나와보지 그래요? 별로 위험한 애들도 아닌 것 같은데.”
“…….”
그 말과 동시에 붉게 흐르던 보호막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공교롭게도 마력이 바닥나 불가항력으로 해제되는 것이다.
그렇게 수호 요새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근처로 몰려온 그림자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는 듯하다. 오직 고연주 주위만 따라다니며 춤추듯 물결치고 있을 뿐.
“기뻐하고 있어요.”
그때 물끄러미 보고 있던 한소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뻐하고 있다고. 약간 뜬금없다고 생각되는 말이었다.
“기쁨, 반가움, 환영, 환희. 여러 긍정적인 감정이 그림자 여왕으로 쏠리는 게 느껴져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방금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초감각으로 받아들인 객관적인 정보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림자 여왕을 강조해서 말하는 걸로 보아 한소영도 아마 나와 비슷한 추측을 한 것 같다. 나는 비비앙이 해석한 비석의 글귀를 떠올렸다.
‘오직 자격을 갖춘 이들만이 약속의 반김을 받을 수 있을지니.’
‘무한의 힘이 기다리는 건 넷과 하나.’
‘그늘에 숨어 사는 자.’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자연스레 열릴 것이다.’
혹시.
어쩌면, 비석이 일컫는 자격을 갖춘 사용자가 고연주가 아닐까? 속 편한 끼워 맞추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서로 그림자라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연주는 일 회차 시절 약속의 신전을 공략하기 한참 전에 사망했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를 동일 선상에 놓고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나 정황상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남다은과 한소영. 검의 여왕과 철혈의 여왕. 생각해보니 저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진명이나 호칭이 두세 번째 지대와 오묘하게 얽히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두 여인 역시 약속의 신전을 밟지 못한 이들이다. 남다은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한소영은….
에이, 이거는 생각하지 말자. 괜히 트라우마 들쑤시기는 싫으니까.
단지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마르였다. 네 번째 공략 지역의 이름은 성스러운 지대.
문득 성스러운 여왕이라 불렸던 여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여기서 자격을 갖춘 이 중 하나가 유현아가 아닐까 싶은데…. 지금은 없지 않나. 내가 직접 목 잘라서 죽였잖아.
그때였다. 복잡해진 생각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을 무렵, 무언가 묵직한 것이 엉덩이를 편하게 받쳐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배꼽을 확 잡아당기는 감각이 창졸간에 엄습했다. 깜짝 놀라는 동시에 짧은 비명이 들려 눈을 돌리려는 찰나, 보고 있던 풍경이 돌연 쏜살처럼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한다.
잠시 후, 몸이 덜컥 흔들리며 멈췄을 즈음, 나는 두 다리가 허공을 휘젓고 있음을 인지했다. 시야 또한 평소 보던 높이보다 훨씬 드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키가 무려 십 미터가 넘는 그림자 거인이 땅에서 올라와 있었다.
비단 나만 이렇게 된 게 아니었다. 남다은도, 한소영도, 마르도 각각 그림자 거인의 어깨에 놓인 채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고연주는 새로 생겨난 형상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림자 거인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이래~. 하늘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이러니? 아니면 어디로 데려다 주려고?”
응? 데려간다니?
“!”
라고 생각한 순간, 나를 들어 올린 그림자 거인이 예고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덩치에 걸맞게 성큼성큼 걷는 게 아니라, 미끄럼틀 탈 때처럼 스르르 미끄러지듯이 이동한다. 밀려나는 공기에 얼굴이 시원해질 만큼 속도도 상당히 빠르다. 설마 여기서 청룡 열차를 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여전히 쿵덕거리는 가슴을 추스르려 애쓰며 앞을 바라봤다. 사실 아직도 믿기 지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던 터라, 어리둥절한 기분은 여전하다.
으음. 그러고 보니 길이 자연스레 열린다고 했던가?
“아.”
그러자 불현듯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약속의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
한편, 같은 시각.
김수현과 네 여인이 사라지자 북 대륙 원정대는 한바탕 야단이 났다. 특히 머셔너리와 이스탄텔 로우 클랜의 난리 정도가 굉장히 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클랜 로드는 물론, 명성 높은 사용자 셋을 잃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으랴.
성질 급한 이유정은 이까짓 장막 당장 부숴버리겠다고 한 차례 난동까지 피웠다. 하지만 김수현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꿈쩍도 않은 법역이다. 한데 이유정이 무슨 수로 깨트리겠는가.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원정에 잔뼈가 굵은 이들도 여럿이라, 한 번 기다려보자거나 아직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 않느냐는 등등 달래는 사용자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하여 폭풍 같던 소란이 서서히 가라앉는 가운데, 오직 해밀 로드만이 냉정하게 상황을 읽고 있었다. 물론 김유현도 김수현이 사라졌을 때 크게 기함하기는 했다. 그러나 앞서 들은 말이 있는 터라, 마냥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 중이었다.
‘이상하다. 왜 다섯 명만 사라진 거지?’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 여긴 걸까. 김유현은 비비앙을 찾아 비석에 적힌 내용을 한 번 더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들리는 구절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림자 여왕, 검의 여왕, 철혈의 여왕, 그리고….’
실제로 ‘다섯 명이 사라졌다.’ 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추측은 정답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 비석의 글귀, 갑작스러웠던 기둥의 출현, 그리고 다섯의 사용자가 차례대로 사라지는 과정.
말인즉 이 일련의 흐름이 상호 연관되는 구석이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김수현은 일 회차 때 경험에 강하게 얽매여 있어 늦게 깨달았지만, 김유현은 비교적 객관적인 처지에서 볼 수 있어 보다 빠르게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응? 주변이 좀 밝아진 것 같지 않아?”
“어…. 그런가? 아니, 진짜네? 갑자기 안개가….”
그때 언뜻 들려온 이야기가 김유현의 귀를 때렸다. 무심코 인근을 돌아본 김유현의 눈동자로 순간적으로 이채가 스쳤다. 아닌 게 아니라, 잔뜩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옅어지며 주변 시야가 선명해지는 중이었다.
‘이것도 방금 현상의 원인인가? 돌아보니 이곳도 상당히 너른 초원, 아니 황무지에 가까워 보이는데…. 아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김유현은 돌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좌우를 휙휙 둘러보더니 품으로 급히 손을 쑤셔 넣었다. 필요 이상으로 꽉 말아 쥔 손에는 푸르게 빛나는 통신 구슬이 잡혀 있었다.
“…하.”
그러나 다음 순간, 김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아무리 마력을 흘려 넣어도 구슬이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요지부동이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저 법역이라는 막이 김수현이 가지고 있는 통신 구슬과의 연결을 원천 차단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고작 이것 가지고 김수현이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누가 뭐라 해도 현재 북 대륙 원정대의 제일 전력은 머셔너리 클랜이다. 몇 년 전 강철 산맥의 이, 삼, 사 지역 공략부터 근래 있었던 동 대륙 전투까지. 어디 하나 머셔너리가 활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사용자가 바로 김수현이다.
그러할진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사용자 김수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김수현뿐만 아니라 고연주, 남다은, 마르, 한소영까지 이탈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렇구나. 다섯 명이 사라졌구나.’ 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특히 다른 누구도 아닌, 김수현이라면 더더욱.
기실 좀 전까지만 해도 김유현은 걱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쩌면 험난하기 짝이 없을 약속의 신전 원정을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고.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니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설령 추측대로 된다손 쳐도, 김수현이 제로 코드를 가지고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지 누가 안다는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찰나, 김유현은 순간적으로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왜냐면 김수현이 그랬으니까.
‘우리 지금….’
적은 우리보다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비슷하게 도착했을 수도 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가?’
…혹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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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2의 마무리.
이제 곧 시작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