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29
00928 A Poisoned Chalice, Two. =========================================================================
시간을 조금 돌려, 기둥의 각성이 막 시작됐을 즈음.
법역의 영향이 미치는 곳이 전부 그렇듯이, 제단이 있는 장소로부터 약 십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도 희멀건 한 공기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어느 곳이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꼈다지만, 유독 이 부근에 지나가는 기류는 소름 돋을 만치로 오싹한 냉기를 품고 있다.
그렇게 까닭 모를 을씨년스러운 적막이 이어지던 찰나, 불현듯 부옇게 뜬 대기가 장작불의 그림자처럼 흔들흔들 춤을 춘다. 그러자 한들대는 아지랑이 사이, 옅은 빛을 띤 청연(靑煙)이 살며시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진다.
해가 중천에 오른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차갑다. 게다가 간간이 부는 바람은, 곧 뻥 터져나가기라도 할 듯 꽉 찬 살기를 암암리에 드러내는 중이다.
“후.”
그때 문득 작은 숨소리가 새더니, 자욱한 안갯속에 숨은 실체가 서서히 나타났다. 언뜻언뜻 비치던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눈동자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귀가 뾰족한 여인이 눈을 몹시 가늘게 뜬 채 서슬 퍼런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시작됐나.’
에르윈은 찡그린 눈에 한층 힘을 줬다. 가일층 강렬해진 눈빛이 향하는 허공에는, 인근에 흐르는 안개가 유별나게 둥근 둘레를 따라 돌고 있다.
그 가장자리 안쪽에는, 놀랍게도 한 영상이 생성돼 있었다. 안개로 흐릿한 부분은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듯 제단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 웅웅웅웅!
잠시 후, 영상 속 기둥이 차례대로 반응하는 걸 보며 에르윈은 살짝 눈을 깔았다.
‘역시 예언은 틀리지 않았어.’
예언.
새로운 여왕이 출현했다. 그리고 왕의 곁에 비로소 네 여왕이 자리 잡았다.
하나 재밌는 사실은 대계의 예언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금도 예언 일부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여하튼 상황은 무척 빠르게 돌아가는 중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거대한 빛 덩이가 떠올라, 다채로운 광선을 지상으로 연달아 떨어트리고 있었다.
여기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예언은 하나.
악마는 다변화 패배의 일 차 조건을 만족했다.
여기서 사탄이 주목한 단어는 다변화라는 말이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예언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탄은 동 대륙에서 북 대륙과 부딪쳤을 때 의도적으로 패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말인즉, 동 대륙 전쟁의 패배는 ‘액땜’의 개념이 아니다.
바로 ‘제물’이었다.
– 화아아악!
그때였다. 영상이 빛으로 가득해지더니 김수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비로소 한 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이 제로 코드의 시험에 들었다.
이제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는 사탄도 장담할 수 없다.
물론 괜한 짓이었을 수도 있다. 고작 말장난에 사활을 걸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때의 패배가 허튼짓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거대한 나비 효과를 일으킬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탄은 그저 한 번도 엇나간 적 없는 예언을 신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뿐. 행동의 결과는 곧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에르윈은 약간 숙였던 허리를 느릿하게 폈다. 이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 대륙의 패배로 김수현에게 하나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고, 뒤로는 몰래 힘을 모아 하나로 결집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제물이 먹혔는지 안 먹혔는지, 몸소 확인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래서.”
그러한 찰나, 등 뒤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왕과 여왕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전군 진격만 남은 건가?”
타나토스가 팔짱을 낀 채 요요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에르윈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김수현이 사라진 지금이 공격하기 가장 적기인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애초 노리고 있었던 만큼, 에르윈도 이 골든 타임을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김수현이 사라졌다고 해서 무작정 공격하는 건, 간신히 잡은 기회를 고스란히 헌납하는 것과 같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실제로 북 대륙은 아직 적의 위치는커녕, 도착 여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 에르윈은 우선 이 상황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 공들여 배치했던 여러 안배가 셀 수도 없이 파훼 되는걸 보며 얻은 게 하나 있다면, 다름 아닌 정보였다. 아니, 경각심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사탄은 두 눈으로 직접 보기까지 했다. 루시퍼가 안배한 고대 악신 계획이 누구한테, 어떤 식으로 깨졌는지.
“설마 워프 게이트 먼저 파괴할 생각이야?”
리리스가 혹시나 하는 투로 말을 꺼냈으나 에르윈은 또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괜찮은 의견이라며 끄덕거리던 아스모데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탄, 아니 에르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그럼 빨리 말을 하라고. 보니까 한 놈 행동이 이상해지는데, 빨리 움직여야…!”
계속 영상을 흘깃거리고 있던 아스타로트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에르윈은 손으로 영상을 살짝 훑더니 뒤를 돌아봤다.
“리리스, 아스모데우스, 아스타로트.”
기실.
하나 있기는 하다.
최적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보다, 워프 게이트를 저격하는 것보다 더 우선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경중을 말하라면 앞선 두 개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고?
간단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했으니까.
“명령이다.”
그 순간 호명된 악마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말 자체가 다소 강압적이다.
애초 ‘모든 악마의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만큼, 대 악마들도 암묵적으로 사탄을 선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 강압적으로 느꼈다고 해도 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데, 그 누구보다 독립성을 존중하는 사탄이 드물게도 명령이라는 말을 꺼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앞으로 나올 지시가 아주,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악마 군주들한테도 전하라. 지금부터 우리는 무조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여인을 최우선으로 처리한다.”
그렇게 말한 에르윈이 영상을 가리키자, 대 악마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오묘해졌다. 한편으로는 방금 지시에 누구도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는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타나토스 님도 같이 부탁하겠습니다.”
그러자 마침 영상을 보고 있던 타나토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흐으으음…. 글쎄? 부탁은 어렵지 않지만, 얘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굉장히.”
“워프 게이트보다도? 아니. 기습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쟤 하나 처리하는데 모조리 쏟아 붓겠다는 거니? 정말로?”
“저 여인을 첫 기습 때 죽이지 못한다면, 김수현이 없는 전투에서조차 패배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에 타나토스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나, 사탄의 말은 누가 들어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다. 결국에는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뭐, 그렇다면야. 한 년 정도 저격하는 거야 쉽지.”
그렇게 타나토스까지 동의한 순간, 에르윈은 허공을 흘끗 흘겼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김수현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거니와, 이 이상 시간을 주는 건 미련한 짓이었으니.
잠시 후.
한 쌍의 박쥐 날개가 에르윈의 등을 찢으며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조용히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타나토스도, 대 악마도, 악마 군주들도 모조리 에르윈을 따라 날았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하늘에 흐르는 구름 사이로 살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잔뜩 끼어 있던 안개가 조금씩.
스스스스, 스스스스!
그러나 광범위하게 헤쳐지기 시작했다.
*
지금 내가 겪는 일이 현실일까, 꿈일까? 볼을 꼬집어봐도 그대로니 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림자 거인의 어깨에 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절반쯤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일 회차 때 경험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반신반의하던 마음은 점차 믿음으로 기울었다. 아니, 기울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림자 지대를 고속으로 벗어난 후, 다음 지역으로 들어섰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칼의 지대로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었던 건, 가히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각양각색의 검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광경이었다. 동시에 설마 설마 하던 추측이 확신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처음에 마르는 우리를 향해 쇄도해오는 수천의 칼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한 걱정이었다. 왜냐면 칼끝에 꿰이는 꼬치 신세는커녕, 그림자 지대에서 겪었던 현상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와….”
‘검의 여왕’ 남다은은 자기를 둘러싸 회전하는 칼을 보며 연신 감탄을 터뜨리는 중이다.
사실 상당히 웃기는 장면이다. 남다은이 가끔 살그머니 손이라도 뻗을라치면, 검은 행여 다칠세라 스스로 휙 멀어졌다가, 이내 살그머니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남다은의 사위를 빙그르르 돌기 시작하고. 꼭 여왕을 수호하는 추종자를 보는 기분이다.
단, 그림자 지대와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 칼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금 봐도 그렇다.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은장도처럼 보이는 검 하나가 내 주변을 자꾸 어정거리는 중이다. 왜 저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검의 주인이라는 호칭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한 번 시험해볼까?
나는 칼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넌지시 손을 뻗어 덥석 잡아챘다. 뜻밖에도 은장도는 달아나는 척하더니 순순히 잡혔다. 이내 조용히 입속으로 집어넣은 순간 칼날이 부르르 떨리는 걸 느꼈으나, 혀를 살살 굴리며 흡입하니 곧 축 늘어진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하도 반응이 신기해 이로 꽉 깨물어보고도 싶었지만, 한소영이 아까부터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봐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확인했으니까.
이윽고 환영 의식이 끝나고 나자, 그림자 지대 때처럼 인도(引導)가 이어졌다. 거두절미하고, 우리는 하늘에서 착륙한 거대한 대검에 올라타(흡사 슈퍼 보드를 타는 기분이었다.), 편하고 빠르게 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어지는 철혈의 지대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지나쳤다. 그림자나 칼은 보기에 따라서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지만, 핏물을 묻힌 강철로 된 병사는 상당히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이 아양 떠는 성격은 아니어서, 우리는 침묵과 정중함이 공존하는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지대를 가로지를 수 있었다.
네 번째인 성스러운 지대에 이르러서는 약간 시간을 지체했다. 들어가는 순간 찬란한 빛을 발하는 빛무리가 곳곳에서 생기더니, 종래에는 마르를 둘러싸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유심히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저러는지 나름대로 짐작 가는 바가 있던 터라, 실로 법역 안으로 들어온 이후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만에 하나 마르가 여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빛무리가 어느 순간 선명한 빛 가루를 뿌리는 걸 보니, 마르도 결국에는 여왕으로 인정받은 듯했다. 하기야 이 법역에 강제로 소환됐을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계산해본 결과,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어림잡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일 회차 시절, 네 지대 공략이 끝났을 때 양기덕이라는 사용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원정대는 약속의 신전까지 도착하는데 반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실제 간격은 뛰는 걸음으로 여섯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다고. 그 당시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발표였다고 기억한다.
한데, 이번에는 여섯 시간은커녕, 무려 절반도 되지 않는 시간으로 전 지대를 패스했다. 그것도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어떤 수고도 들이지 않은 채로.
그렇게 빛무리가 전해주는 무언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성스러운 지대마저도 논스톱으로 통과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스러운 지대를 빠져나온 우리의 눈앞으로, 대망의 최후 관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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