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0
00929 A Poisoned Chalice, Two. =========================================================================
최후의 관문.
최후의 관문이라 함은, 성스러운 지대와 다음 지역의 경계를 긋는 기나긴 산성을 일컫는다. 말인즉 그 경계만 넘으면 약속의 신전이 장소가 나오므로 최후의 관문이라 부르는 것이다.
“와…. 진짜 길다.”
“높이도 높이지만 길이가 장난이 아니네.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으려나?”
남다은과 고연주가 차례대로 탄성을 터뜨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최후의 관문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구조물이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면은 큼직한 회색 벽돌로 차곡차곡 쌓여 반듯하게 맞물려 있다. 높이는 못 해도 십 미터 이상이고, 두께도 장장 사 미터가 넘는다.
무엇보다 고연주의 말대로, 망망대해 같은 벌판에 혼자서 한도 끝도 없이 일(一)자로 펼쳐져 있는 광경은 장관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꼭 만리장성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늘을 날지 못하는 이상 저 관문을 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걸어서 통과할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산성 전체로 보면 작달막한 구멍에 불과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문 없는 통로라고 보는 게 옳을 터.
여하튼 이 장소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만큼, 머릿속을 더듬으며 걷자 이른 시간에 길을 찾아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최후의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성큼 다가온 광경은, 이제껏 지나쳐온 지역과 상당히 판이했다. 네 지대가 경치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던 허허벌판이었다면, 이곳은 눈을 돌리는 곳마다 흰색 건물이 걸리는 몹시 넓은 공간으로, 흡사 흰 눈에 덮인 외로운 고대 유적을 보는 듯했다.
단지 대부분의 건축물이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낡아 부스러졌고, 또 워낙 고요하고 적막한 터라 약간 세기말다운 황량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이쯤 되면 ‘여기는 어떤 곳이지?’ 라는 말이 응당 나와야 할 터. 아니면 ‘이제 어디로 가야지?’ 라거나.
그러나 네 여인은 아까부터 침묵하는 중이었다. 살짝 뒤를 돌아보자 전원 입을 약간 벌린 채 넋을 잃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한소영이 나와 눈을 맞추더니 아차 하며 “합.” 입을 닫는다. 그리고 까닭 없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본능에 따라 얼른 다시 앞을 응시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그라운드 제로 같은 풍경 속에서, 언뜻 전각(殿閣)과 흡사한 거대한 건축물 하나가 홀로 두드러지게 솟은 게 보였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지 먼빛이기는 했으나,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하면 여기서도 또렷하게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희디흰 겉면에 흐르는 빛에서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
그래.
약속의 신전이다.
약 이십 분에 걸쳐 걸어간 결과, 우리는 약속의 신전 바로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도 대단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한층 놀라웠다.
가장 아래에서 받쳐주는 직사각형 단상의 두께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큼직하고 웅장하다. 그 위로는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하는 기둥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으며, 상부에는 바로크 양식의 교회와 똑같은 구조물이 기둥과 연결돼 있다. 거기다 꼭대기는 고풍스러운 아치를 그리는 지붕으로 멋지게 마무리했다.
이렇게 삼단으로 결합한 신전이다 보니, 새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다.
“후유!”
누군가 갑자기 숨을 토하자,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가 두 번 더 이어졌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건물의 위세에 압도당했던 거겠지. 처음 봤을 때 나도 저러지 않았으려나.
나는 속으로 웃으며 좌우를 번갈아 봤다. 정면으로는 길이 없고, 좌우로 돌아가면 단상을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곳까지 왔는데 뭘 더 고민하고 주저하랴. 그렇게 생각하며 더 가까운 쪽으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길고 드넓은 계단을 밟은 우리는 마침내 거대한 단상에 올라 신전 앞에 섰다.
“…하.”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다.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흰색 문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는 순간, 나는 두 번째로 제로 코드를 쥐게 되는 것이다.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앞의 문을 젖히려 손을 뻗었다.
“머셔너리 로드는.”
그때였다.
“별로 놀랍지 않으신가 봐요.”
문득 들리는 잔잔한 음성에 나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꼭 이곳에 온 적이 있는 사람 같아요.”
“…예?”
간신히 반문하기는 했으나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멍하니 몸을 돌리자, 한소영이 깊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아니.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러고 보니…. 너무 길 잘 아는 거 아녜요? 이렇게 넓으니 좀 헤맬 법도 한데?”
고연주도 생각하는 체하더니 검지로 턱을 받치며 물었다. 살살 눈웃음치는 걸 보니 장난스레 물은 것 같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왜 갑자기 저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스리슬쩍 넘기는 게 낫겠다.
“그럴 리가요. 그냥 운이 좋은 거겠죠. 하하.”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자, 고연주는 눈을 홉뜨며 아랫입술을 약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한소영의 고개가 아주 살짝 앞으로 기울어졌다. 순간 아차 싶었다. 한소영의 초감각을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다. 실수라면 실수였다.
다음 순간, 옆에서 빤한 눈초리가 느껴졌으나 억지로 헛기침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젖혀 등 떠밀리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무려 오 년 만에 입성하는 약속의 신전이었으나, 더는 감회 같은 속 편한 감정을 음미할 상황도 아니었다. 무언의 압박이 자꾸만 등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길은 알고 있으니 반사적으로 걷고는 있지만, 사실 땀이 솟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등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지금껏 잘 숨겨왔는데….
그러나 한참을 정신없이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불현듯 이제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어차피 제로 코드를 얻고 돌아가면 상황 종료 아닌가? 물론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끝을 앞둔 만큼 굳이 숨길 필요도 없잖아.
얼핏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두운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어느새 여기까지 온 걸까. 한동안 정신이 팔렸다 보니 내부는커녕, 기관 장치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걸 보니 무언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흘깃 뒤를 돌아보니 남다은과 마르는 계단 옆 벽을 연신 두리번거리는 중이다. 그리고 다른 두 여인은 심각한 얼굴로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연주가 주로 말을 하고 한소영은 가끔 끄덕거리는 게 왜인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이는 항상 은근슬쩍…. 응?”
“!”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중단하며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둘 다 어여쁘게 눈을 흘기더니, 숫제 둘이 딱 붙어서 더욱 열심히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흡사 나 보라는 듯이 말이다. 뭐. 어쩌라고.
공교롭게도 마침 계단 끝자락에 다다라, 나는 입맛을 다시며 위층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심한 갈등이 일었다.
현재 약속의 신전은 모종의 이유로 수호자가 출현하지 않으며 함정도 발동하지 않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지대에서처럼 우리를 통과시켜주는 느낌이었다. 그럼 가는 길이 문제인데, 위층부터는 꽤 복잡한 미로가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헤매는 모습을 보일까, 아니면 아는 길로 갈까.
결정은 생각보다 금세 내릴 수 있었다.
숨기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 먹고 문을 열자마자, 역시나.
길쭉한 벽이 구불구불 얽힌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언뜻 보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굉장히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그러나 나는 미로 속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는 내내 예상대로 수호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이나 길이 바뀌는 기관 장치 또한 단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미로를 빠져나가 곧바로 계단을 올라, 다음 층도 단숨에 돌파했다.
한 층을 공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십 분. 초고속으로 신전을 오른 결과,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가장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최상층은 은은한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터널과도 같은 복도였다. 그리고 이 복도의 끝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통행로 나 있다. 오직 어둠만이 꽉 들어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통로가.
내가 걸음을 멈춘 것도 복도 끝에 다다라서였다. 통로를 목전에 둔 채,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추스르려 힘껏 숨을 들이켰다.
나는, 이 안에서 제로 코드를 얻었다.
“수현~. 이 안은 어떤 공간이에요~?”
고연주는 통로 안을 가리키며 몹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약간 깐족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추후 저 까부는 가슴을 꽉꽉 주물러주리라 다짐하며 심술궂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흐으으응~?”
“안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스탄텔 로우 로드. 라이트를 켜주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한소영의 반응은 없었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만 한 번 깜빡였을 뿐.
“…….”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자 괜스레 오기가 솟구쳐, 나도 침묵하며 눈만 깜빡거려보기로 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깜빡!
…깜빡?
깜빡깜빡!
…깜빡깜빡?
이윽고 눈을 세 번 깜빡거리려는 찰나,
“…후. ────. ────.”
한소영이 작게 한숨짓더니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순간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기분이 엄습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냥 들어갈걸.
“라이트.”
그러나 한소영은 이미 주문을 끝냈고, 환한 빛을 발하는 구체가 생성됐다. 통로로 전진하는 빛의 구체를 따라, 나는 침착히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흠. 이제 왔나.”
…응? 방금 누가 말한 거지?
“뭐, 아무튼.”
아니, 앞에서 들리지 않았나?
“두 번째로 정상에 오른 기분은 어떤가? 과거의 정상(頂上)이여.”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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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頂上)이라는 진명에는 김수현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효과가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