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1
00930 A Poisoned Chalice, Two. =========================================================================
막 문턱을 넘어간 찰나,
퉁!
갑자기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쪽으로 시퍼런 불길이 확하고 솟아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앞을 주시했다. 자세히 보니 긴 막대기 끝으로 얹힌 화로 그릇에 청색 화톳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퉁, 퉁, 퉁, 퉁!
이윽고 새로운 푸른 불길이 정면 방향으로 또 한 번 생겨났다. 망연히 보고 있자, 불꽃은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하나씩 타오르더니, 종래에는 지그재그로 나열된 화로 사이의 길목을 밝히며 장내의 어둠이 걷혔다.
그리하여 드러난 중심부는, 생각보다 작고 둥근 공간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환의 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지름은 약 사십 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천장까지의 높이는 무려 이십 미터가 넘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한 점으로 모이는 형태였다. 밖에서 봤던 아치 모양의 지붕이 바로 이곳인 듯싶다.
단지 길 앞에서 타오르는 화롯불이 곳곳으로 불빛을 퍼트려, 방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돌아 괜스레 신기하고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거지?”
그때 좀 전의 음성이 한 번 더 귀에 들렸다. 공간을 웅혼하게 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성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맞은편 길목 끝자락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제단을 발견했다. 제단은 화려하기는커녕, 어떤 장식이나 꾸밈없이 간소했으며, 오직 성인 남성 손바닥 크기만 한 잔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설마, 저기서 들린 거?”
“…벌써 잊은 건가.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나, 실로 멍청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렇다는 듯이 말하는 투에 나는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왜냐면 처음에는 새침한 소녀 같은 음성이었다가, 방금은 늙은 노파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생각하면 굵고 시원시원한 남성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소리였다.
화로 사이를 가로지를 때까지만 해도 음성은 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단을 올라 큰 잔 앞에 섰을 때, 불현듯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흠. 그래도 좀 달라졌나.”
“?”
“왜 모르겠다는 얼굴이지. 시간을 돌리겠다고 난리 칠 때는 그렇게 독기 찼던 얼굴이, 읍?”
“자, 잠깐.”
너무 갑작스러운 폭로에 나도 모르게 잔을 손으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 야, 야 임마!
그러나 화정이 깜짝 놀란 음성으로 외치고,
“무엄하다. 이놈.”
잔도 약간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해 서둘러 손을 뗐다.
“…뒤를 신경 쓰는 것이라면 걱정 말거라. 지금 너와 나와 대화는 들리지 않을 테니.”
아, 설마 아까 느꼈던 감각 때문인가. 그럼 다행이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둥절하기는 매 한 가지다. 나는 침착해지려 애쓰며 제단에 놓인 잔을 천천히 살폈다.
언뜻 보면 아무 특색 없는 약간 넓적한 잔에 불과하다. 물론 일 회차 때 이 제단에서 제로 코드를 얻기는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눈앞의 잔에 담겨 있더라.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이유인지 제로 코드가 보이지 않고, 또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당시에 목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다. 그저 보자마자 제로 코드를 쥐고, 쫓기듯 빠져나왔던 것만….
“확실히 그랬지. 내가 말도 붙이기 전에 참 잘도 도망치더구나. 그렇게 무례한 짓을 당한 건 처음이었어.”
허? 설마 내 속마음을 읽은 건가?
“그 정도야. 아무튼, 또다시 정상에 오르니 어떤가? 오래지 않은 과거에 정상에 올랐던 이여.”
흠칫한 찰나, 아까와 같은 물음이 이어졌다. 동시에 느닷없이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엄습했다.
어떠냐니. 글쎄.
질문의 의도조차 모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좋은데. 좀 놀랍기도 하고.”
무언가 있는 체하며 말하기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이렇게 쉽게 제로 코드가 있는 곳까지 올 줄을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
“네 감정을 물은 게 아니란다. 다시 말하거라.”
하지만 역시나 초점을 잘못 짚은 듯하다.
– 네 현재 감정이 아니라, 회귀 이후 이곳까지 이른 것에 관해서 말하라는 거야.
‘으, 응?’
– 우선은 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질문에 집중해. 또 괜히 말 빙빙 돌리지도 말고. 지금도 충분히 불순하니까.
‘…그래. 알았다.’
뭐가 불순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화정이 이러는 걸 보니 함부로 대할 대상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제로 코드와 연관된 신일지도. 아니면 제로 코드가 신 자체거나.
어쨌든 화정의 조언을 받아 나는 다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모호한 말은 집어치우거라.”
나름 느껴온 바를 말했으나 잔의 회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묻는 주제에 뭐가 이리 강압적인지 몰라 불만이 솟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약속의 신전 내 지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시험의 지대가 남아 있었다. 말인즉 현재 시험받는 처지일 수도 있으니.
“아무렇게나 말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한 거야.”
“아무렇게 말했다고 한 적은 없는데. 모호하게 말하지 말라고 했을 뿐.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는 뜻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풀어서 말해보면, 이 회차는 확실히 일 회차와는 달랐어. 과정도 달라졌고, 결과도 달라졌지.”
“그건 변했다겠군. 허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어째서? 실제로 이 장소에서 겪은 것만 비교해도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나.”
“뭐, 그렇기는 해.”
“흠?”
“하지만 뭐랄까…. 잔가지는 달라졌지만, 나무 자체는 똑같다고 해야 하나? 아,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아. 하지만 일 회차에 겪었던 일 중 커다랬던 것들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비슷하게라도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려놓듯이…. 이런 뜻으로 말한 거였어.”
“…….”
생각보다 말이 길어졌다. 잔은 짧은 침음을 흘린 후, 조용히 침묵했다. 흡사 내가 한 말은 곱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다면, 후회하는가?”
“…뭐?”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네 말에서 회한이 느껴져서 그렇다.”
“…….”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뜬금없다고 느꼈지만, 잘 생각해보니 전의 질문과 이어지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후회라.
“후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라, 나는 천천히 턱을 젖혀 위를 올려다봤다. 돌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나긴 한숨이 새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투박하던 천장이 갑자기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글쎄.”
엄밀히 말하면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어쨌든 형과 한소영을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단지, 단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왜인지 잔의 말이 심장 깊숙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말해볼까. 오 년 전의 너는 무조건 하나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아마 그때의 너였다면 생각조차 않고 아니라고 했겠지.”
“…….”
“허나 네가 말한 잔가지라는 것들은 너를, 그리고 네 목적에도 영향을 미쳤어. 언제나 민폐만 끼치는 존재에서 가장 사용자다운 존재로. 배신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던 주변은 믿음직한 동료들로 채워졌다. 이 외에도 여러 변화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을 터. 즉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을 거다.”
“…….”
“돌아가기가, 싫다.”
“…….”
“하지만 가슴 한 켠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었겠지? 왜냐면 인정해버리는 순간, 회귀하겠다는 네 선택이 헛수고가 돼 버리니까. 차라리 세라프의 조언을 듣는 게 더 나았을 테니까. 너를 지금껏 지탱해온 단 하나의 뜻이, 신념이, 목적이, 목표가 모조리 무너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급기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잠시 말이 끊겼지만,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사용자 김수현.”
잠깐만.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그 변화를 거치고 거쳐서, 지금 이 자리에 서니 어떤가?”
그 순간, 무심결에 탄식이 나와버렸다.
…과연. 아까의 질문은 이런 뜻이었나. 애초 맥락을 잘못 짚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나는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은, 아니 아니. 젠장.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일 회차였다면 지금 주변에 있는 동료도 없었을 거고, 게헨나와 수나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등등. 여러 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다.
“그…!”
그러나, 끝내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왜냐면 말하는 순간, 내가 제로 코드에 빌었던 단 하나의 바람이 틀어져 버리니까.
그리고 그걸 인정하기가 싫었으니까.
“…건.”
결국에는 잔의 말이 옳다. 해답은 진작에 나왔다. 잔의 말대로였다. 나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해버린 찰나,
“모르겠어….”
결국,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그런가.”
잔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하다. 까닭 없이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미지는 외면의 결과인가. 선택이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니, 실로 안타깝구나.”
“……?”
“십오 년간 목적했던 순간을 비로소 앞뒀음에도…. 하긴, 그나마 버티게 해주던 독이 빠졌다면 남는 건 정신의 마모일지도. 그렇다면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져 가는 중이겠지….”
“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다. 시험은 끝내도록 하지. 이제 그만 손을 얹도록.”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축하해야 할지, 아니면 애도해야 할지. 어쨌든 네 끝이 어떨지 나도 자못 궁금해졌거든.”
그러나 미처 입을 떼기도 전, 내 손은 이미 무형의 기운에 끌어당겨 져 잔을 덮어버린 후였다.
“가라, 마주쳐라, 부딪쳐라. 그리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웅웅웅웅웅웅웅웅!
“내게, 너의 끝을 보여라.”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장내로 돌연히 거대한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현 시간부로 사용자 김수현을 첫 번째 계승자로 설정하며, Code Name Zero를 실행한다.”
끄긍, 끄그그긍!
이어서 어디선가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내 손에 덮인 잔으로부터 푸른 성화(聖火)가 치솟았다. 어찌나 강렬하게 타오르는지, 손 틈새로 줄기줄기 새어 나온 빛무리가 장내를 가득하게 물들일 정도였다.
이윽고 푸르고 흰빛에 시야가 점차 희미해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강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펄펄 나부꼈다. 귀로는 여전히 녹슨 기계음이 들리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이 전신으로 올올이 스민다.
그리 낯설지는 않은 감각.
나는 본능에 따라 안간힘을 쓰며 잔을 쥔 손을 꽉 오므렸다.
다음 순간,
“!”
손아귀로 동글동글하면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띠링!
여러 개의 메시지가 삽시간에 시야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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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절단으로 독자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벌인지….
어제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참 되는 일 하나 없더라고요. ^^;
속이 한 서너 번은 터진 것 같네요.
후유유유.
그리고, 몽구헌터 님께.
Q. 작가님 진짜 악마들이 안솔 죽이는 거 성공해서 북대륙 애들 많이 조지고 나서 김수현이 그거보고 제로코드로 안솔을 위해 다시 시간을 돌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누가 죽든, 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절대로 3회차는 없습니다.’ 고 말씀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