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4
00933 A Poisoned Chalice, Two. =========================================================================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포위망은 박살 나다 못해 완전히 와해하고 말았다. 김수현의 무력에 기함한 적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기야 뒤늦게 쫓아온 네 여인까지 가세했으니 더 버틸 도리가 없기도 했다. 덕분에 전멸 직전까지 갔던 아군 무리는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봤자 아직 전장 한복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구출한 인원은 어림잡아 이백 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 정도로 진영이 깨지고 산산이 조각나버렸다는 뜻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무리 중 머셔너리 클랜원이 소수나마 섞여 있다는 정도일까.
“클랜 로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흘끗 돌아본 찰나, 씩씩 몰아쉬던 김수현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사용자…?”
걸레 쪼가리를 보는 듯한 더러워진 로브와 그을음이 잔뜩 묻은 얼굴. 두 손은 선혈로 잔뜩 적셔져 핏방울을 뚝뚝 떨구는 중이다. 굳이 어땠냐고 묻지 않아도 거한의 몰골은 몹시 처참하기 짝이 없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아니, 사용자 신재룡. 괜찮습니까? 상처가….”
“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이…!”
“동료들이요?”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떨어져 버려서…. 큭!”
“…….”
당장 쓰러져 죽을 것만 같은 모습임에도 신재룡은 동료를 걱정하고 있었다. 김수현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거리며 손을 들었다.
“혹시 안솔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저격당하고 나서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태도와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신재룡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가 아차 하며 말을 이었다.
“안솔은…. 모르겠습니다. 검은 머리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순간, 사용자 제갈 해솔이 간발의 차이로 안솔을 감싸고 워프 능력을 사용했습니다.”
검은 머리 여인은 아마 타나토스를 뜻하는 말일 터. 말인즉 목숨이 끊기기 직전 제갈 해솔이 구출해 도망쳤다는 소리다. 물론 생사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총명한 제갈 해솔이라면 분명히 어떻게든지 손을 써놨을 것이다.
잠시 안도한 김수현은 다시금 전장을 둘러봤다.
전황은 여전히 최악으로 치달리는 중이었다. 아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고 있으니. 냉정하게 보면 여기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건 이미 글렀다. 제로 코드를 가지고 돌아오는 동안 기울어도 너무 기울었다.
이윽고 두 형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김수현의 얼굴빛에 심히 갈등하는 기색이 어렸다.
아무리 전장이 어지럽다지만, 김수현이 이 무리만 이끌고 후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정령 군단을 소환할 수 있는 마르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탈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자리에는 김유현과 한소영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나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꼭 지켜야 할 대상이 같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천운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김수현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제로 코드도 얻었겠다.
그냥 눈 딱 감고 빠져나간 후, 지구로 몰래 돌아가 버리면 알게 뭔가.
“…….”
잠시 후, 김수현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입가에 묻은 핏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자.”
“예?”
신재룡이 놀라는 동시에 김유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뜻밖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전황상 퇴각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일말의 죄책감이 엄습했다. 김유현이라고 상황을 이렇게 만들고 싶었을까.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좀 더 신속히 후퇴할 수도 있었고 억지로 버티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단지 일곱 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김수현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무리하게 맞서다가 이 지경이 됐을 뿐. 형 된 처지에서 하나뿐인 동생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그때 김수현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김유현은 흠칫 놀랐다. 김수현의 얼굴은 극도로 절제된 표정이었으나, 두 눈만큼은 서슬 퍼런 불길을 뿜고 있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김수현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작고 예쁜 푸른 구슬이었다.
“일 계승자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사용자 김유현을 제로 코드의 이 계승자로 요청한다.”
『사용자 김유현. 이 계승자로 설정 완료.』
맑은 기계음과 함께 구슬이 말간 빛을 뿜었다. 김유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그래. 이게 제로 코드야. 잘 보관하고 있어. 절대로 뺏기면 안 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 김수현이 제로 코드를 맞은편 로브 안으로 깊숙이 찔러 넣는다. 김유현은 잠시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어라 말하기도 전,
“그리고 잘 들어.”
뜨거운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부터 전장에 남아 있는 아군을 구출하면서 적의 시선을 끌 거야. 날개로 날 수 있으니까 기동성은 내가 훨씬 나아.”
기이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컸다. 흡사 여기 있는 모두가 들으라는 것처럼.
“그러니까 형은 여기 사람들이랑 바로 이탈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멀리 벗어나는 거야. 알아 들어?”
“뭐, 뭐라고?”
김유현이 황망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김수현의 말인즉 여기는 자기 혼자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도망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제로 코드를 맡겼다고 해도, 김유현이 ‘아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물론 그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김수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퍽.
“무슨, 우욱!”
벌컥 고함치려는 순간, 김수현은 김유현의 복부를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퍽, 퍽.
한 번으로도 부족해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같은 곳으로 주먹을 꽂는다. 그러자 순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는 것도 잠시, 결국 김유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가만히 보고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렸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 속에서 뇌제라는 중요한 전력을 강제로 기절시킨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현이 미안한 눈을 하면서도 해류마를 소환하고, 그 위로 김유현을 올리는 걸 보자, 머리 회전이 빠른 사용자는 아차 했다. 아까 김수현의 외침이 누구한테 한 말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도.
“마르, 사용자 고연주!”
그 와중에서도 김수현은 특별히 두 명을 호명했다. 이 전장을 아무 방해 없이 벗어날 확률은 0%에 수렴하지만, 이 두 명을 붙인다면 이탈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마르의 정령 군단은 어지간한 마족 무리 일천과 맞먹는 전력이며, 고연주라면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도 김유현 한 명 정도는 데리고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자, 잠깐만요!”
그렇게 생각하고 서둘러 끌어서 앉히려 했지만, 마르의 반항이 생각보다 굉장히 거셌다.
“마르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그럴 수 없어요! 아니, 싫어요! 절대로 싫어요!”
“설마 같이 가자는 거냐? 아군을, 동료를 버리고?”
“결국에는 아버지 혼자만 남겠다는 거잖아요! 차라리, 차라리 제가 남을래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저항했으나 마르는 김수현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끝내 강제로 해류마 위에 앉혀지자 마르는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왜 우는 거냐. 지금 너한테 굉장히 어렵고 중요한 부탁을 하는데.”
“하지만…!”
“제발, 부탁한다. 지금껏 봐와서 알겠지만, 나는 형을 내 목숨 이상으로 생각한단다.”
“저도 아버지를…!”
“어리광부리지 마라. 아비는 죽지 않고 빠져나올 자신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형이 또 한 번 죽는다면…. 그때는 나도 더는 견디지 못할 거다. 아마 미쳐서 따라 죽어버릴지도 몰라.”
“윽…. 흑….”
또 한 번이라는 말이 잠시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김수현은 진심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형을 지키면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해. 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까지 말하자 마르도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김수현은 격려라도 해주려는 듯 손을 올렸지만, 이내 사방에서 심상치 않은 기척이 와르르 일어나자, 그대로 해류마를 내리쳤다.
“가거라. 어서!”
후르르르!
주인의 마음을 읽은 해류마는 힘차게 울음을 토하더니, 화마에 휩싸인 전장을 빛살처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점이 돼 멀어지는 해류마와 그 뒤를 쫓아가는 아군을 보며 김수현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이윽고 등에서 용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김수현의 몸이 공중으로 훌쩍 솟구쳤다.
그렇게 하늘 높이 오르니 전장이 한 눈에 잡힐 듯이 작아졌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함을 인지했는지 비행 속도에 가일층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한껏 높인 시력으로 아래를 둘러보면서도, 김수현은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기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린다면 금방 쫓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한소영만 지킨다는 명목하에 나머지 대부분을 버리기에는 심히 망설여진다.
영웅 놀음을 하려는 게 아니고, 영웅이라 불리고 싶은 생각 또한 추호도 없다.
단지.
– 그럼! 그럼 우리 형은 어쩌라는 건데!
김수현의 머릿속으로, 형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필사적으로 싸우던 안현이 자꾸만 떠올랐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김수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눈에 보이는 아군은 대부분이 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지만, 딱 한 곳만은 달랐다.
그 무리는 약 삼사십 명으로 이루어진 적은 숫자였지만, 유독 겹겹이 에워싸였으면서도 격전을 치르며 끊임없이 어딘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머셔너리 클랜이었다.
보아하니 김수현이 법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어떻게든 제단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김수현의 몸이 황급히 정지했다. 이어서 허공을 한 번 거세게 박차자, 삽시간에 열화 검 수십 개가 생성되며 맑을 불꽃을 뿜는다.
“……!”
한편, 막 하급 마족 한 마리에 창을 꽂아 넣은 안현은, 갑자기 찬란한 불빛이 드리워지자 멍하니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화르르륵, 화르르륵!
“어…?”
하늘을 뒤덮으며 소낙비처럼 내려오는 열화 검과,
“형…?”
그 속에서 무섭게 쇄도해오는 김수현을 확인한 순간,
“형…! 형이다!”
눈에서 눈물을 왈칵 뽑더니 울음 섞인,
“형이다아아아! 형이 왔다아아아아!”
그러나 환희에 찬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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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히히힣. 김수현 무쌍이다!
무쌍 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