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8
00937 A Poisoned Chalice, Two. =========================================================================
“도망쳐어어어어어!”
타나토스가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한순간 표면에 흐르던 청명한 다홍빛이 눈이 아릿해질 만치 뿜어져 구름을 붉게 작열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기우는 저울추처럼 주르륵 미끄러지며 땅으로 무겁게 곤두박질친다.
스스로 ‘최고’라 일컫는 태고(太古)의 기운, 화정(火正).
최고를 자처하는 염화(炎火)의 태양이 대지와 맞부딪친 순간,
꾸웅!
또 한 번 터져 나온 빛무리가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이어서 화륜과 땅이 맞물리는 면부터 콰득콰득 일그러지며, 흡사 아이스크림 녹듯 태양의 아랫면부터 차례차례 부서진다.
꿍, 꿍, 꿍, 꿍!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대지는 태양을 한 입씩 삼킬 때마다 배가 찢어지겠다는 듯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래에는 압력을 감당치 못했는지 와르르 터져나가 버리고, 동시에 열화와 파편을 머금은 어마어마한 기운이 고리처럼 둥글게 뻗어 나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불타 녹아내리는 열풍이, 넓적한 파문을 그리며 넘실넘실 퍼져나가는 광경은 진정 장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끝은 폭발.
끝없이 파인 둥근 구멍으로부터 붉은 빛무리가 화산 폭발처럼 솟구쳤다. 전해지는 기운은 너무나 강렬해 먼 곳에 있던 이들의 시야마저 빛으로 물들여졌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좀 잠잠해졌다 싶자, 본능에 따라 몸을 웅크렸던 여인이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스리슬쩍 앞을 바라보는 찰나 얼굴이 해쓱해진다.
약 일백 미터는 될까.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폭발 반경에 포함돼 있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대지는 깡그리 부서져 깊숙하게 숨어 있던 지하까지 드러났다. 신체나 장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영혼까지 연소해 소멸당하고 말았다.
아름답던 초원이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렸다.
오직 김수현이 서 있던 곳으로 거대한 화구가 생성돼 있으며, 펑펑 치솟는 허연 연기와 붉어진 대기가 바다처럼 흐르고 있을 뿐.
여인은 급격히 치밀어 오르는 공포에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과연 알고 있을까. 이게 끝이 아니라는걸.
아니.
이제 시작이라는걸.
화르르르르르르르!
놀란 가슴을 채 추스르기도 전, 돌연 또 한 번 불이 세차게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들은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허공 곳곳에서 또다시 찬연한 화염이 이글거리며 검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게헨나조차도 가볍게 보지 못했던 김수현의 장기, 열화 검이었다.
태양에 비하면 크기는 훨씬 작지만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처음에는 수십 개에 불과했지만, 이내 기하급수로 늘어나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는다.
이윽고 능히 수천 개에 달하는 열화 검이 동시에 비스듬히 기울었다. 말갛고 어른어른한 칼끝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함을 인지한 순간, 그 아래에 있던 이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으아아아!”
“꺄아아악!”
사용자고 요정이고 가리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나자, 기껏 에워쌌던 포위망이 이제 막 무너지기 시작하는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와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대는 단 한 명에 불과했지만, 혼자서 뿜어내는 기세가 일대의 모든 존재를 짓누르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이다. 심지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마족조차도 슬금슬금 물러나는 지경이었으니.
김수현의 얼굴은 아직도 흐르는 핏물로 점철돼 있는 터라,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단지 적들이 도주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눈을 돌리다가 힘겹게나마 왼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영역 선포(Area Declared).”
투쾅!
그 순간 붉디붉은 기운이 둥글게 번지며 내려와 대지로 힘차게 내리꽂혔다. 그러자 여럿이 함께 비명을 지르며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커다란 그릇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과 흡사한 장막이, 죽어라고 도망치던 수백 명을 한꺼번에 가둬버린 것이다.
졸지에 갇혀버린 인원은 미친 듯이 장막을 두드리며 악을 썼지만, 영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김수현은 뻗었던 손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꽈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중앙으로 시뻘건 불길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장막 자체가 덜커덕 흔들리며 반투명하던 내부가 뻘겋게 물들었고, 창졸간에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중앙에 있던 이들은 끽소리도 못한 채 믹서기에 갈리듯 한 줌의 핏물로 화했지만, 외곽에 있던 이들은 한 박자 늦게 불길에 휩싸였다.
끝까지 막을 치고 문지르며 아우성치던 어느 요정은, 결국 열기를 이기지 못해 온몸의 살이 녹으며 눈을 까뒤집는다. 그야말로 지옥 불구덩이의 재현이었다.
내부가 얼마나 끔찍했으면, 간발의 차이로 장막에서 빗겨난 여인이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나마 정신이 있는 이들은 후들거리는 몸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미처 다리를 움직이기도 전에 목덜미가 인두로 지져지는 감각이 엄습했다.
아차 하며 눈을 돌리는 찰나, 갑자기 한 명이 목젖에 무언가가 꽂히더니 혀를 길게 빼며 털썩 쓰러졌다. 이어서 볼 수 있었던 건, 하늘에서 사방팔방 흩뿌려지는 열화 검의 향연이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적들은 더는 달아날 생각도 못 한 채, 섬광처럼 쏟아지는 불의 폭우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콰콰콰쾅, 콰콰콰쾅!
수백의 벌컨포가 일시에 불을 뿜으면 이럴까. 가까운 곳부터 가해지는 폭격은 모든 방향으로 무섭게 쇄도하더니, 지면마저 깨부수며 쫙 퍼졌다.
처음 태양처럼 한 지역을 날려버리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반경은 훨씬 넓다.
거기다 예전의 열화 검이 단순히 칼 한 자루에 불과했다면, 염화 능력을 등에 업은 지금은 하나하나가 포탄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핏빛 융단이 깔리는 곳마다 땅이 펄떡 일어나 요동치고, 깨져나간 조각이 도처를 휩쓸어버린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무력한 울부짖음으로 채워질 무렵.
“우욱!”
불현듯 김수현이 한 움큼의 핏물을 토했다. 입뿐만이 아니라, 눈, 코, 귀 등등 구멍이 있는 곳에서는 한 곳도 예외 없이 선혈이 샘솟는다. 꼭 악귀와 같은 형상. 세 번이나 연달아 커다란 기술을 사용하니 자연스레 몸의 붕괴가 가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적들이 한 군데 꽁꽁 뭉쳤다면 모를까, 첫 공격 이후 사방으로 개미 떼처럼 흩어졌기 때문이다. 발동한 목적이 화풀이로 마구잡이로 죽이는 게 아닌 이상, 하나하나 쫓아가 죽이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콜록!”
다시 한 번 선혈이 뿜어졌다.
기실 염화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기운을 증폭시켜주는 능력에 불과할 뿐, 몸을 치료해주지는 않는다.
말인즉 김수현의 몸은 진즉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아까 집중 사격으로 받은 타격도 무시할 수 없지만, 누적되는 충격을 못 견뎌 파괴된 게헨나의 수호 요새로 마력도 바닥을 찍었다.
그뿐일까. 체내의 장기가 미쳐 뒤틀리는 감각은 차마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괴롭다. 몸을 지탱해주는 뼈는 새카맣게 그슬려 가루로 갈리는 느낌이다. 마치 당장에라도 온몸이 폭발해 갈가리 찢겨나갈 것만 같았다.
하다못해 엘릭서 한 병, 아니 간단한 치료 주문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이토록 육신이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터.
“끄으….”
그러한 찰나, 굳건히 서 있던 몸이 기우뚱 기울기 시작한다. 한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김수현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몇 분이나 흘렀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이미 신경 쓸 여력조차 없다.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염화 능력을 발동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절대로.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
“크르르르…!”
흡사 짐승이 부르짖는 괴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절반쯤 굽혀졌던 무릎이 쭉 펴졌다. 이어서 불길에 휩싸인 날개가 날갯짓하며 몸이 사선으로 붕 떠오른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자기가 왜 공중으로 떠오르는지도 모르는 채로 양손으로 창을 움킨다. 그리고 한 번 빙그르르 돌리자, 수라마창의 끝으로 파괴적인 불줄기가 꿈틀거리며 분출됐다.
그렇게 멀리멀리 뻗어 나가던 기운이 하늘까지 찌를 즈음, 김수현도 돌연 덜컥 정지했다. 이어서 수라마창을 하늘로 힘껏 치키자, 기나긴 줄기가 낚싯대의 선처럼 거친 S자를 그리며 출렁거렸다.
다음 순간,
“끄아아아아아아아!”
김수현은 양손을 내리치는 것과 함께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땅을 쪼갤 듯이 내리쳐진 불의 채찍에 한층 가속이 붙어, 시계 속 시침이 돌아가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방을 휘몰아 쓸어버린다.
필생의 힘을 기울인 최후의 일격.
비록 단 한 번의 선회에 불과했지만, 파괴력은 가히 무시무시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한껏 숨죽이고 있던 대지가, 몰아쳐 오는 폭풍에 호응해 폭발 직전의 활화산과 같이 끓어오른다. 불줄기가 스치는 곳마다 땅으로 울퉁불퉁한 크레이터가 파이고, 땅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시끄럽게 뒤흔들린다.
그 충격에 얼떨떨하게 서 있던 에르윈의 다리가 풀려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화르르르!
그 찰나의 순간, 뜨거운 바람이 정수리를 훑고 지나쳤다.
그와 동시에 덮쳐오는 해일 같은 압력은 갑옷을 찢고 땅으로 푹 파묻히게 해, 에르윈은 잠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리 위로 혜성 꼬리처럼 이어지는 붉은 궤적과,
가까이 있던 마족 군단이 깡그리 이등분되며 몰살당하는 광경을 확인한 순간,
“……!”
에르윈은, 아니 사탄은 악마가 된 후 처음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공교롭게도 다리가 풀려 넘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명약관화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돌풍도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르윈의 입이 쩍 벌어졌다.
김수현이 강하하고 있었다. 에르윈이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내려오고 있다.
에르윈은 아래로 내뻗어진 창끝을 똑바로 바라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라보고만 있었다.
서둘러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커녕, 머릿속의 사고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으니까.
아무리 계산하고 계산해도, 저 정도의 무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심지어 도주조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잠시 후.
시커먼 창이 아래로 느릿하게 떨어진다. 에르윈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창 날이 봉긋한 젖가슴의 가운데를 찌르는 중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보다 약하기는 했지만, 가슴이 푹 뚫리는 감각과 함께 에르윈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쿵!
갑자기 복부 쪽으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치는 충격이 느껴졌다. 고통에 겨워하는 와중에도 에르윈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가슴을 찌른 수라마창은 어느새 느슨해진 손아귀에서 흐르듯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이게…. 무슨…?”
김수현이 엎어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비록 핏물로 범벅된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감긴 두 눈만큼은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오 분.
딱 오 분이었다.
삼백 초 동안 쉴 틈 없이 들끓었던 초원은,
“…….”
오 분이 지난 후,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습니다.
사실 집필 시작 시간이 평소보다 약간 늦기는 했어요.
하지만 오늘은 잠들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어제 21시 30분쯤에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저도 정말 몰랐습니다. ㅜ.ㅠ
부디 너무 노엽다 여기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세요. _(__)_
그리고 다음 회부터, 에피소드 1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전에 후기에서 한 번 말씀드렸지만, 악마와의 전쟁은 크게 총 세 번 예정돼 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이 끝났네요.
이제는 익을 대로 익은 누구 씨와도 헉헉(?)하고, 누구도 살리고, 또 누구도 나오고.
드디어 독자 분들과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