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0
00939 If You Change, One. =========================================================================
시간을 조금 돌려, 김수현이 막 둘러싸이기 시작했을 즈음.
쉴 틈 없이 북쪽으로 달리던 머셔너리 클랜은, 김수현의 말대로 서 대륙에 에워싸여 악전고투를 치르는 한 무리의 아군을 발견, 곧바로 원호에 나섰다.
하지만 중과부적이라고 해야 할까.
여덟 시간 동안 버티느라 몸이 지친 상태이기도 했지만, 일단 적의 숫자가 거의 수십 배에 달했고, 게다가 시시각각 불어나는 중이었다.
아무리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물량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고연주의 그림자 군단과 마르의 정령이 없었다면 아마 방진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터.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음에도 악착같이 고군분투하는 와중, 돌연 한창 밀고 들어오던 적의 후방이 갑자기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적이 나오던 포탈에서 갑작스레 한소영이 등장한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수십의 전투 처녀와 오백 명에 달하는 아군 사용자와 함께.
고연주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곳으로 전력을 집중했고, 덕분에 간신히 한 줄기 길을 열어 에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분노한 사브나크가 황급히 추격하려 했지만, 그조차도 한소영이 결사적으로 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머셔너리 클랜은 그때까지만 해도, 동료와 형을 구해낸 후 바로 쫓아가겠다는 김수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채 가기도 전에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왜냐면 재회한 동료 중 고연주의 등에 김유현이 업혀 있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거짓말쟁이!”
이유정은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달리면서 울었다. 아무리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는 그녀라지만 김수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안현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현재 공찬호의 어깨에 맥없이 걸쳐져 좌우로 흔들리는 중이었다.
부상을 당해서가 아니다. 거짓말을 알아차리자마자 김수현한테 돌아가려다가, 공찬호에게 불시에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해버렸기 때문이다. 애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돌아오는 상황을 우려한 김수현이 미리 부탁해놓은 것이다.
“나쁜 놈!”
결국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도망치면서 이유정은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부디 김수현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정신없이 빠져나간 결과, 날이 어두컴컴해질 무렵에야 적의 끈질긴 추격을 간신히 떨쳐낼 수 있었다.
적이 포기한 듯싶자 고연주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용자는 약 이백 명 남짓했다. 억지로 포위망을 뚫느라, 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떨어져 나간 인원이 적지 않았다. 실로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나하나 모두 감싸 안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윽…. 윽….”
마르는 왼쪽 다리를 절면서도 용케 쫓아오고 있었다. 해류마가 갑자기 소환 해제되면서 떨어져 다친 듯싶다.
그렇게 절룩거리면서 고연주가 멈춘 곳까지 오더니, 돌연 털썩 엎드려 엉엉 울어 젖혔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아이가 울 듯 처량하기 짝이 없어 주변에 있던 이들도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고연주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가, 신재룡이 조용히 치료 주문을 외우며 다가가는 걸 보고 입을 닫았다.
기실 앞일이 막연한 건 고연주도 매 한 가지였다. 물론 고연주라고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 않겠느냐마는,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김수현이 속였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십 분 알 것 같았으니.
그렇게 생각한 고연주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뺨을 쳤다. 언제 추격대가 쫓아올지 모르는 만큼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계속 늘어져 있을 수 없었으니까.
한 시라도 빨리 수색 범위를 벗어나고 지칠 대로 지친 아군을 정비하는 게 급선무였다.
*
김유현이 눈을 뜬 건 하루가 지나고 이튿날 밤중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 있었다. 김수현이 작정하고 연달아 친 것도 있지만 애초 몸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마력을 써댔으니 자연스레 정신이 노곤해진 것이다.
“으….”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던 탓인지 자연스레 침음이 흘렀다.
김유현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몽롱하고 강한 현기증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손은 자꾸만 침대 시트를 더듬고 있었다.
그때.
‘그래. 이게 제로 코드야. 그러니까 잘 지켜야 해?’
홀연 익숙한 음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
한껏 찌그러졌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밖을 돌아다니던 고연주는 가까운 천막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입구로 들어서니 김유현이 간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아주버님!”
“수으으으…! 혀어어어…!”
메마른 목에서 갈라진 소리가 새나왔다. 그러나 고연주는 어렵지 않게 수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정하세요!”
애원 섞인 목소리로 외쳤으나 김유현은 한동안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팔로 땅을 기며 허둥지둥 천막을 벗어나려고 했다.
고연주는 김유현을 억지로 붙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이미 가봐야 늦었어요. 우선은 쉬세요. 쉬셔야….”
하지만 차마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가봐야 늦었다고 말한 찰나, 김유현이 머리 돌려 무섭게 쏘아봤기 때문이다.
노려보는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한 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 이상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속상하기는 고연주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심 김유현을 이해했다. 예전 아틀란타 원정 때도 한 번 그랬지만, 눈앞의 사내는 동생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제발…. 냉정해지세요. 아직 추격을 완전히 떨친 것도 아니고, 지금 가셔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다고 수현 씨가 기뻐할 것 같아요?”
“…….”
“지금도 계속 통신을 넣는 중이에요. 다행히 연락이 닿은 아군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우선은 집결지로 가요. 다음 일은 일단 합류하고 나서 생각해요. 네?”
“…….”
그래도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었던 걸까.
끊임없이 고연주를 뿌리치려던 움직임이 우뚝 멎는다. 노려보던 눈동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더니 이글거리던 눈빛도 꺼져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던 김유현이 풀썩 주저앉는다. 그러더니 덜덜 떠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고 작고 푸른빛이 흐르는 구슬을 꺼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렇게 계속 하염없이 바라보더니 꾹 다물려 있던 입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지러진다.
고연주는 김유현을 침대로 옮겨놓을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나오는걸 선택했다.
잠시 후, 무언가 집어 던졌는지 둔탁한 소음이 울리는 것과 함께 천막은 끅끅거리는 소리로 조용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참으려고 애쓰는 듯해도 결국에는 삼키지 못해 낮은 흐느낌이 이어졌다.
자고로 여인의 눈물은 무기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내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 또한 무척 애절하기 그지없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억지로 강하게 마음 먹은 고연주도 그렁그렁해질 지경이었다.
“개 자식. 아주 돌아오기만 해봐.”
진심을 담아 뇌까린 후 고연주는 기나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려 했으나 여전히 막막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그나마 근원과 연락이 닿아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확인한 게 불행 중 다행일까.
그때였다.
“응?”
문득 흐릿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잡혔다. 목에 걸린 목걸이의 보석이 희미하게나마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아주 예전에 밤의 거리에 갔을 때 김수현이 사준 목걸이였다.
그 순간 고연주는 머리가 강하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동안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목걸이의 효능이 떠올랐다.
“아…!”
고연주는 탄성과 함께 허겁지겁 목걸이를 붙잡아 올렸다. 그리고 살짝살짝 흔들리는 보석을 유심한 눈으로 관찰했다. 블랙 다이아몬드는 예전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빛을 뿜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아….”
예전보다 빛을 잃었을 뿐 빛은 분명히 살아 있다. 보석 깊숙한 곳 아래쪽으로 어렴풋한 빛이 잇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연주는 망연히, 그러나 살짝 환희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살아 있었어…!”
*
불현듯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몸조차도.
아니. 아니다.
느껴지기는 한다.
단지 전신이 굉장히 무겁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감각이다. 흡사 누군가가 나를 억지로 세워 구속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살았나? 아니면 죽은 건가?
“…….”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염화 능력을 발동하고 땅으로 추락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무언가 이상한데.
정말로 죽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염화는 단순히 육신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영혼과 생명력까지 모조리 앗아가는 능력이다. 즉 제로 코드라면 모를까, 소원으로는 부활조차 불가능한 무(無)로 돌아간다는 소리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연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직감상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일이 이상하게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형은 어떻게 됐으려나.
잘 빠져나갔을까? 또 한소영은 그리고 클랜원들은….
“후우우우….”
갑갑한 가슴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온 찰나,
“…응?”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금 숨소리가 확실하게 들렸다.
도로 숨을 들이켜자 이번에는 몹시 습한 공기가 맡아졌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살며시 눈을 뜬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시야가 몹시 가물가물하다는 것과 굉장히 어둡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고 푸른 불빛 여러 개가 허공에 사라질 듯 말 듯한 형체로 깜빡거리고 있다. 소환의 방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 순간이었다.
“…큭!”
살짝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느닷없이 심히 비틀리는 것 같은 차가운 감촉이 양팔을 엄습한다.
그와 동시에.
“……?”
주변으로 작게 흐느끼는 신음 같은 쇳소리가 강가의 잔물결처럼 조그맣게 일었다.
============================ 작품 후기 ============================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쉬니 확실히 싱숭생숭한 감정이 좀 가시는 기분이네요.
어제는 왜 그리 잡생각이 들던지…. ^^;
그나저나 아직도 메모라이즈에 NTR을 걱정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물론 상황상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십 분 이해합니다.
또 NTR도 잘 사용하면 소설 내 장치로 훌륭하게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부분도 인정하고요.
하지만 제가 예전에 몇 번이나 약속했듯이 메모라이즈에 NTR은 나오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주인공 주변 여인들 대상으로 말입니다. 아니 왜 자꾸 말이빈다로 오타가 나죠. 다섯 번이나 고쳐 썼네. 화나게.
아무튼, 이중에는 당연히 한소영도 포함됩니다.
익다 못해 타겠다는 등 여태껏 많은 독자 분들께서 기다려주셨는데, 이제 와서 한소영은 NTR로 돌린다는 건 그분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시 확실히 말씀드리면 한소영에 관한 NTR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혹시 기대하신 분이 계시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