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3
00942 If You Change, One. =========================================================================
그 무렵, 소환의 방에서는….
“그, 그게 무슨 말이지?”
김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강한 불신의 빛으로 정면의 제단을 쏘아보자, 시선을 받은 상대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듯 낯부끄러운 빛을 잔뜩 드러내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김유현으로서는 드물게도 고함을 질렀다. 거의 절규처럼 들리는 괴성이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 고작 사람 하나 옮겨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한 번 시작된 고성은 둑 터진 강물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뭐라고? 소원으로도 안 된다? 제로 코드로도 안 된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제단으로 내밀었던 오른팔이 눈이 보일 정도로 떨리기 시작한다. 꽉 말아 쥔 손아귀에는 푸른 잔상을 흘리는 구슬 하나가 바스러질 듯이 잡혀 있었다.
“하! 그래. 어차피 제로 코드도 얻었겠다. 이제 수현이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건가?”
거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제단의 천사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사내의 눈초리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니면 그 말만은 그냥 넘길 수 없었는지.
살며시 눈을 뜬 세라프가 슬픔 가득한 눈으로 상대와 마주한다. 그리고 고요히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사용자 김수현을 이곳으로 이동시켜달라는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로 코드로…!”
“제로 코드로는 사용자 김유현의 요청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재로써는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힘들기는 니미 씨발!”
그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세라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에 김유현이 손에 쥐고 있던 제로 코드를 힘껏 던진 것이다. 게다가 어지간하면 하지 않던 험악한 욕설까지 섞었다. 이는 김유현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방증이었다.
평소라면 상상조차 못 했을 행동이었지만 세라프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레 제로 코드를 도로 굴려 보낸 후 처연한 낯으로 다시 상대를 응시한다.
도를 넘는 행동을 했음에도 사내의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세라프는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김유현의 요청을 십 분 이해하고 있었다. 단순히 혈육 관계라는 점을 떠나서, 하나의 희망만 보고 죽으라 달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혔으니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단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닐 터.
기실 이 문제는 세라프가 김수현한테도 항상 주의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이었다.
‘제로 코드는 사용자가 바라는 모든 걸 이루어주는 만능의 결정체.’
‘그러나 화정 님이나 타나토스 님 정도의 신은 마음만 먹는다면 제로 코드의 명령에도 일부나마 저항할 수 있습니다.’
‘설령 명령이 이행된다고 해도,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이르는 시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타나토스 님을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악마는 무수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 점을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말인즉 제로 코드의 명령은 인간과 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 범주에 포함할 수는 있지만, 결코 동일 선상으로 놓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특히 화정이나 타나토스 정도 되는 격 높은 신이라면 더더욱.
제로 코드로 김수현을 데려오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악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 김수현은 이미 타나토스의 조각 하나를 강제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즉 시간을 돌리든 김수현을 데려오든, 제로 코드의 명령이 실행될 기미라도 보이면 타나토스는 즉시 알아차릴 테고, 그렇게 되면 김수현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세라프가 제로 코드의 사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설령 저항을 뚫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는다손 쳐도,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대체 뭐가 만능의 힘이라는 건데…. 그까짓 것도 하나 못 해주면서….”
그때, 홀연 다리가 풀렸는지 김유현이 털썩 무릎 꿇는다.
“차라리…. 좀 더 일찍 도착했다면….”
자책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사실 일찍 도착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아니. 설혹 악마가 모종의 목적이 있었다 해도, 어쨌든 김수현을 살리지 않았다면 결과적으로 소생조차 불가능했을 터.
살아 있는 이상, 기회는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세라프였으나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것이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결국에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사내를 보며 조용히 고개 숙일 뿐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 어두운 공간에만 갇혀 있다 보니, 그리고 사지가 꽁꽁 묶여 있으니 시간 개념조차 희미해질 지경이다.
가끔 누군가가 왔다가 갔다가 하는 것 같지만, 그뿐이다. 우리는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돼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결국 생각밖에 없었다.
타나토스가 떠난 후,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계속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한소영도 그런 내 상태를 읽었는지 무리하게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일단 들었던 말 중에서 유독 신경 쓰였던 두 마디. 하나는 악마의 부탁으로 나를 살렸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만 잘 풀리면 무사히 보내주겠다는 것.
처음에는 왜 나를 살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 두 말을 연결해서 생각해보니 불현듯 짚이는 바가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타나토스의 말은 악마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뉘앙스였다. 또한, 놈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로 코드의 획득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악마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귀찮은 방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말인즉 애초 해답은 하나였다. 사탄은 나를 인질로 삼기 위해 살렸다. 내 생존과 무사 귀환을 조건으로, 제로 코드를 가지고 있는 형과 협상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에는 일종의 교환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한소영에게 들어보니 포로로 잡힌 건 우리 둘뿐만이 아닌 듯하다. 만에 하나 다른 포로 중에서 나와 형의 관계를 누설해버리면, 사탄은 분명히 해볼 만하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련의 추측을 마치자,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그냥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내가 형의 처지였다면 아마 절대로 응하지 않았겠지.
아무리 놈들이 달콤한 말로 유혹한다고 해도 본질이라는 게 있다. 악마를 믿고 놈들과 손을 잡는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같이 힘을 합쳐 천사를 쓸어버리자는 말을 괜히 단칼에 거절한 게 아니었다.
어쨌든 저쨌든 결정권은 내가 아니라 형한테 있다. 형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글쎄. 솔직히 어떻게 나올지는 나조차도 예측하기 힘들다. 부디 누군가가 적절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면 좋으련만….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느낌이다.
“후우우우….”
가슴이 갑갑해서인지 저절로 긴 한숨이 새나왔다.
‘화정.’
혹시나 싶어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나.
정신을 차린 이후, 화정은 여태껏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불렀으나 회답은 단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화정이 사라진 게 아닐까 걱정도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심장에 여전히 따뜻하면서 묵직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니까.
어쩌면 봉인 진을 해제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거나, 힘을 회복한 타나토스가 수작을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뭐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번에 내 생각을 읽고 화가 났을 수도 있겠고. 설마 정말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겨 있는 와중, 불현듯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
“방법…. 방법이….”
김유현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연신 혼잣말을 되뇄다. 왼손은 제로 코드를 꽉 쥐고, 오른손은 덜덜 떨면서도 책상을 자꾸만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후의 보루였던, 아니.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제로 코드의 명령으로 사용자 김수현을 아틀란타로 소환한다.’ 는 방법이 무산된 이상, 사실상 김수현을 무사히 데려오는 일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다시 전쟁을 치러서라도 직접 되찾아오는 수밖에는 없다.
물론 말로는 쉽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실현하는가인데, 여러모로 생각해도 딱히 뾰족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김유현은 현재 아군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젠장….”
수십 개의 가정이 생각나기가 무섭게 수면으로 가라앉는다.
악마도 문제고 타나토스도 문제다. 특히 사탄은 욕 나올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겼다. 어지간하면 그냥 포기할 법도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솟아날 구멍을 찾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쯤 되면 일 회차 때 악마를 상대로 승리한 사용자들에게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후우…. 후우….”
일 초도 쉬지 않고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시키면서도 김유현은 본능에 따라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뻥 터질 만치로 갑갑했으니까.
그때.
“…응?”
돌연히 푸른 빛무리가 김유현의 얼굴을 간헐적으로 비췄다. 책상 한쪽에 놓아둔 통신 구슬이 빛을 깜빡거리는 중이었다. 멍하니 응시하던 김유현은 아차 하며 서둘러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구슬이 작은 영상을 비추며 누군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여왕?”
(네. 아주버님.)
곧바로 알아본 김유현이 입을 열자, 고연주도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데 왜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라, 김유현은 무언가 사건이 터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처리해주실 일이 하나 생겼어요.)
“아니, 아닙니다. 죄송하기는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입니까?”
안 그래도 뒷일은 나 몰라라 하고 맡겨둔 터라, 김유현은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아니요.)
고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오실 필요는 없어요. 방금 그쪽으로 보냈으니까요.)
“예? 보냈다고요?”
로브를 걸치던 김유현이 멈칫하며 반문하자, 고연주가 돌연 살그머니 눈썹을 치켰다.
(악마 쪽에서 전령이 찾아왔어요.)
그러자.
“…전령?”
김유현의 두 눈도 와짝 이지러졌다.
한편, 같은 시각.
머셔너리 캐슬에서는 임한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계단으로 오르는 중이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성으로 돌아왔건만, 안색은 전혀 밝지 못하다. 하기야 현 상황에서 누가 방긋방긋 웃고 다니겠느냐마는….
이윽고 복도로 들어간 임한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안을 살폈다. 조심조심 걸어서 침대 옆에 배치된 의자에 앉자, 시트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안솔이 눈에 밟혔다. 두 눈은 꼭 감겨 있지만, 무언가 힘에 겨운지 씩씩 숨을 내쉬고 이마에 땀도 송골송골 맺혀 있다.
물론 지금이야 치료도 마쳤고 외관상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있는 때로 치료 주문을 쏟아 부었고, 엘릭서도 무려 두 병이나 사용했다. 이쯤 되면 조금이나마 반응이 있을 법도 한데, 안솔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거기다 방금 신재룡과 교대하면서 처음과 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온 터였다.
‘어쩌면 뇌나 영혼에 타격을 받은 걸지도….’
“내, 내가 무슨 생각을?”
임한나는 화들짝 놀라더니 스스로 관자놀이를 탁탁 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깨끗한 천을 집어 땀 맺힌 이마를 닦아주기 시작한다.
“후유…. 솔아. 언니가 미안해? 혼자서 이상한 생각을 해버렸네…. 주책 맞게시리.”
듣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면서도, 임한나는 처연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우리 솔이…. 얼른 털고 일어날 거지? 그렇지? 응?”
그리고 걱정과 애정이 뒤섞인 얼굴로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엄마야아!”
찰나의 순간, 임한나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 에?”
기함한 와중에도, 황망한 두 눈은 멍하니 침대를 올려다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감겨 있던 두 눈이, 느닷없이 무섭게 부릅떠졌다. 이마에 입이라도 맞출 생각에 얼굴을 가까이했는데, 바로 코앞에서 안솔의 눈이 갑작스럽게 떠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잠시 후.
“소, 솔아…?”
안솔은 느릿하게,
“…….”
그러나 은연중 심상찮은 기세를 흘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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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