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4
00943 If You Change, One. =========================================================================
‘전령이 왔다고?’
통신을 종료한 김유현의 얼굴은 반쯤 걸쳤던 로브를 도로 벗기까지 내내 찌푸려져 있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듣기는 했으나 갑작스럽다는 감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 쪽에서 왜 나한테 전령을…. 아!’
그때였다. 김유현이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낸 찰나, 적막한 공간이 돌연히 어수선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창문 너머로 갑자기 시끄러운 소란이 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무어라 무섭게 소리치거나 물러나라고 고함치는 등,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지르는 소리가 엉망으로 뒤섞여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란이 차츰차츰 잦아들며 문밖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정중한 노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하더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무려 열댓 명에게 무기가 겨누어진 누군가가 방 안으로 느긋하게 들어온다.
“허허….”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노인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낌 없이 웃더니 길게 늘어트린 흰 수염을 살며시 쓰다듬는다. 그리고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뇌제.”
“너는…?”
“아니면…. 사용자 김수현의 친형인 김유현이라고 해야 할까요?”
“……!”
*
잠깐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방 안은 곧 다시 조용해졌다. 김유현이 같이 들어온 사용자 무리를 모두 물리쳤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왔던 사내가 위험할 수 있다고 한사코 거절했으나, 결국에는 한 걸음 물러나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겠다고 했다. 김유현도 그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그렇게 일련의 사태가 진정된 후에야 김유현과 백발의 노인은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제 소개부터 하지요. 저는 남 대륙에서 과분하게나마 선지자라고 불리는 멜리너스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는 노인을 보고 김유현이 받은 첫인상은 현자라는 느낌이었다. 고고하다기보다는 지혜롭고 사람 좋은 노야 같다고 해야 하나. 단지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그럴 뿐, 속내는 모종의 꿍꿍이를 품은 늙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물론 실체는, 사탄을 모시는 악마 십사 군주 중 하나인 벨리알이라고 합니다만….”
그 순간 김유현의 두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어림짐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아무 접점도 없는 남 대륙보다는 차라리 악마가 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게 말이 되니까.
“배짱 한 번 좋군. 홀몸으로 적진에 뛰어들 생각까지 다하고 말이지.”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된 만큼 당연히 고운 말은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 들어갈 수만 있다면 몸 성히 보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보다 오히려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멜리너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이야기하려고 찾아갔는데 보자마자 공격당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경계심을 누그러트릴 수 있는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겸사겸사 저희 쪽에서 성의를 보이기로 했습니다.”
“성의?”
“예. 저희 쪽에서 억류하고 있던 포로 중 일부를 함께 데려왔지요. 그러니까 북 대륙 사용자 말입니다. 허허.”
“…….”
약간 호의까지 느껴지는 음성에 김유현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머릿속은 무섭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일부라고 했으니 현재 억류 중인 포로가 적지 않다는 뜻…. 그렇다면 이미 웬만한 건 파악하고 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자신과 동생의 관계에 성실히 답해준 이들을 우선해서 데리고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스쳤지만, 뭐가 됐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멜리너스는 상대의 안색이 딱히 변한 것 같지 않자 짧은 한숨을 흘렸다. 하지만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 좋습니다. 피차 좋은 감정은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군요.”
“다행이야. 그나마 눈치는 빨라서.”
“그럼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죠. 사용자 김수현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의식도 회복했지요.”
“그래서.”
김유현 스스로 들어도 놀랍도록 서늘한 음성이었다. 마치 그래서 어쩌라는 듯한 어조라고 할까.
멜리너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넉넉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음….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그래서? 내 동생이 살아 있으니 제로 코드와 교환하자?”
“예?”
“그렇게 넘기면 서로 힘을 합쳐 천사라도 쓸어버리자는 건가? 아. 이건 너무 나갔나?”
이번에는 멜리너스가 입을 닫을 차례였다.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한참을 수염만 쓸어내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저희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씀이신지요?”
“둘 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대를 비웃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기실 김유현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왕 내친 김이라 대놓고 배짱을 부렸다고 해야 하나. 말인즉 협상에 동생을 걸고넘어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었다.
“허허. 그렇군요. 이것 참….”
그러자 곤란하다는 표정도 잠시.
멜리너스가 희미하게 웃는다.
“그렇다면 부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뭐?”
그렇게 말한 멜리너스는 양손을 깍지 끼며 살그머니 몸을 숙였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하기라도 할 것처럼.
반사적으로 마력을 모았던 김유현은 상대가 그 이상의 행동은 보이지 않자 스리슬쩍 손을 내렸다.
“제가 뇌제께서 흥미가 동할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려도 되겠습니까?”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런가요? 하지만 왜 천사가 홀 플레인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
이 말만큼은 김유현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품어왔던 풀리지 않는 의문 중 가장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한 번쯤 들어볼 가치는 있었다.
“뇌까려봐.”
마지못해 허락하자 멜리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뭐…. 굉장히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딱히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까요?”
“할 말만 해.”
“그러죠. 무섭기 때문입니다.”
“무섭기 때문이라고?”
김유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멜리너스를 응시했다. 알 듯 말 듯하기는 하지만 무섭다는 말은 너무 광범위했다.
“천사는 너희가 무서워서 나오지 않는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초점이 약간 어긋났습니다. 천사는 저희가 두렵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강림함으로써 손실될 전력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천사는 너희와 싸워서 전력이 떨어질 걸 걱정하고 있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혹시 천사 진영이 저희 악마와의 전투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요?”
김유현은 복잡한 와중에도 가까스로 끄덕거렸다. 예전에 김수현이 처음 비밀을 털어놨을 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얘기가 쉬워지겠군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면 현재 이 홀 플레인에 개입하고 있는 천사는 천계의 마지막 전력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마지막 전력?”
“그렇습니다. 즉 최후의 보루라고 할까요. 저희야 사실 여기서 깡그리 소멸해도 전세가 뒤바뀔만한 영향이 있는 건 아닙니다. 뼈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동안 지속해서 승전을 거듭해왔으니 한 번쯤 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아, 물론 제로 코드는 논외로 치고요.”
“그럼….”
“하지만 천사는 다릅니다. 아마 천사들이 홀 플레인에 나와 전멸이라도 당한다면, 그날로 천계의 전력은 텅 비어버린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즉 어느 쪽이든 힘들어지기는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그래서 기를 쓰고 제로 코드를 지키려 하면서 어떻게든 나오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당신들이 이 세상에 소환된 정확한 배경입니다.”
“…….”
“그럼 잠시 화제를 바꿔서, 제가 중요한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유현은 간신히 처음 보였던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정보를 알려줌으로써 멜리너스가 뭘 의도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뻔해. 어쨌든 결론은 서로 손을 잡고 천사를 몰아내자는 말이겠지.’
사실 확인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은 혼란을 가라앉히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뇌제가 만약 제로 코드를 양보해주신다면 이후로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글쎄. 달콤한 말로 유혹해 얻어낸 다음에는 아마 제로 코드를 사용해 천사와 인간을 쓸어버리지 않을까?”
그때.
“푸.”
김유현이 약간 빈정거리듯 말하자마자 멜리너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말씀이 너무 뜬금없어서…. 아니. 솔직히 좀 웃겼습니다. 생각해보시죠. 저희가 그 귀한 걸 왜 한낱 인간한테 사용합니까? 그럼 천계는 어쩌고요?”
황급히 손을 흔들었으나 킥킥거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흘렀다.
“흠흠. 실수했군요. 부디 양해를. 아무튼, 간단합니다. 천사는 바로 천계로 철수할 것이고 저희 악마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로 코드는 천계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것이 저희 손에 들어왔는데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쨌든 자기들의 고향을 버릴 수는 없으니 싫어도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요. 즉 홀 플레인에는 더 이상 외부 세력의 개입이 없어지며 결과적으로 인간만이 남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제로 코드를 넘겨달라는 말 아닌가?”
“결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 나보고 너희를 믿으라는 건가? 이 말만 듣고?”
그때였다.
“하기야 믿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살짝 몸을 기울였던 멜리너스가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릅니다. 수천 년, 아니. 어쩌면 수만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담담히 말하며 깍지 꼈던 손도 풀고 팔을 서서히 아래로 내린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 서로 이렇게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 이런 말들은 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그리고 탁자에 이마가 닿을 만치 엄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부탁 드리겠습니다. 제로 코드를 저희에게 양보해주십시오.”
설마 악마가 정면으로 굽힐 거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던 김유현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멜리너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물론, 불안해하시는 마음은 사탄께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믿게 해드리는 것이 도리겠지요.”
“이에, 사탄께서는 총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우선 모든 피조물을 무로 돌리겠습니다. 마족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대 악마와 악마 십사 군주 중, 대계에 제로 코드를 전달할 하나만 제외하고 전원 인질이 될 용의가 있습니다.”
“아울러 천사가 신경 쓰이신다면 그것 또한 저희가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절 도움은 받지 않을 것이며,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동생분을 포함한 포로 전원의 무사 귀환 또한 당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래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조건을 설정해서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너무 무리한 의견만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소리였다.
김수현 포함 인질 전원의 해방은 물론,
마족을 없애고,
스스로 인질이 되겠으며,
원한다면 천사도 처리해주겠다.
게다가 이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조건을 제시하란다.
김유현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 정도로 악마의 조건은 몹시 파격적이었다.
더 굽히려야 굽힐 것도 없는 만큼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고 양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