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5
00944 If You Change, One. =========================================================================
(이번 회는 NTR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성적인 내용이 직접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께서는 꼭 건너뛰어 주시기 바랍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렇잖은가.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이래 봤자 겨우 둘인데, 누구의 눈초리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몰래 옆을 흘기니 아니나 다를까. 한소영이 사슬을 틀어 몸을 꼰 채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
계속 흘깃거리고 있으니 홀연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은은한 푸른빛이 드리우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성숙한 여인이 사슬에 묶여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왜인지 적나라하다 생각될 정도로 야릇하게 느껴졌다.
“머셔너리 로드?”
그때 돌연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아, 죄송합니다.”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과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런데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한심하다. 아마 한소영도 어이가 없었겠지.
“왜 사과하시는 거예요?”
“에…. 예?”
어. 혹시 초감각이 발동되지 않은 건가? 어쩌면 나를 보고 있던 게 아니었거나.
“저를 보고 야한 상상이라도 하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 모를 리가 없지. 부끄러워 죽겠네.
무안한 기분을 이기지 못해 머리를 푹 숙이자, 가볍게 웃는 소리가 흘렀다.
한소영이…. 웃었다?
정신 줄을 놓으신 건가? 아니면 어떤 이유로?
머리를 들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머셔너리 로드.”
그녀가 다시 나를 부른다.
좀 전보다 훨씬 가라앉은 음성이라 조심스레 눈을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눈이 슬슬 어둠에 적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렴풋하던 주변이 이제 꽤 또렷하게 보이고 있으니. 한소영은 약간 처연해 보이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 예전에 저와 하신 약속 기억하세요?”
“약속이요?”
“네. 이번 일이 끝나면 모두 말씀해주신다 하셨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다.
아니. 한소영은 내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궁금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머셔너리 로드는…. 왜 저한테 잘해주시는 건가요?’
아마 강철 산맥 때부터.
하기야 한소영 정도의 사용자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마 가슴 한 켠에 의구심만 품고 있다가, 법역으로 들어가면서 확신했으리라. 고연주와의 대화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테고.
“그게…. 그러니까 아직 일이 끝났다고 보기는….”
“…장난하세요?”
무, 무서워. 갑자기 저러니까 너무 차갑잖아.
“아…. 음….”
말할까, 말까. 심히 망설여지는구나.
사실 이제 와서 말해도 별 상관없기는 하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한데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꼭 듣고 싶습니까?”
“네. 반드시 들어야겠어요.”
한소영치고는 드물게도 단호한 표현이었다.
“제가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요? 정녕 억지로라도?”
반 장난으로 어깃장을 놓자 이번에는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네.”
한소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냐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듣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띄엄띄엄 이어지는 음성에 돌연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서라도,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망설이는 나보다 한소영이 훨씬 절실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듣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이쯤 되면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단지….
“좋습니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주시죠.”
“?”
“듣고 나서 절대 화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싫어요.”
한소영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했다.
“들어보고 화낼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당연히 화낼 거예요. 그러니 그런 약속은 싫어요.”
아주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심보구나.
…뭐, 좋다. 화를 내든 욕을 먹든 이제 털어놓을 때가 된 것 같다. 오히려 늦은 감도 없잖아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생각한 나는 힘껏 숨을 들이켜며 말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
불현듯 커다란 소음이 공간을 울렸다.
막 입을 열던 김수현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한소영도 깜짝 놀라 눈을 돌렸다.
“흐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입구 쪽에서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약간 낮고 어둡지만 요염한 여인의 음성이었다.
이윽고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던 김수현의 두 눈이 한껏 치떠졌다가, 곧장 찡그려졌다. 전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리리스…!”
“어머?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차리네? 그 정도로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야?”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 형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등 뒤로 커다란 박쥐 날개가 활짝 펼쳐졌고,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지나 발목까지 닿은 검디검은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왜 온 거지?”
“글쎄? 왜 왔을까?”
김수현의 목소리는 듣는 이가 한기를 느낄 정도로 서리가 잔뜩 껴 있었지만, 리리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살살 눈웃음을 친다.
“왜 왔다고 생각해? 호호.”
약간 흐릿한 기마저 감도는 살짝 젖은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져 상대를 응시한다. 김수현도 증오에 찬 눈으로 마주 바라봤다.
악마라면 누구든지 막론하고 싫어하지만, 그중에서도 리리스는 특별하고 또 특별하다. 거의 극도로 혐오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왜냐면 일 회차 때 형의 죽음이나 한소영이 그렇게 된 게, 전부 리리스와 벨페고르가 직접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 참. 눈 좀 봐. 내가 그렇게 밉니?”
리리스는 가늘고 긴 검지를 뻗어 사내의 턱을 살그머니 받쳤다. 김수현은 거칠게 몸부림쳐 떨쳐내려 했지만, 외려 리리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만 진해졌다. 오래간만에 매우 마음에 드는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이.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너한테 볼 일은 없으니까.”
“후후. 좋아. 계속 그렇게 뻣뻣하게 있어달라고. 그래야 길들이는 맛이 있지.”
“뭐, 뭐?”
“그리고 입 좀 조심하는 게 좋을걸? 지금 네 처지가 어떻다고 생각하는 거야?”
김수현이 반문하자, 리리스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흥얼거렸다.
“조용히만 있으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들었는데.”
“아. 사탄이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딱히 명령받을 입장은 아니거든. 또 우리가 할 일은 끝나서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터라….”
그리고 은연중에 말을 흐리더니,
“그전까지 약간 괴롭히는 정도는 괜찮잖아?”
문득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김수현의 두 발목에 묶여 있던 사슬이 순식간에 느슨해졌고, 이내 차르르르 소리 내며 단숨에 풀려나갔다.
부지불식간에 다리가 자유로워지자 김수현은 순간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앞을 보자마자 왜 사슬을 풀어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리리스는 어느새 뱀의 혀를 연상케 하는 빨간 설육을 내밀어, 핏물을 머금은 듯한 관능적인 입술을 살짝 핥고 있었다. 게다가 한 손으로는 연한 회색빛이 흐르는 이국적인 살결을 슬쩍슬쩍 쓰다듬고, 둔부는 사내의 애간장을 태우듯 농염하게 실룩거린다.
밤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증명이라도 하기라도 하듯,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지는 퇴폐적인 색기는 가히 폭발적이라 봐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대놓고 유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김수현만큼은 예외였다. 흥분된다기보다는, 도리어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만큼 역겨움을 느끼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일 회차 때 리리스를 억지로 범한 적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복수심에서 발로한 행동에 불과했다. 더구나 한소영이 보고 있는 앞에서 강제로 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꺼져라. 너 따위랑 할 생각은 없으니까.”
“후후.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는 해달라고 애걸하는 게 아니야. 응?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다고 했잖아?”
김수현이 눈앞에서 으르렁거렸으나 리리스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 쳤다. 전장에서 봤을 때는 무서웠지만, 이제는 잡힌 신세에 불과하니까.
“너무 그렇게 죽일 것처럼 쳐다보지 마. 그럴수록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지잖니.”
“뭐라고?”
“으응? 말 안 했나? 내 취미가 그거거든. 사내든 여성이든,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놈들 잡아다가 굴복시키는 거. 그래야만 직성이 풀려.”
“큭!”
“아, 정말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한낱 인간 주제에 강한 척, 고고한 척! 하지만 결국 분수를 깨닫고, 스스로 무릎 꿇으면서 복종할 때, 그때의 쾌감이란! 아아, 상상만 해도 짜릿해!”
“미친년!”
벌써 황홀경에 빠져 몸을 부르르 떠는 꼬락서니를 보며 김수현이 악에 받쳐 외쳤다. 그러나 리리스는 그 반항조차 귀엽다는 듯, 악 다문 입에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맞췄다. 찰나의 순간, 얼떨결에 키스를 허용한 김수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퉤!”
“윽?”
힘차게 뱉어진 침이 리리스의 얼굴에 탁 들러붙는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
이건 마냥 반항으로 넘기기 어려웠던 걸까. 우뚝 행동을 멈춘 리리스가 망연히 뺨을 쓸더니 헛웃음을 짓는다.
“오, 이런…. 그래…. 끝내 이렇게 나오시겠다?”
나른하던 표정이 삽시간에 표독해졌다. 어지간하면 웃으면서 넘기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존심이 크게 상한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한참 동안 김수현을 노려보던 리리스의 입가에 돌연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한소영을 흘끗 쳐다보더니 빈정대듯 말했다.
“나는 다 들었지. 너희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그 순간, 네가 뭘 어쩔 거냐는 듯이 쳐다보던 김수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좋아, 좋다고. 사탄의 말도 있으니 너는 놔둘게. 그런데 이거 알아? 너는 웬만하면 건들지 말라고 했지만, 쟤는 아니거든?”
이어지는 말을 듣자마자 이가 바스러지듯이 갈리는 소리가 새나왔다. 리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킥. 어때? 이제 처지를 알겠어? 아니, 아직인가? 저 여인이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돌려져서, 정액 범벅인 채로 헤 웃고 있어야 정신 좀 차리려나?”
“너…!”
물론 협박용으로 꺼냈을 뿐, 리리스는 아직 전혀 그럴 마음까지는 없었다.
“흥. 그러게 그나마 대우해줄 때 못 이긴 척 받아들이지 그랬어? 그럼 너도 좋고 나도 즐길 수 있잖아. 이 멍청한 자식아.”
“리리스!”
그렇지만 일단 기를 죽여놓을 필요가 있기에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척을 했다.
“그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지금 당장 불러올 테니까. 아마 눈이 벌게져서 달려올 놈들이 한둘이 아닐걸?”
그 순간이었다.
쾅, 쾅, 쾅, 쾅!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연달아 터지고,
철그렁, 철그렁!
사슬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이 왕왕 울렸다.
“리리스으으으으으!”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이럴까.
화들짝 뒤를 돌아본 리리스는 속으로 몹시 기함했다. 김수현이 이글거리다 못해 활활 타는 눈동자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당장에라도 사슬을 끊고 나와 씹어먹기라도 할 것처럼.
‘뭐, 뭐야?’
거기다 살 떨릴만한 살기까지 전해지자 리리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수현 처지에서는 당연한 분노이자 폭발이었다.
한소영이 ‘또’ 당한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일 회차에 가장 커다랬던 트라우마 중 하나요, 평소에 떠올리는 것조차 자제했던 기억이다. 물론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김수현의 역린(逆鱗) 중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리리스는 느닷없이 떨리기 시작하는 숨을 진정시키며 냉정해지려 무진 애를 썼다. 하기야 양팔의 사슬은 물론, 사지도 구속 장치로 도배돼 있고 타나토스의 조각도 박혀 있는데, 끊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간신히, 억지로나마 가슴을 가라앉힌 리리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네가 굳이 거부하겠다면 그러겠다는 소리야. 네가 얌전히 내 기대에 응해주겠다면 저년은 곱게 놔두겠어.”
그러는 동안 김수현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사슬에 늘어진 채, 숨만 거칠게 몰아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리리스는 여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일말의 자신감이 생겼다. 김수현이 저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강이나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는데 정답이었어.’
그렇게 생각한 리리스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나는 너 같은 놈들을 길들일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낀다고. 그러게 적당히 까불지 그랬어?”
“크으으으…!”
“용쓰기는. …하지만 말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너도 꽤 즐거울 거라니까? 내 말만 얌전히 듣는다면, 네가 여태껏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을 쾌락을 약속하겠어. 정말로.”
“후욱…. 후욱….”
잠시 후, 리리스의 양손이 둔부를 은근히 스쳤다. 그러자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검은 실루엣 같은 것이 툭 떨어지더니, 가늘면서 탄력적인 허벅지나 육감적인 엉덩이, 그리고 털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음부 등이 훤히 노출됐다.
이윽고 실룩거리며 걸어간 리리스는 김수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잠깐 움찔하는 기색은 느껴졌지만, 그뿐. 부르르 떨리는 감촉을 제외하면 저항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리리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호호호호. 좋아. 착해, 아주 착해. 기대해도 좋아. 내가 괜히 대 탕녀, 그리고 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줄 알아? 대계에서도 나랑 한 번 자보고 싶어서 무릎 꿇는 놈이 천지야, 천지. 오히려 영광으로 알라고.”
리리스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웃다가,
“그러니까.”
갑자기 정색했다.
그와 동시에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을 주어 김수현을 주저앉힌 후, 분노로 일그러진 인중 앞으로 자신의 음부를 살짝 들이밀었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빨아.”
============================ 작품 후기 ============================
김수현 : 세라프의 잔소리를 감수하고 정(精)의 반지를 샀던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
원래 이번 에피소드 소제목은 역관광이라고 하려다가, 그건 너무 적나라하다는 생각에…. ^^;
7월 27일(월요일)은 하루 쉽니다.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머리와 몸 좀 쉬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럼 7월 28일(화요일)에 뵙겠습니다.
독자님들 모두 편안하게 한 주 마무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