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6
00945 If You Change, One. =========================================================================
굴욕적인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못 들었다는 것처럼 한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밤의 여왕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리리스는 여태껏 무수한 상대와 잠자리를 가져왔으며, 그런 만큼 눈앞의 사내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단순히 무력 여부를 떠나서, 김수현이라는 인간은 확실히 강하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악마에게 굉장히 깊은 원한과 증오를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뻣뻣하다면 온갖 수를 동원해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해도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그래서 리리스는 한소영을 걸고넘어졌다. 아무리 개인이 강인하고 확고하다손 쳐도, 결국에는 본인 한정일 뿐이니까.
걸고넘어지는 대상이 소중할수록 약점은 더더욱 확실해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소영은 김수현의 최대 취약점이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신념을 세울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을 접고서라도 소중한 이를 지킬 것인가.
해답은 곧 나왔다.
“으응…!”
문득, 음문을 살짝 훑어 올리는 메마른 혀의 감촉에 나직한 비음이 새나왔다. 결국, 음부에 얼굴을 묻은 김수현을 확인한 리리스는 순식간에 차오르는 격정과 환희에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마침내 해냈다.
“후…. 후후…. 아하하하!”
리리스는 무언가 참을 수 없는 없다는 기분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비록 기교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거슬리기 짝이 없는 혀 놀림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이 바로 옆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보고 있다는 상황 또한 흔히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현재에 이르러 육체보다 정신적인 쾌락을 갈구하는 리리스로서는 호흡이 급격히 거칠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계속 이렇게만 해…. 그럼 약속한 대로 네 여인은 털끝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호호호호!”
나긋나긋 뻗어지는 리리스의 양손이 김수현의 머리를 살며시 부여잡았다. 그리고 지그시 짓누르며 이리저리 문지르자 계곡에 전해지는 감각도 한층 강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내며 마음껏 커닐링구스를 음미하던 리리스는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 이상하네…? 이렇게 빠르게 흥분된 적이 없는데…?”
온몸이 짜릿짜릿하고 아랫배가 근질근질하다. 심지어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실제로 그 억세던 김수현이 굴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대에서는 무서울 게 없다는 밤의 여왕도 모르고 있는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관계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김수현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말간 빛을 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리리스가 강렬한 색기를 뿜어 상대의 욕정을 가일층 부채질할수록 반지의 빛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이 반지의 이름이 정(精)의 반지라는 것과 어떤 효능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 바로 리리스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 또 누군가에게는 쾌락의 시간이 흐른 후, 리리스는 긴 한숨을 흘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우…. 좋아…. 이제 그만.”
사내의 침과 질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이 뒤섞여 계곡 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하반신은 홍수까지는 아니었으나 가랑이가 번들번들할 정도로 흥건해진 상태였다.
리리스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김수현의 정수리를 부드러이 쓸다가, 이윽고 차디찬 바닥에 느긋하게 드러누웠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자, 힘없이 주저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김수현이 보였다. 그 망연한 모습을 보니, 그때까지 가슴 한 켠에 다소 남아 있던 ‘무언가 좀 이상하다.’ 는 의심마저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아니, 리리스는 애초 이 상황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리리스는 흥분에 겨운 비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다가, 어느 순간 가랑이를 양옆으로 살그머니 젖혔다. 이어서 두 손을 움직여 음부마저도 스스로 활짝 벌리자, 꼭꼭 숨겨져 있던 발그스름한 속살이 흡사 과시하기라도 하듯 화려하게 자신을 노출한다. 동시에 안쪽에 투명한 액체가 왈칵 흘러나와, 물씬 풍겨오는 악마의 향기는 가히 정신이 아찔해지리만치 적나라한 내음이었다.
정작 김수현은 벌레 보듯 극도로 혐오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킥. 뭐해? 애도 아니고, 하나하나 말해줘야 알아?”
리리스가 키득거리자, 이가 바스러지듯이 갈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창녀보다 못한 쓰레기 년.”
“그러는 너는 곧 창녀한테 허리를 흔들게 될 개새끼가 되겠지.”
구변 좋게 받아친 리리스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여간 좀 즐기려고 하니까 기분 잡치게 하네. 바지 벗어. 박아.”
“…….”
“참고로 이게 마지막 경고니까 알아서 해. 나한테 더 이상의 인내심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그렇게 말한 리리스는 유혹하는 몸짓을 멈추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스탄텔…. 로우…. 로드….”
“부탁…. 드립니다…. 눈을….”
치 떨리는 음성과 함께 사슬이 약하게나마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든 고요를 가르며, 마침내 꽃잎으로 뜨거운 기둥의 끝이 맞닿는다. 입구에 걸쳐진 육중한 귀두의 감촉을 느끼며 리리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는 채.
잠시 후.
김수현의 페니스는 그 어떤 예고와 전조 없이 부드러운 살 구멍을 단숨에, 그리고 끝까지 관통해버렸다.
다음 순간,
“어ㅁ…!”
꼭 감겨 있던 두 눈이 불현듯 찢어질 듯 커다랗게 떠지더니, 리리스의 전신이 빳빳하게 굳으며 경악성이 터졌다.
*
방 안에서는 달빛 한 줄기만이 희미하게 새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선 이효을은 문고리는 돌리려던 손을 멈추고, 스리슬쩍 안을 들여다봤다.
안은 어두웠다. 오직 창문으로 들어오는 월광만이 방을 어렴풋하게나마 밝히고 있었고, 정면 방향의 책상에는 시커먼 그림자만이 쓸쓸하게 드리워져 있다.
이효을은 반쯤 돌렸던 문고리를 완전히 돌리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왜 불도 안 켜고 있느냐고 말하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는다.
불청객이 떠난 적막한 방에는 독한 술 냄새가 은근하게 흐르고 있다. 심지어 책상에는 곳곳에 비벼 끈 흔적과 끝까지 탄 연초도 서너 가치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평소 술은 몰라도, 연초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색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너….”
그러나 이효을은 간신히 말을 삼켰다. 그저 가만히 흘깃거리다가, 빈 의자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조용히 머리 숙이고 있는 김유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착 가라앉은 얼굴빛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다. 이효을이 기척을 냈음에도, 오직 고요히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가끔, 왼손에 쥔 울퉁불퉁한 돌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할 뿐. 그것을 발견한 이효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메모리아 스톤이었다.
‘저게….’
연락을 받고 찾아오면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악마 쪽에서 결코 무시 못 할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멜리너스는 떠나면서 메모리아 스톤을 두고 갔다.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이것으로 워프 게이트를 활성화하면 법역이 있었던 곳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된다. 말인즉 김유현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동생을 데려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제로 코드라는 걸 넘긴다는 전제하에.
그때, 갑자기 눈을 뜬 김유현이 천천히 턱을 젖혔다. 심원하게 침잠한 흑색 눈동자가 책상을 빤히 응시한다.
이윽고 양손에 쥐고 있던 제로 코드와 메모리아 스톤을 책상에 함께 올려놓는 것과,
“효을아.”
잔뜩 쉰 목소리로 여인을 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김유현은 여전히 이효을을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말이 들려오지 않자, 질문을 바꿔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생존자…. 그렇게 많지는 않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서 이효을은 사내가 원하는 답을 직감했다. 순간적으로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응.”
긍정하는 순간 김유현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효을은 이를 악물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건만, 그나마 현실은 인식하고 있는 듯했으니.
어쨌든 이어지는 말이 상대에게 사형 선고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왜냐면 김유현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일이 차 강철 산맥 원정 때도, 서 대륙과 부랑자 연합군과 전쟁을 치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나도 잘 모르겠네. 얼마나 걸릴지.”
“…그래?”
“그래. 그리고…. 그 조건들이 사실이라면 나는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특히 우리가 조건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을 굉장히 유리해. 이건 저쪽에서 사실상 패배를 시인한 거나 마찬가지 아냐? 그러니까 어깨 좀 펴.”
“…….”
이효을로서는 최대한 순화한 말이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기실 현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요,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김유현은 잠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천천히, 느릿하게 얼굴을 감싸더니 흐느낀다고 생각될 정도의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이효을은 사내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방금 한 말을 후회하지 않았다.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온 그녀였으니.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방에는 다시금 고요가 찾아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장 벗어나고 싶을 정도의 불편한 침묵이 한없이 이어지는 와중, 돌연 복도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음은 문 앞에 이르러 뚝 멎었으나, 이내 방문이 쾅 젖히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그 기세는 자못 무시무시해 이효을은 물론, 석화하던 김유현도 약간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매섭게 눈을 치뜬 안솔이 씩씩거리며 김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은…?”
“왜 가만히 있어요?”
이효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안솔은 다짜고짜 책상에 앉은 사내를 몰아붙였다. 김유현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짓자, 안솔은 낯을 와짝 일그러뜨리더니 성큼성큼 다가가며 으르렁거렸다.
“왜 가만히 있느냐고요. 오라버니 안 구하실 거예요? 친형 맞아요?”
“자, 잠시만요.”
이효을이 벌떡 일어났지만, 안솔은 애초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휙 꺼내 던지자, 책상에 둔탁한 소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하나는 가득 차 있는 카오스 미믹이요, 하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검이었다.
“우리가 이겨요. 아니, 이기게 해줄게요. 그러니까 빨리…!”
“사용자 안솔!”
김유현이 얼떨떨한 기색으로 두 물건을 보는 동안, 이효을은 제 말만 하는 사제의 어깨를 세게 잡아챘다. 그때였다.
상대가 귀찮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는 찰나,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던 노기가 쏙 들어가버렸다. 안솔의 전신에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왜요?”
“…아니, 일단 진정해요. 사용자 안솔의 마음은 나도 이해해요. 클랜 로드가 붙잡혀 있는데 당연히 한 시라도 빨리 구하고 싶겠죠. 그건 우리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래서. 고작 한다는 게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겁니까? 수현이 절대로 믿지 않았던 그 악마 놈들과.”
“네…? 그, 그걸 어떻게?”
이효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직 자세한 조건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와 말투도 달라졌으나, 그것까지는 미처 잡아내지 못했다.
안솔은 한동안 이효을을 쏘아보다가, 다시 앞으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우습네요. 만약 오라버니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아마….”
그 순간이었다.
쾅!
갑자기 책상을 세게 치는 소리가 안솔의 말을 날카롭게 끊었다.
깜짝 놀란 두 여인이 정면을 바라보자, 눈을 크게 뜬 김유현이 입을 쩍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왜인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흡사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그래….”
“기, 김유현?”
“그렇지, 그래….”
“왜, 왜 그래? 그렇다니? 뭘 말하는 거야?”
이효을이 거듭해서 물었으나 김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그 방법이…. 그 방법이 있었어…. 내가 왜 이 생각을….”
그냥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부지불식간에 까맣게 죽었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뿜기 시작한다. 존재를 감췄던 기가 순식간에 살아나고, 사라졌던 투지에 다시 불이 붙는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효을의 속에서 까닭 모를 불안이 고개를 치켰다. 설마 하는 기분이 엄습한 것이다.
“너 설마…. 전쟁을 하려는 거야? 아, 아니지?”
“후우우우….”
“…진짜로? 정말로? 너 미쳤어? 뭘 믿고서? 지금 이 사제가 한 말만 믿겠다는 거야? 내가 말한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이길 수 있게 해준다고…!”
이효을과 안솔의 눈에서 동시에 불꽃이 튀겼다. 그리고 서로를 째려보며 질세라 입을 열었으나, 다음 순간, 어쩐 일인지 둘 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유현이 손을 뻗어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김유현은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책상에 있던 카오스 미믹과 맹세의 검을 안솔에게 도로 던졌다.
“둘 다 그만. 그리고 이건 다시 가져가세요.”
“이건…!”
“들어요. 그게 뭔 물건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토록 자신만만한 걸 보니 어딘가에 쓸모는 있겠죠.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알아서 사용하시면 되는 일이에요.”
“…….”
김유현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다. 전에 없는 엄중한 음성에 안솔은 주춤 물러나며 두 물건을 품에 꼭 안았다. 흡사 되려 압박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이던 기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김유현은 잠시 안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수현이는 사용자 안솔을 중히 썼죠. 저도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아, 물론 당신의 행운은 저도 인정해요. 확실히 대단한 힘이죠.”
“저는….”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두시길.”
“네, 네?”
“저는 당신의 클랜 로드인 김수현이 아니라,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저에게는 저만의 방식이 있습니다.”
“…….”
안솔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만큼 사내의 태도가 백팔십 도 변했기 때문이다. 두 눈동자가 일견 싸늘함 속에서도 무섭도록 이글거리는 게, 방금 얼굴을 감싸며 좌절하던 사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다.
“이번 전쟁은…. 이번 전쟁은 누구 하나의 행운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뇌제는 여전히 안솔을 똑바로 주시하며 결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북 대륙의 전력을 하나로 결집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아군은 물리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된 상태입니다. 좀 전의 저처럼, 싸워봤자 무조건 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확실한 행운이 아니라….”
“두려움을 투지로 바꿀 수 있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말 앞에서 안솔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김수현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는 김유현의 말발은, 작두 탄 안솔조차도 반박하기 힘들 만큼 정연하고 논리적이었다.
이효을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사제의 말만 믿고 전쟁을 하겠다고 하면 죽는 한이 있어도 결사 저지할 생각이었는데, 김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긴말을 마친 김유현은 안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이효을을 바라봤다.
“이효을.”
“어, 응?”
“누구라도 좋으니까, 사용자들을 최대한 광장으로 모아줘. 나도 바로 갈 테니까.”
“어….”
빠르게 말을 끝낸 김유현은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홀연히 방을 빠져나갔다.
이효을은 아무 의미 없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그리고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전부터 심장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