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48
00947 If You Change, One. =========================================================================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허리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과 일 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한소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몹시 상심한 눈으로 말이다.
리리스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용두질에 몰두하던 내 모습은 과연 어땠을까. 아마 구역질 나올 정도로 추했겠지. 나도 일 회차 때 망가진 한소영을 보고 견디지 못했는데 그녀도 당연히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 터.
그래.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건만.
날 대하는 한소영을 보고 있으니 무언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얼굴은 과거 마냥 울부짖기만 했던 나와 전혀 달랐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후 그녀는 계속 입만 달싹거렸으나 적어도 날 위로하려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전해졌다. 덕분에 혼란한 내면을 가까스로 안정시킬 수 있었다.
거기다 허벅지를 베고 누우니 극한까지 치달았던 몸이 푹신한 이불을 덮은 듯 삽시간에 나른해지더라.
홀가분히 일 회차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아마 서서히 편안해지는 심신에서 문득 발로한 것이리라. 지금 날 보고 경청하는 한소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이해해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십오 년 전의 내가 홀 플레인에 입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형을 만나고 형을 잃고,
한소영을 만나고 한소영을 잃고,
결국에는 악마를 물리치고 제로 코드를 얻는 것까지.
“…그래서 사내는 결심했습니다. 혼자서 지구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설령 십 년의 세월을 반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암울했던 과거를 바꿔버리겠다고.”
“이번에는 기필코 형과 클랜 로드를 죽게 놔두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사내는 제로 코드에 요청해서 시간을 돌렸습니다. 즉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지요.”
길고 길었던 이야기를 끝맺자마자, 불현듯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잔잔하던 가슴도 돌연히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한소영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은 어떤 말을 할까?
아니. 과연 믿어주기나 할까?
“그 사내가 바로 머셔너리 로드였군요.”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킬 즈음, 고요히 흐르는 음성에 이야기하는 내내 한 곳만 바라보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뜻밖에도 한소영은 무척 담담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말씀해주셨네요.”
응?
“좀 더 일찍 털어놓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믿어…. 주시는 겁니까?”
한소영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의외다. 아무리 초감각이 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물며 형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다가 진실의 수정을 사용하고 나서 겨우 인정했는데.
“아마 처음 만났을 때 말씀하셨어도 저는 믿었을 거예요.”
그러나 한소영은 진심이라는 것처럼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살며시 턱을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겠지만…. 첫 만남부터 느꼈거든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여느 사용자와 다른, 오직 머셔너리 로드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영문 모를 특별했던 감정들….”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고개 숙여 그윽한 눈초리로 날 응시했다.
“그래요.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 같아요.”
“아….”
“저는, 머셔너리 로드한테 그런 존재였어요.”
“하…. 하하….”
그 순간 갑작스레 말문이 막혀와 그냥 웃고 말았다. 하지만 스스로 들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모르겠다. 좀 전부터 이상한 기분이 가시지를 않는다. 어쨌든 최소한 한 번쯤은 반문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예?”
“제가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털어놓으니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요.”
“…….”
이제는 숫제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기까지 한다.
아무튼, 기분이라. 글쎄.
“모르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기쁜가요?”
이어지는 질문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고 냉정히 말해서 딱히 기쁜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한소영의 반응이 워낙 예상을 뛰어넘어서 어안이 벙벙할 뿐. 한편으로는 시원섭섭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럼 슬픈가요?”
이번에도 머리를 흔들었다. 슬픈 것치고는 지나치게 편안한 느낌이니까. 그냥 놓아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하려나.
“웃고 싶어요?”
절레절레.
“그럼 울고 싶나요?”
그때, 계속 가로젓던 머리가 멈칫 정지한다.
가만히 말을 곱씹었다.
울고 싶으냐고….
“…….”
침묵이 길어질수록 느껴지는 눈초리는 한층 강렬해져 머리를 반쯤 돌려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한소영이 느닷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나는 방금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울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울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가끔 해왔던 생각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눈물이라는 걸 흘려보고 싶다.
‘그런가….’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져 가는 중인 건가….’
이곳에서 나눴던 제로 코드와의 대화는 뼈저릴 만치 공감하고 있었다.
사실 이 회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암암리에 느꼈다. 몇몇 감정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무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슬퍼하지 못한다.
순수하게 웃지 못하고, 순수하게 울지 못한다.
정말 자극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임의로 감정을 표출하는 것조차 어색해졌다.
결국에는 되찾고 싶다는 일종의 갈망이라고 해야 할까. 나라고 감정이 풍부했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한소영이 죽은 이후로 한 번도 없지 않았나? 그럼 거의 십 년 가까이 울지 않았다는 말인데.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눈물샘이 메마른 것일지도.
한소영의 말이 이어졌다.
“울고 싶으신 건가요?”
“…어떻게 울어야 하는데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는 이스탄텔 로우 로드는 어떤 기분이십니까?”
비겁하다는 건 알고 있으나 결국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한소영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음…. 저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으나 한소영도 더는 파고들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꼭 안아주고 싶어요.”
“예?”
순간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눈을 돌리자 다시금 한소영이 눈에 밟혔다. 시야로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이상했다.
아니. 평소와 다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황혼빛 입술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키스하고 싶어요.”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일으켰다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꼭 비 맞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안쓰러워하실 필요는….”
“머셔너리 로드.”
그러나 약간 화난 듯한 음성이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내 말을 끊어버렸다. 가슴이 뜨끔하다. 살그머니 눈을 들자 실망과 애처로움이 섞인 눈빛을 빛내며 날 바라보는 한소영이 보였다.
“그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 말이 이제 그만 외면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설마.
“저 정말 많이 기다렸잖아요. 모르시는 거 아니잖아요.”
착각이 아니었다. 기실 외면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인정한 것과 진배없다.
“저번에 그러셨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동경하는 거라고.”
말인즉.
“그때는 머셔너리 로드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진심이라고 느꼈으면서도 오히려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변명이라고 멋대로 치부해버렸죠.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요. 아니. 이해할게요.”
한소영이 그럴 리 없다는, 한소영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일 회차의 저는 분명히 동경의 대상이었는지 몰라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던 내 마음의 유일한 성역.
“하지만 과거의 저로 인해 현재의 제가 가려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을 것 같이 가슴이 아파요.”
그 성역으로 정면 돌파하며 들어온다.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도 아닌,
“이제 그만, 과거에서 헤어나와 줘요.”
한소영 본인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달라는 여인의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숨을 멎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이제껏 참고 참아온 무언가가 폭발했는지 한소영이 전에 없는 빠른 말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상하지 않잖아요.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요. 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묵묵히 절 지켜준 사내인데.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여인이 그 사내한테 반하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네?”
아니요.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여전히 저라서 안 되는 건가요?”
아니요. 한소영이라서가 아니에요. 아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저는 알고 있으면서 무조건 피하기만 했습니다. 스스로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내심 즐기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맞아요. 저는 비겁한 놈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왜 입은 뻐끔거리기만 하는 걸까.
“저 싫어하시는 거 아니잖아요.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왜 슬슬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걸까. 무엇이 두려워서.
“가지 마요…. 제발….”
목이 콱 틀어 막힌 듯하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목구멍으로 쑤셔 넣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때였다.
“흐윽…!”
한소영이 갑자기 끓는 신음을 흘리더니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철그렁!
그리고 입술을 짓씹으며 신경질적으로 양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원망하는 눈으로 손목에 묶인 사슬을 노려보며 어떻게든 끊겠다는 듯 미친 듯이 흔들고 있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
잘못하면 손목이 먼저 끊어질 것 같아 서둘러 가까이 다가간 찰나.
“그만…?”
불현듯 한소영이 목이 부러질 듯한 기세로 고개 돌렸다. 한껏 이지러진 두 개의 흑 수정은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보는 이로 하여금 도저히 뿌리칠 수 없게 하는 강렬한 마력마저 느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칠해졌다.
“아니…. 에요?”
“저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 찰나의 순간.
“아….”
내 왼발이 무작정 한 걸음 내디뎌졌다. 이어서 오른발도 한 걸음 내디뎌졌다.
어어 하며 걸음을 물리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리리스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완전히 정반대다. 이성은 가만히 있는데 본능이 눈앞의 여인을 원하고 있다. 흡사 내 안에 있던 무의식이 더 이상은 갑갑해서 못 참겠다며 뛰어 나와 날 억지로 끌고 가는 듯하다.
애초 일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터라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들썩거리는 가슴이, 깊은 고저를 그리는 목울대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여전히 깨물린 입술이 차례차례 눈에 밟혔다.
그리고 비로소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 서글프게 치떠졌던 두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더니 종래에는 지그시 감겼다.
한소영은 턱을 살짝 내밀었다.
나는 거기서 접근을 멈췄다.
바보가 아닌 이상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으….”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지금 단순히 분위기에 이끌려서 책임지지도 못할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
왜냐면 한소영은, 한소영은….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붉은 입술이 시야를 가득히 물들였다. 아랫입술에 난 잇자국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아차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것과,
얼굴이 살짝 밀려나는 것과,
성숙한 어른의 향기가 콧속을 물씬 찌르는 것과,
입술이 녹아내릴 듯 뜨거운 감촉과 맞닿은 건,
“……!”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한소영과의 플래그만 회수하고, 에피소드 1의 최종 무대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_)_
*
추가(09시 28분)
후기를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한소영과의 H신은 최종 무대(전쟁)가 끝난 다음, 즉 에피소드 1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서 그간 어두웠던 분위기를 반전하는 용도로 서술이 예정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말 그대로 딱 플래그 회수까지, 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부분까지만 적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것도 거의 끝난 상태이고요. 마지막 무대는 늦어도 다다음 회부터 시작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