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0
00949 If You Change, One. =========================================================================
문득 세찬 바람이 불었다. 땅에서 일어나는 흙먼지가 얼굴을 두드려, 눈을 질끈 감는다.
바람은 곧 멎었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죽음의 공포에 펄떡거리는 심장도, 파르르 떨리는 입도, 정수리를 어루만지는 추악한 손길도, 그리고 인근의 대지를 밟고 있는 무수한 어둠의 기운도.
쿵!
그때, 땅을 울리는 강한 진동이 무릎을 타고 전해졌다. 몹시 거친 발걸음.
“벨페고르 님. 정찰 부대의 연락입니다.”
이어서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음성이 귓구멍을 푹 찔렀다.
“뇌제(雷帝)의 출현을 확인했습니다.”
“큭!”
그 순간 벨페고르가 내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고, 갑작스레 머리가 통째로 뽑히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픔은 금세 사라졌다. 방금 들은 믿지 못할 소식에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허!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왔어? 아니, 잠깐만. 뇌제 혼자 온 건 아니겠지?”
“첫 보고를 받자마자 연락이 끊겼습니다. 단 일천 명은 족히 넘는 것 같다고….”
“일천 명이라. 그럼 해밀 놈들이 모조리 왔을 수도 있겠는데…. 뭐, 알겠다. 바로 상황을 전파하도록. 숫자는 우리가 훨씬 많으나, 절대 방심하지 마라. 그놈들은 몇 차례나 우리와 동등하게 싸워온, 한 명 한 명이 얕볼 수 없는 놈들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발소리는 다시금 멀어졌다. 그리고 난 놀라움을 내색하지 애쓰려 무진 애를 썼다.
형이 온다.
형과 해밀 클랜의 동료들이 날 구하러 오고 있다.
그 순간 두려움에 젖었던 심장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
가장 선두에 있던 놈이 갑옷을 내려놓자, 나머지 다섯 놈도 들고 있던 것을 동시에 바닥에 놓는다. 이어서 양옆으로 세 명씩 신속히 물러나 서로 마주 보며 도열했다. 마치 누군가 곧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아직 스스로 입을 힘 정도는 남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누군가가 좌우 일렬로 늘어선 마족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 들어온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원한다면 입혀줄 수도 있기는 한데.”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느긋하게 걸어오는 형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씩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은 바로 에르윈이었다.
“이게 무슨 속셈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 모를 상황이라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실컷 가둬두다가 갑자기 장비를 돌려준다?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뭔 말이지? 속셈이라니?”
그러나 에르윈은 이상하다는 듯 오히려 눈썹을 치켰다.
“속셈 따위는 없어. 네 형이 곧 이곳에 도착할 거다. 그게 다다.”
“뭐라고?”
딱!
반문한 찰나, 에르윈이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손가락을 강하게 튕겼다. 그와 동시에 손목과 발목을 옭아매던 사슬이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나뿐만이 아니라 한소영도.
일거에 해방된 신체는 갑작스레 되찾은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었으나, 나는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길게 말할 시간도 없고, 똑똑한 놈이니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겠지. 그럼 얼른 입고 나오도록.”
“잠깐…!”
“아, 아직 구속 장치를 풀어줄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겠지?”
“…….”
그렇게 말한 에르윈은 몸을 돌려 입구로 모습을 감췄다. 나와 한소영은 서로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족이 장비를 건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어찌 된 건지 모르겠으나 빨리 입고 나오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에는 무언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느릿하게나마 팔을 뻗었다.
장비는 예상외로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거기다 장갑(裝甲)은 물론, 무검이나 빅토리아의 영광 등 무기까지 모조리 넘겨줬다. 딱 하나, 엑스칼리버만 빼고.
어쨌든 구속 장치는 차치하고서라도, 마력이 묶인 채 장비를 입으니 확실히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소망의 셔츠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움직이는 건 가능해 주섬주섬 걸치고 입구로 나오자, 에르윈이 복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윈은 날 흘끗 흘기더니 아무 말도 않고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등을 향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그냥 거두고 말았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우선은 조용히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가 있던 공간은 약속의 신전인 최상층부.
계단을 내려가고 미로를 벗어나기까지 들리는 것이라고는, 휘적휘적 앞서 가는 에르윈과, 나와 한소영과, 감시하듯 뒤따라오는 마족 놈들의 발소리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
오묘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이상하다. 이 상황은 분명히 처음 겪는 것일 텐데, 왜 이미 경험해본 적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죽기 좋은 날이군….”
그때, 느닷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은근하게 흘렀다.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살짝 등을 밀쳤다.
“윽!”
그와 동시에 나는 약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등을 떠밀려서가 아니라 갑자기 시야로 밝은 빛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얼마 만에 보는지도 모르는 햇살은 눈이 저절로 찡그려질 만큼 충분히 따갑고 눈부셨다. 동시에 무겁고 음습한 공기가 아닌, 가슴을 뻥 뚫어주는 맑고 시원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었다. 아직 시야는 하얀색 일색이었으나, 나는 넓은 단상의 중심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약속의 신전은 총 삼 단으로 결합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가장 위로는 아치형 지붕과 이어져 있는 교회 건물이, 중간에는 전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인 입구 달린 신전이, 가장 아래에는 좌우로 긴 계단이 난, 두 건축물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높고 두꺼운 단상이.
이 중 나는 하부와 중부 사이에 있을 터.
이윽고 간신히 빛에 적응하고 차츰차츰 시야가 회복될 즈음.
“……!”
망연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찰나,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순간적으로 경악성을 지를 뻔했다.
단상 아래 대지에는 무수한 존재가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하게 도열해 있었다. 마족은 물론, 남 대륙 사용자도, 서 대륙 사용자도, 요정도 있다. 하얀 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모조리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광활한 대지를 가득 채우는 엄청난 군세가 한 눈에 들어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만큼이나 죽였건만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 있으니.
이뿐만이 아니었다.
보면서 하나 느낀 게 있다면, 곳곳으로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자리는 나와 제로 코드를 교환하는 만남의 장일 터.
한데 필요 이상으로, 목이 바짝 탈 만큼의 흉흉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그나저나 타나토스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 어디 있는 거지?
“김유현은 어디쯤 오고 있지요?”
타나토스를 찾으려는 찰나, 에르윈의 음성이 들렸다. 아마 요정을 의식하고 말투를 바꾼 것 같은데 몇 번을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느낌이다.
“관문은 아~까 통과했다던데. 정찰 보고가…. 아, 마침 저기 오네.”
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아스타로트가 무심히 왼쪽 계단을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한 마족이 계단을 급하게 뛰어 올라오더니 쿵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부복했다.
“보고 드립니다. 적의 접근을 확인했습니다.”
접근 확인이라.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형이 오고 있었다.
“관문은 통과했다고 들었어요.”
“예. 약 이십 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인원은요?”
“여전히 사천 명 가량 됩니다. 멜리너스 님이 설치했던 워프 게이트로 나왔던 인원과 똑같습니다. 이후 여기까지 오면서 더 줄지도, 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찰을 풀어 반경 십 킬로미터까지 샅샅이 뒤진 결과, 특이한 낌새는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지원군은커녕, 몰래 따라오는 병력이나 우회해오는 병력은 눈 씻고 봐도 없었습니다. 워프 게이트는 멜리너스 님이 진작에 폐쇄하셨습니다.”
그렇게 에르윈이 보고를 듣는 동안, 아스타로트가 살그머니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거 참. 관문을 그냥 통과하게 둔 게 잘한 짓인지….”
에르윈은 손짓으로 마족을 물리친 다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죠. 그 사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이곳에 단신으로 올 리가 없잖아요? 적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천 명 정도는 호위 병력으로 인정 가능한 범위예요.”
“그러는 너도 찜찜해서 계속 정찰을 풀어놓은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초원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결국에는 둘 중 하나죠. 저게 현재 전력이거나, 아니면 호위로 데려왔거나.”
“…하기야. 놈들이 우리처럼 날개가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전혀 웃기지 않은 농담이었지만, 여하튼 에르윈의 생각은 내 생각과 거의 비슷했다.
분명히 사천 명이라고 했다. 마냥 적은 병력은 아니나, 기실 그 정도로 싸우겠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르윈은 두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아마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말인즉 형은 결국 교환을 선택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물론 날 살리겠다는 형의 마음은 이해하고, 나 또한 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제로 코드를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까닭 모를 허무함이 엄습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지만, 왜인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
정말로….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건가?
“후우우우….”
순간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 긴 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대는 간간이 들리는 말소리만 제외하면 한없이 적막했다. 그래서인지 한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때였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응?”
돌연 누군가의 탄성과 함께 먼 곳으로부터 돌연히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리더니,
“…저기, 오는군.”
아스타로트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술렁거리는 기류가 부지불식간에 사방으로 물결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김유현 : 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탄 : 뭘 웃냐. 사천 명밖에 데려오지 않은 주제에.
마르, 안솔 : 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탄 : 우, 우리에게는 힘을 되찾은 타나토스가….
게XX, 수X : 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탄 : …아 X발. 설마. 이건 진짜 아니지.
김수현 : 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탄 : 웃지 마라.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로유진 : ㅋㅋㅋㅋㅋㅋㅋㅋ
사탄 : 아니 개새끼야. 너까지 웃으면 어떡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