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3
00952 If You Change, One. =========================================================================
마족이 거칠게 뻗은 손톱이 안솔에 닿을락 말락 하는 즈음.
번쩍!
그 찰나의 순간, 땅에 꽂힌 검이 삽시간에 백열(白熱)했고, 새하얀 빛무리가 갑작스럽게 폭렬한다.
다음 순간, 폭발적으로 터진 빛은 하나의 기둥이 되어 수직으로 웅장하게 솟구쳤다. 우주까지 단숨에 돌파할 기세로 치솟더니, 하늘에 닿자마자 창천을 자신의 빛깔로 화려하게 채색한다.
화아아악!
누가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오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온 세상이 희멀건 한 빛으로 물들었는데.
이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위용에 가까이 있던 안솔과 마족은 물론, 다음 전략을 생각하던 김유현도, 초조하게 안솔을 응시하던 에르윈도….
아니. 장내의 전원이 눈부심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고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에 따라 막 불붙으려던 최후의 전쟁도 자연스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안솔이 이루어낸 미지의 현상은, 그 정도로 압도적인 위세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사르르르, 사르르르….
잠시 후, 일대를 점령한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과 함께 반짝이는 빛 가루들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빗발친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비정상적인 속도였다.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빛 가루가 일제히 땅을 뒤덮는 광경은 거의 장관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러한 찰나,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땅으로 가라앉은 빛 가루들이 곳곳에서 신속하게 뭉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스미듯이 번져서, 모종의 형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얼굴이, 두 팔이, 몸이, 두 다리가, 심지어 무기와 갑옷까지. 온통 빛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전장에 새로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마저 거의 완료됐을 즈음.
안솔의 주변으로 은은한 빛의 여운을 흘리는 형상, 아니 인간이 둥글게 둘러싸듯이 서 있었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천.
물론 겉보기에는 전신이 반투명해 살아 있는 인간이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육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온몸에서 넘칠 듯이 흘러나오는 거룩하고 경건한 기운은, 그들이 인간 이상의 존재라는 점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는다.
안솔은 여전히 기도하는 자세로 꿇어앉아 있다. 이내 그녀를 에워싼 무리 중, 연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 드디어 불러주셨군요. 은인이시여.
이윽고 호의 가득한 웃음과 마주하는 순간,
“아…!”
안솔의 멍한 얼굴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 하도 불러주지 않으셔서, 설마 잊어버리신 게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하하.
능청스레 말하는 사내는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안솔을 보며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머금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것 같으나 그렁그렁한 두 눈은 감사하다는, 와줘서 고맙다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 너무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제가, 아니 오히려 저희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야 용이 잠든 산맥에서 입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그랬다.
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현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맹세의 검’의 발동이었다.
『맹세의 검』
(고대를 넘어서는 아득한 신화 시절. 용과 인간은 대륙의 주도권을 놓은 대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신화 속의 영웅들은 광휘의 사제가 이뤄낸 기적으로 억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맹세의 검은 영웅들이 빛을 인도해준 구원자에 맹세한 일종의 서약입니다. 사용자는 단 한 번, 스스로 원할 때 신화 속의 영웅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해방된 영웅들은 비로소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구원자가 호출할 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달려올 것입니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기적으로 망령을 구원하고 얻은 한 자루의 검. 안솔은 여태껏 아끼고 아껴온 이 장비를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때 사용한 것이다.
기실 지금이야 거주민의 위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홀 플레인의 황금기였다는 고대조차 거슬러, 아득한 신화 시절에 존재했던 인간들은 현재의 거주민과 완전히, 백팔십 도 궤를 달리하는 이들이다.
구구절절 말할 것도 없다. 그 강력하다는 용들과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다툴 정도의 실력자들이며, 끝내 승리를 쟁취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한 명 한 명 영웅이라 불렸던 인간이 무려 수천이나 소환됐다. 이만한 전력이 전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 그럼 저희가 어떻게….
전장의 한복판에 소환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유를 잃지 않으며 사방을 돌아봤다. 그때였다.
“고대의 망령이 현세에 무슨 볼 일이지요?”
불현듯 울리는 에르윈이 외침이 적막하기 그지없던 침묵을 날카롭게 깨트렸다. 사내는 잠시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금세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단상을 올려다보며 느긋이 입을 열었다.
– 고대의 망령이라.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고대도 아니고, 신화 시대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니….”
에르윈의 음성은 언뜻 냉정하게 들렸으나 암암리에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맹세의 검이 발동한 순간, 에르윈은 본능적으로 소환된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용이 잠든 산맥에 해놨던 안배에는 사탄의 입김도 어느 정도 들어갔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에서 발생하는 사건에는 그 시절만의 이유와 사정이 있는 법. 하지만 그대들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요.”
그런 만큼 에르윈은 자기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저 정도의 전력이 갑자기 상대 진영에 합세하면 전황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돌아가세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당신들은 이 시대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요.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요?”
– 하하하하. 잠시만요. 아까부터 뻔지르르하기만 한 헛소리만 하고 있는데. 지금 하는 말이 얼마나 궤변인지 스스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내가 구변 좋게 받아치자, 에르윈의 입에서 저절로 큭 소리가 나왔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보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타깝네요. 수천 년 동안이나 고통받다가 간신히 해방됐으면서. 여기서 자칫 잘못하다 소멸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마음의 고향으로 갈 수 없을 텐데요?”
맹점이라면 나름 맹점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우습군요. 그 따위 말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진정으로 그렇게 여겼다면 실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조소하며 손에 쥔 지팡이를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더니.
–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한껏 낮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두 번, 아니 세 번은 죽었던 목숨입니다. 은인을 위해 싸우다 무로 돌아간다면 그것 또한 무척 값진 일이겠지요. 우리는 기쁘게 소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차분한 음성에 에르윈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 그대는 아마 모르겠지요.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다.
– 그래요. 말 그대로 우리는 망령이었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는 걸까.
– 평화를 되찾겠다는 단 하나의 신념조차 잊은 채, 수천 년 동안 산맥을 배회하던 망령.
아스라한 음성이 흐르는 속에서,
– …하지만.
사내는, 문득 안솔을 응시했다.
– 지금 이 자리에는 그런 우리를 알아주고, 진심으로 위해주었으며, 억겁의 고통 속에서 해방해준, 오직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 우리는, 그 고마움을 아직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다시 단상을 바라보며 또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이게 바로 우리가 이 전장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증거이며.
바로 그 순간,
– 또 기필코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웅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순식간에 무기를 뽑고 자세를 잡는다.
“무슨…!”
무어라 외치려던 에르윈은 순식간에 전투 태세에 들어가는 영혼들을 보며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사내 또한 더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말했다.
– …전우들이여. 드디어 우리의 진정한 마지막 전쟁의 막이 올랐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강력한 용의 힘에 짓밟히고, 같은 인간마저 등 돌려 배신하는, 자그마한 빛조차 보기 어려웠던 암흑의 시대가.
– 우리가 용과 최후의 일전을 앞뒀을 때를 기억하는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그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산맥으로 들어가는 걸 자청했다. 다시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 긴 말은 않겠다. 두려운 자들은 바로 떠나라! 잡지 않겠다!
살아생전 모든 것을 바쳐 싸웠다. 믿었던 지휘관에게 뒤통수까지 맞았다. 사후에도 수천 년 동안 산맥을 외로이 떠돌아야 했다. 응당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서 까맣게 잊혔었다.
한데, 비로소 해방된 지금.
– 하지만 그때 간직했던 신념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자의 부름에 화답한 신화 속의 영웅들은, ‘은혜를 갚겠다’는 새로운 신념 아래.
– 모두 무기를 들어라!
다시 한 번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유수의 기다림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영원한 소멸조차 두려워하지 않고서. 일말의 주저함 없이 하늘로 치솟은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그 방증이리라.
실로 얄궂은 일이 아닐까. 그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죽음 후의 영면을 갈망했을 뿐이건만, 그들의 삶은 결국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난다.
– Drrrrrrr….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동료들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고 있는지, 그는 반쯤 들었던 팔을 한껏 치켰다.
그리고 더없이 홀가분한 얼굴로 힘차게 외쳤다.
– Ea – Yaaaaaal!
그리하여.
거대한 함성이 사방으로 왕왕 울려 퍼지는 동시에 에르윈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흘렀다.
영혼들이 최후의 전투를 맞이해 환호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잠깐 멈췄던 전장이 다시 흐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악마 진영에는 전혀 좋지 못한 쪽으로.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윈은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기보다는, 전략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에르윈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전황은 더는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영웅이 소환된 후 거의 비등비등해졌다.
이 말인즉, 아직 크게 불리한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다. 연합군의 전력은 아직 건재하거니와, 무엇보다 비밀 병기인 봉인 해제된 타나토스까지 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저번 전쟁 때 얻은 시체의 팔 할을 몰아주지 않았는가.
단지 여유 전력이라 생각했던 요정을 다른 곳에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
‘포위망은 무조건 유지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여차하면 타나토스도 있으니까. 쯧.’
결국, 에르윈은 요정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중급 이상의 마족들이 상대의 본진을 교란하는 사이 측면에서 후려칠 계획이었지만, 저 영혼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이긴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적어도 시간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그러나 에르윈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일련의 사태에 신경을 쏟는 동안, 요정 쪽에서도 모종의 사건이 벌어졌음을.
“에르윈 님!”
공교롭게도 소식이 왔는지 한 마족이 계단으로부터 헐레벌떡 뛰어 올라왔다.
“큰일 났습니다!”
“큰일?”
“요, 요정들의 동태가 이상합니다! 아니! 지, 직접 보셔야…!”
“…뭐라고?”
============================ 작품 후기 ============================
구 북 대륙, 맹세의 검, 요정, 그리고….
아무튼, 에피소드 1도 서서히 끝날 기미가 보이네요.
기분이 싱숭생숭해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