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5
00954 If You Change, One. =========================================================================
비로소 본격적인 개전(開戰)을 알리는 신호는 지상전이 아닌 공중전에서 시작되었다. 공중을 점거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중급 이상의 마족들과 괴조 군단이 가장 먼저 맞붙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신체 능력은 마족보다 괴조가 더 낫기는 하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마족이 갑절이나 우위에 있으며, 무엇보다 괴조에게 없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마력. 즉 중급 이상의 마족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폐허의 연구소에 갇혀 있던 벨페고르가 당시 중급 마족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이 전력의 막강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그런고로 마족들은 육탄으로 부딪치기보다는, 대열을 갖추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법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급변하는 전황을 참작하면 나름 현명한 전략이었다.
서둘러 후방으로 선회한 마족들은 곧장 진을 짜고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이어서 어둠의 기운이 펄떡 요동치는 찰나, 작살 모양의 칠흑색 줄기 수천 개가 무섭게 쇄도하는 괴조 무리로 빗발치듯 쏘아졌다. 이대로 공격을 허용한다면 괴조 군단이 벌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그 순간이었다.
“키르르르…?”
쉬지 않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마족들이 돌연히 인상을 썼다. 심지어 황급히 회피 기동을 하려던 괴조들도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당장에라도 상대를 집어삼킬 것 같던 마법들이 허공에서 갑작스레 멈춰 섰기 때문이다. 흡사 풀로 단단히 붙여놓기라도 한 듯, 아무리 팔을 휘두르며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갑작스러운 현상의 해답은 공중이 아니라 지상에 있었다. 무수한 영웅의 영혼 중, 금발의 여인이 해맑은 미소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다름 아닌 용이 잠든 산맥에서 김수현에게 입을 맞추고 사라져 안솔의 분노를 산 영혼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왼손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그르르 돌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허공에 멈춘 줄기들이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하더니, 마치 되감기라도 하듯 하나도 남김없이 도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렇게 말끔해진 허공을 보며 공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상대의 마법을 강제로 취소시켰다?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능력이다. 캔슬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 마법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이와 반대로, 괴조 입장에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자기들을 원호해주는 세력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두머리는, 회피 기동을 버리고 곧장 돌진했다.
길이만 팔 미터가 넘는 육중한 체구가 안간힘을 다해 부딪치니 충격을 이기지 못한 마족들이 와르르 튕겨 나가는 것도 당연지사. 그중 한 놈이 쩍 벌려진 주둥아리에 걸려 힘껏 씹히자, 뼈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폭발한다.
그리하여 두 종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순간을 기점으로 하늘은 완전히 난장판이 돼버렸다. 거기다 마족은 괴조뿐만이 아니라 땅에서 공격해오는 영혼들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 한때 용을 지겹게 상대한 전력이 있는 만큼, 신화의 영웅들은 지대공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악마 진영 최고 전력이 괴조와 영혼 군단의 연합에 꽁꽁 묶여버렸다. 괴조를 최대한 빠르게 처리한다는 사탄의 계획이 어긋나버린 순간이랄까.
한데, 틀어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르르르르!
차분히 전장을 살피던 황금 사자 로드는, 문득 들려오는 타오르는 소리에 흘끗 옆을 흘겼다. 그러더니 돌연 안색을 굳혔다.
“부, 불 회오리다!”
누군가가 기함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 그대로였다. 오른 방향 먼빛으로 약 이 미터가 넘는 불의 회오리가 가열차게 회전하며 솟구친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기백 개 정도가.
다음 순간, 불의 소용돌이들이 가일층 가속하며 하나둘 미끄러지듯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꽃을 흩날리며 시시각각 일대를 불태워오는 광경은, 아무리 담이 큰 사용자라도 어느 정도 두려움을 느낄만한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북 대륙 사용자들이 황급히 방어막을 전개했으나, 애초 기우에 불과한 움직임이었다. 왜냐면 불의 폭풍은 북 대륙 진영으로 오기는커녕,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들은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며 세차게 우회하더니 부지불식간에 서, 남 대륙 사용자들이 있는 장소를 물밀 듯 덮쳐버렸다.
“뭐, 뭐야! 왜 갑자기…!”
“으, 으아아아아아!”
이 갑작스러운 불의 향연은, 안 그래도 무언가 이상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던 서, 남 대륙 사용자들의 아우성을 이끌어내는 데 충분하고도 넘쳤다. 설마 아군이라 여겼던 요정들한테 공격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불의 해일이 진영을 휩쓸어버리며 꿈틀꿈틀 춤을 추는 풍경은, 당하는 처지에서는 아닌 밤중에 불지옥이요, 보는 처지에서는 더없이 호쾌하고 장대한 광경이다.
이뿐일까?
아직 불의 회오리는 사그라지지도 않았건만, 우측에서 요정들이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수는 언뜻 약 이천 가량에 불과했으나, 느닷없이 사천, 팔천, 일만 이상으로 순식간에 기하급수로 불어났다.
빛, 어둠, 불, 물, 바람, 번개, 땅 등등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파도치듯 측면을 후려치고, 요정들은 정령을 앞세우며 화살 비를 날리며 뒤따른다.
“허…!”
그에 따라 도미노 무너지듯 와르르 와해하는 상대 진영을 보며 황금 사자 로드는 탄성을 터뜨렸다. 호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약간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전황이 일변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얼굴이 벌겋게 된 그는 문득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생전 무수한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만큼, 황금 사자 로드 또한 싸움을 아는 자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상대를 들이치기 절호조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만큼이나 멍석을 깔아주는데 어찌 사양할 수 있으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선두로 뛰어 나가더니 기다란 창을 꼬나 쥐며 외쳤다.
“뭣들 하냐! 가자! 이놈들아!”
그리고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가뜩이나 요정의 기습으로 정신없는 와중, 북 대륙마저 방진을 풀고 공격해 들어오니 상대 진영은 한층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로써 사탄이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했던 포위망은 산산이 부서진 셈이다.
아니. 공중에서는 마족들이 제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쁘고, 요정은 측면을 찔러오며, 정면 방향으로는 구 북 대륙 사용자들이 치고 들어가는 중이다. 이제는 숫제 포위망이 와해하는 걸 넘어서 반대로 에워싸인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큭…!”
삽시간에 반전되는 전황을 에르윈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가까스로 이성은 유지하고 있으나, 그뿐이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덜덜 떨리는 양 주먹은 현재의 심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에서는 이빨 자국이 선명한 마족들이 부지기수로 추락하고 있다. 그리고 서, 남 대륙을 저대로 놔둔다면 곧 붕괴할 것은 명약관화였다. 저번 전쟁 때 북 대륙이 무너졌던 과정을 이번에는 악마 연합군이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차오르는 초조함에 입술을 쉴 새 없이 짓씹는다. 아까는 그나마 전략을 수정할 여지라도 있었지.
“크으…!”
어떻게 수를 내야 하는데, 무어라 지시라도 내려야 하건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 난국을 타개할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크흐으으…!”
그 사실을 인정하자 순간 어마어마한 무력감이 온몸을 무너트릴 듯한 기세로 엄습했다. 흉부를 쫙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몹시 갑갑하다.
“뇌제에에에에에에!”
결국, 에르윈은 꽝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세게 감싸 쥐고 말았다.
그 시각.
“전군, 좌익으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김유현이 마침내 진군 명령을 내렸다. 전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풀려가는 중이었으나, 얼굴빛은 그리 밝지 못하다. 왜냐면 이번 전쟁의 최우선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는 한 놈도 남김없이 전멸시킬 생각이었으나, 엄밀히 말해서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목표에 불과하다. 김유현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건 김수현의 무사 구출이었다. 설령 전쟁에서 이겼다손 치더라도 동생이 죽는다면 모든 의미가 사라진다.
그래서 김유현은 애초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었다. 상대를 차근차근 정리하고 멋지게 동생을 구하기까지, 적이 마음씨 좋게 기다려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막말로 악마는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김수현을 죽일 수 있으니.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상황은 이미 만들어졌다.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남은 인원으로 단상까지 쾌속하게 길을 뚫는데 성패가 달렸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김유현은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의 버릇 중 하나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우기 때문이랄까.
무엇보다 김유현이 이곳에서 하나 생소한 감을 느낀 게 있다면 바로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적다는 점이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안 봐도 훤하다.
한편으로는, 김수현 본인도 지금쯤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터. 만약 구출에 성공해서 검의 군주가 전장에 복귀한다면, 이후 어떻게 될지는 적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상황이 이렇다 하더라도, 단상까지 가는 길을 순순히 열어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말인즉 이대로 성공한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실패하는 순간을 대비한 차선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준비에 들어간다.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
그렇게 생각한 김유현이 힘껏 외치자,
“음!”
약간 거만함이 섞인 낭랑한 음성이 화답한다.
잠시 후, 비비앙은 훌쩍 선두로 나오더니 방정맞게도 뛰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는 모습이 어쨌든, 점차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김유현은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맡긴 임무는 스스로 생각해도 가혹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