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6
00955 If You Change, One. =========================================================================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던 일대가 삽시간에 전장으로 변했다.
얼굴이 뜨겁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불 회오리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적들의 비명이 귓전을 한가득 울린다. 그 뒤를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해일처럼 덮쳐가고 요정들의 원호 사격이 이어진다.
동시에 구 북 대륙 진영이 방진을 풀고 정면으로 치고 나오니 서, 남 대륙 진영은 자연스레 붕괴. 아무리 엘도라가 강해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이어지는 연속 공격에는 어쩔 수 없을 터.
공중은 더 볼 것도 없다. 용의 잠든 산맥의 영웅들과 괴조 군단의 합격은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마족의 시체가 우수수 추락하는 중이었다. 애초 마법을 쓰지 못하고 육탄전을 허용했을 때부터 승부가 난 셈이다.
계속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눈앞의 광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이길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전쟁이 한순간 반전됐다. 사실 아직도 믿기 지가 않지만 몇 번을 봐도 보이는 그대로다. 악마 진영에 맞서 결성된 북 대륙 연합군은 그야말로 노도와 같은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인다.
그리고.
“……!”
마침내 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형뿐만이 아니라 사천 명 전원이 동시에 좌익으로 빠지며 비비앙이 돌연히 선두로 나왔다. 이어서 질서의 오르도를 하늘 높이 들더니 무어라 힘껏 외치는 모습이 잡혔다. 아마 제 삼 군단을 소환하려는 거겠지.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순식간에 어두운 운무가 깔리더니, 이윽고 죽음의 기사 수십 명이 연기를 헤치며 튀어나왔다. 한 명 한 명이 기마로 이루어진 베히모스의 군단은 평지에서 최강의 전력을 발휘한다. 단상까지 일직선으로 길을 뚫는데 이보다 적합한 선택이 있을까.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더없이 초라하게 보이던 병력이었다. 하지만 전황이 일변한 지금, 왼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사천 명은 더없이 위협적으로 변모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끝났구나 싶었건만. 불가능이라 여겼던 현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비로소 전신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전율이 스쳤다. 혈관을 흐르는 핏물이 끓는 것 같다. 지금 당장에라도 단상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은데, 같이 싸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가일층 힘을 줘도 구속 장치는 요지부동. 아무리 용을 써도 끊어지지 않는다.
그때였다.
“아하하하하하하하!”
문득 바로 옆에서 신 나게 웃어 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자 단상 끝자락에 걸터앉은 타나토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 순간 갑작스레 숨이 멎는 동시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들끓던 피가 한순간 가라앉는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 이 전황을 다시금 반전시킬 수 있는 악마 진영의 최종 병기를.
“아, 정말.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잖아.”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느긋하게 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흡사 곳곳에 널린 먹잇감을 보며 흡족하게 웃는 맹수 같다고 느꼈다면 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봉인이 해제된 타나토스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최소한 아틀란타 전에 등장한 게헨나의 삼 분의 일 정도? 거기다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의 범위가 늘어났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무엇보다 저번에 기운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을 때도 제대로 막지 못했는데, 이대로 전장에 참가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명약관화였다.
그나마 모든 전력을 하나로 모은다면 모를까. 이렇게 따로따로 상대하는 상황에서는 각개격파 당하기에 십상이다. 탁 까놓고 말해서 지금 타나토스의 전력을 다한 일격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타나토스 하나 상대하겠다고 다른 적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으니….
말인즉, 진퇴양난.
“흠~. 거의 전역이 위험한 것 같은데~.”
타나토스는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말을 끌더니 검지를 펴 전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흥얼거리며 집게손가락으로 한 군데씩 가리키기 시작한다.
“어디.”
처음에는 공중을 가리켰다가,
“부터.”
그 아래 구 북 대륙 사용자 진영으로 내리더니,
“갈까?”
돌연 요정 진영으로 돌렸다. 검지 끝은 신으로 화한 마르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윽고 날 흘깃거리며 배시시 웃는 꼬락서니를 보니 진심으로 저 손가락을 휘어잡아 부서트리고 싶어졌다.
“…요?”
그때 느닷없이 검지가 오른쪽으로 휙 돌아갔다.
다음 순간,
“좋아, 정했다!”
타나토스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한껏 웅크렸다가, 단상으로부터 펄쩍 솟구쳤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래로 쏜살같이 쇄도하며 오른손을 어깨 뒤로 한껏 당기는 중이었다. 날아가는 방향에는 베히모스의 뒤에 탄 비비앙이 있었다.
아차 하기도 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타나토스는 깔깔 웃어 젖히며 근접한 비비앙을 향해 독사처럼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어둠의 기운이 단박에 뭉쳐 요동치더니 깜짝 놀라 고개 돌리는 비비앙을 향해 폭발적으로 쏟아진다. 싸늘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치솟는다.
“비비아아아아아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찰나, 불현듯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며 순간적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새하얗게 채색되며 턱이 단상에 힘차게 부딪친다. 숨이 턱 막혀왔으나 어떻게든 일어서려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압박감만 한층 강해졌다.
그러한 찰나.
꽈앙!
갑자기 무시무시한 굉음이 귀를 찔렀고,
“아….”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피 분수를 포물선처럼 뿌리며 허공을 훨훨 나는 비비앙을.
왜.
왜 날고 있는 거지?
왜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거지?
저 엄청난 핏물은 또 뭐고?
어째서 일어나지 못하는 건데?
빨리 일어나서…!
그 순간,
쿵!
왜인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 단상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
– 이런….
한창 전장을 질주하던 베히모스는 씁쓸한 음성을 뱉으며 이를 부딪쳤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장검은 반으로 부러졌고, 갑옷도 상단이 반파된 것이 정상이라 보기는 어려운 모습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 타나토스가 손을 툭툭 털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 짓는다.
“멍청하기는. 그러게 누가 소환사 태우고 신 나게 달려오래? 얌전히 뒤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굳이 타겠다고 억지를 쓰셔서요. 사실 어지간하면 막아낼 자신은 있었는데 말이죠. 누가 치사하게 깜짝 기습을 해서.
베히모스가 빈정거리자 타나토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고 있네. 어쨌든 나야 고맙지. 귀찮은 놈들을 이렇게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너보다는 소환사를 죽이는 게 훨씬 쉽거든.”
– …그때보다 기운이 굉장히 늘어나셨습니다? 예전에는 계신 줄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그때? 착각하지 마. 당시에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으니까. 뭐 그때보다 수십 배 강해진 건 맞지만.”
– …….
그렇게 어깨를 으쓱인 타나토스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휙휙 저었다.
“아무튼, 이만 조용히 꺼지라고. 더 기어 나올 생각하지 말고.”
–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두고 보시죠. 전부 일러바칠 테니까요.
“응? 누구한테? 설마 게헨나?”
– 일 군단장님뿐이겠습니까. 마침 얼마 전 만년설 님도 깨어나셨겠다…. 아! 특히 왕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굉장히 분노하실 것 같은데요?
타나토스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나 참. 마음대로 해. 그전에 나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제 삼 군단을 비뚜름하게 바라보다가, 아래 널브러져 있는 비비앙의 시체를 뻥 걷어차 날려버렸다. 게헨나의 이름이 나오니 기분이 더러워진 탓이다.
하지만.
“자~. 그럼 다음 타깃은….”
곧바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공교롭게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비비앙의 몸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사내가 가까스로 받아냈다는 것을.
“…스, 스승님.”
약간 말을 더듬는 사내가 품으로 받아낸 여인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미 심장 부근에 구멍이 뻥 뚫린 터라 비비앙은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엄청난 양의 핏물만 꾸역꾸역 흘러나올 뿐.
아래를 보는 사내의 얼굴빛에 서글픈 기색이 서렸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천천히 뻗은 손이 아직도 꽉 쥐어져 있는 질서의 오르도에 닿는다.
웅웅웅웅!
질서의 오르도가 세차게 진동한다. 마치 주인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뿌린다. 허나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사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 우리…. 오랜만에 보지요? 하, 하하.”
웅웅웅웅!
“그,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웅웅…?
거기까지 말한 사내는,
“하지만.”
돌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드, 들었던 것보다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이대로라면 본진이 꼼짝없이 잡히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되면 계획이 어긋나버리죠. 조금이라도 좋으니 저라도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제발 힘을 빌려주십시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내의 간절함이 닿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끊임없이 이어지던 진동음이 뚝 멎더니 주먹 쥔 손이 느슨하게 풀린 것이다.
잠시 후, 사내는 힘 있게 질서의 오르도를 움켜쥔 후 긴 숨을 흘리며 허리를 폈다. 햇살을 반사하는 안경을 고쳐 쓰며 멀리 보이는 타나토스의 등을 겨냥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
*
한편, 같은 시각.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소환의 방에서는 때아닌 고성이 오가는 중이었다.
세라프는 영상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나 돌려봐도 똑같다. 타나토스의 기습은 확실히 훌륭했으나, 베히모스의 방어를 뚫고 비비앙을 즉사시켰다는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타나토스가 그게 가능할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는 소리다.
당연히 전혀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이래서야 두 마수 소환사를 이용해 단상을 순간적으로 점거하고, 동시에 김수현을 끌어내리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생각보다 일찍 죽기는 했는데.”
그때 들려오는 나직한 음성에 세라프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제단 앞 오 미터 즈음에는 이효을이 살짝 상기한 얼굴로 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입니다.”
무엇을 한다는 지는 모르겠으나, 세라프는 또박또박 음성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좋아. 그럼….”
이효을은 곧장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용자 이효을은, 북 대륙 사용자 이만 사천오십칠 명의 GP 사용 권한을 넘겨받은 대리인의 자격으로.”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거주민 비비앙 라 클라시더스의 부활 소원을 요청합니다.”
============================ 작품 후기 ============================
『Insert 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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