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9
00958 If You Change, One. =========================================================================
조막만 한 머리가 느릿하게 옆을 돌아본다. 이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타나토스는 갑자기 기분이 매우 더러워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좀 전까지 뿡뿡 화를 내던 올망졸망한 눈동자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벌레 보듯 무심하게도 응시한다. 특히 한쪽 눈을 남을 업신여기듯 치켜 올리는 것이 꼭 누군가와 닮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손.”
통증은.
“떼라고.”
생각보다.
“하지 않았어?”
굉장히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
처음에는 그저 약간 따끔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감을 인지하는 찰나.
“어, 어…?”
돌연 어깨에 얹은 손이 한들대는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는 곧 살결로 스며 체내로 침투했고, 흐르는 핏물에 섞여 단숨에 전신으로 퍼졌다.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었다. 심지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단지 아차 하는 순간, 영혼을 불로 지지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고통이 엄습했다.
“까아아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손을 뗀 타나토스가 미친 듯이 땅을 구르기 시작한다. 땅이 깨져나갈 정도로 쾅쾅 두드려도 꺼지지 않고 기운을 일으켜 상쇄하려는 족족 살라 먹힌다.
결국.
“키아아악! 키아아아아아아악!”
“이이이익! 시끄러워!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큰 거야!”
불이 꺼진 건 한쪽 귀를 틀어막은 수나가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을 때였다. 낙지처럼 꿈틀꿈틀 발광하던 타나토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온몸을 괴롭히던 화마가 한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윽고 거친 호흡을 추스르며 몸을 일으키더니 망연자실한 낯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전쟁 시작부터 내내 이어지던 여유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말도 안 된다는 기색만이 역력하다.
그러는 동안 수나는 폴짝 뛰어올라 허공에 사뿐히 앉았다. 낑낑 애를 쓰며 간신히 두 다리를 꼬더니 후유 숨을 내쉬며 비스듬히 턱을 괸다.
“……!”
그렇게 허공에 앉은 자세를 확인한 순간, 타나토스는 불현듯 아까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구체화할 수 있었다. 용암 빛깔 머리카락. 피처럼 진한 붉은색 눈동자. 그리고 특히 상대를 깔아보는 듯한 특유의 거만한 눈빛.
“…게헨나? 아니, 아니야. 넌 누구지?”
게헨나는 당연히 아니다. 일단 외형은 차치하고서라도 방금 느꼈던 기운은 게헨나라고 보기 약간 오묘한 구석이 있다. 파괴력은 겁화를 능가하고 영원성(永遠性)은 화정을 넘어선다.
이러니 타나토스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애초 두 상반 속성이 공존한다는 것부터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뭐 그럭저럭 격은 있는 애인 것 같은데…. 별로 볼 일은 없네. 나 참. 애초 깨진 그릇으로 뭘 어쩌겠다고.”
수나는 척 보자마자 타나토스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당사자는 놀라는 것보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누구냐고 했잖아아아아아악!”
그래서 한 번 더 소리 지르는 도중,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또다시 쓰러졌다. 정확히는 고함치는 순간 입술에 불꽃이 튀겼고 아까와 같은 끔찍한 고통이 재차 엄습한 것이다.
“어디서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조용히 안 해?”
수나가 건방지다는 듯이 말하며 거듭 손을 젓자, 땅에서 헤엄치던 타나토스라는 물고기의 펄떡거림이 우뚝 멎는다.
수나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니지. 그냥 더 지껄여. 그래야 네게 드는 호기심보다 죽이고 싶다는 욕구가 앞설 것 같으니까.”
아까의 여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서슬 퍼런 호령이다.
즉 ‘한 번만 더 목소리 높이면 죽는다.’ 는 소리로,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할 타나토스가 아니었다. 전신을 덜덜 떨면서도 힘겹게 고개를 드니 놀람과 치욕이 뒤섞인 얼굴이 드러났다. 죽음의 신으로 숭배받으면서 언제 이런 굴욕을 겪어보기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 어떤 감정도 없이 무심하게 눈을 내리뜬 수나와 마주한 타나토스는 까닭 모를 오한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불현듯 깨달았다. 이렇게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기운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총 두 가지 경우로 상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감지하는 본인이 어떤 힘도 없는 평범한 존재일 때. 두 번째는 상대의 격이 감히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높을 때. 물론 타나토스를 보통의 존재로 볼 수 없으니 여기서는 당연히 후자일 터.
거기까지 인지한 타나토스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의 빛이 서렸다.
“말도 안 돼…. 이 내가? 다, 당신은 설마 십천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수나는 앙증맞게도 웃으며(본인은 요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을 열었다.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넌 날 모르지만 게헨나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타나토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직접 만나서 물어보는 건 어때?”
그렇게 말한 수나가 살며시 팔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끄으으으!”
쾅!
이상한 신음을 터뜨린 타나토스가 순간적으로 뒤로 훌쩍 물러났다. 동시에 흡사 김수현의 영역 선포처럼 둘레 십 미터 크기의 어두운 장막이 그녀의 사위로 생성된다. 또 알 수 없는 힘에 당할 거라는 지레짐작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어휴. 그것도 영역이라고.”
한데 수나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언뜻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더니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기 영역을 선포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흡사 한 수 가르쳐주기라도 하겠다는 말투. 그러더니 문득 반쯤 편 팔을 완전히 뻗으며 살짝 손가락을 튕긴다.
그 순간이었다.
딱!
자그마한 엄지와 중지가 튕기듯 어긋나는 찰나,
웅, 웅, 웅!
창졸간에 총 세 번의 웅혼한 소리가 흘렀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누구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적어도 타나토스만큼은 분명히 볼 수 있다. 일 초, 아니 영점일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온 세상의 색깔이 네 번이나 변했다. 본래의 빛깔에서 잿빛으로, 잿빛에서 붉은빛으로, 붉은빛에서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쿠르르르르르르르!
곧바로 이어지는 현상은 갑작스러운 탑의 솟구침.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더니 웬 탑 하나가 지면을 깨트리며 하늘 높이 치솟는다.
보고 있던 이들 중 몇몇 북 대륙 사용자는 약한 탄성을 터뜨렸다. 왜냐면 탑의 모양새가 아틀란타 인근에 있는 이정표와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수나가 돌출된 어탑의 권좌에 사뿐 내려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어탑 아래로 무언가가 점차 넓적하게 젖어 번지는 순간을 기점으로 세상이 차츰차츰 변화하기 시작한다.
푸른 도화지에 채색이라도 하듯 굳건한 대지로 생생한 적 빛이 서서히 드리운다.
청명하던 대기에 말간 진홍색을 발하는 반딧불들이 눈처럼 분분히 흩날린다.
하늘은 이미 온통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붉어졌을 때.
“…….”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타나토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같은 영역 선포이기는 하나 자신이 사용한 권능과 궤를 달리하는 수준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수나는 사방을 왕의 의지가 닿는 영역으로 선포해버렸다. 그게 가능한 공간은 전 차원을 통틀어 한 곳밖에 없다. 왕의 탄생과 최후를 함께하는 공간. 무간 지옥(無間 地獄). 말인즉 이 일대로 아예 무간 구간을 구현화 해버린 것이다.
이게 바로 수나가 말한 진정한 의미의 영역 선포였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게헨나, 메르세데스.”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수나가 어탑을 톡톡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귀찮다는 어조로 입을 열자마자 어탑이 무음으로 휘황찬란한 빛을 비췄다. 수나가 영역을 선포한 순간부터 근방은 중간 세계에 팔열(八熱) 구간이 강제로 겹쳐진 상태라 볼 수 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지옥에 존재하는 전 마수 군단을 불러올 수 있다는 소리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콰르르르!
“으응?”
이윽고 어탑의 왼쪽, 불꽃이 순간적으로 거세게 휘몰아쳤다가 사라지는 자리로, 불현듯 한 여인이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웨이브 진 용암 색 머리카락.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 없는 유려한 몸매. 한 손에 긴 불의 채찍을 우아하게 들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게헨나였다.
단신으로 북 대륙 정예 사용자 일만 오천 명을 압도한 지옥의 겁화가 마침내 전장에 강림했다.
후르르르!
“사라진 왕께서 어떻게 호출을…. 어머나?”
그리고 어탑의 오른쪽에는, 놀랍게도 냉기를 보는 듯한 불길이 가라앉으며 메이드 복장을 한 푸른 단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두 눈이 지그시 감겨 있는 그녀는 입만 살짝 벌려 놀란 빛을 드러냈다.
특이하다면 확실히 특이한 여인이었다. 희디흰 살결에 어른어른하는 냉기의 아지랑이를 보면 얼음처럼 차갑게 보여야 정상이나, 왜인지 불처럼 이글거리는 느낌 탓에 괜스레 뜨겁게 느껴진다.
치마 상단에 공손하게 모여 있는 양손, 그리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정자세로 서 있는 자태는 언뜻 영리하면서 정숙한 숙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살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하는 메이드 복 상의는 물론, 왼 눈 아래 찍힌 작은 눈물점이나 농익은 사과색 입술은 어딘가 모르게 성적인 분위기를 은근하게 풍긴다.
거기다 코르셋을 살짝 끄르면 신 난다며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무르익은 젖가슴과, 입가로 알 듯 말 듯 지어지는 묘한 색기가 흐르는 미소…. 아무튼, 김수현이라면 좋다고 달려들 만한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다.
잠시 후.
수나가 아무 말도 않고 씩 웃기만 하는 가운데, 갑작스레 두 여인이 시선이 한 곳으로 꽂혔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흐응? 타나토스?”
“어머? 개새끼 씨잖아요?”
…어째서 메이드가 개새끼라고 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타나토스를 알고 있다는 말투임은 분명하다.
“호오.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을 다 겪는구나.”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 게헨나는 순간 손목을 힘차게 젖혔다. 차원 버프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애초 이 비상식적인 상황에 어느 순간 정신 줄을 놓아서일까.
타나토스는 고요한 사위를 가르며 날아오는 불길의 채찍에 순순히 목덜미를 내주고 말았다.
이윽고 착 소리와 함께 채찍이 목에 감기는 동시에 게헨나는 있는 힘껏 손을 떨쳤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그러자 타나토스의 몸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허공을 유영하더니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쾅, 폭음과 함께 몸이 펄떡 요동쳤다. 게헨나는 바로 앞에 처박힌 타나토스의 턱 아래로 살그머니 발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주 살짝 발등으로 젖히니, 흩어지는 흙 연기 사이로 분노와 황당함으로 일그러진 낯짝이 올라왔다. 한 대 맞더니 겨우 정신을 차린 듯싶다.
그러나 게헨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특유의 내리뜬 눈으로 타나토스를 내려다본다.
“별일이구나. 안 그래도 베히모스 놈의 보고를 받고 노심초사하고 있었건만…. 설마 이렇게 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헨나아아아아아!”
담담하게 이어지는 음성에 타나토스가 울부짖듯이 외쳤다.
“뭐 썩 반갑지는 않은가 보군. 하기야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그나저나 어떻게 봉인을 풀고 나올 수 있었던 거지?”
게헨나는 조소하듯 말하며 스리슬쩍 발을 치웠다. 그러자 타나토스가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로 절규하며 양손으로 땅을 강하게 짚는다. 그때였다.
꽈앙!
막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타나토스의 고개가 또 한 번 강제로 땅으로 처박혔다. 어찌나 강한 위력인지 지면에 금이 쩍 갈라지고, 팔다리는 개구리처럼 대(大)자로 뻗는다. 푸들푸들 경련하는 정수리에는 어느새 하이힐처럼 굽 높은 신발이 다소곳하게 박혀 있다.
“안 돼요. 게헨나.”
언제 온 걸까. 푸른 단발의 메이드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게헨나를 나무란다.
“개 쌍년은 개 쌍년 취급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자기 주제를 알아요.”
두 손으로 얌전히 치마 양 끝을 잡아 올려, 관능적인 선을 자랑하는 종아리까지 드러낸 채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예전처럼 날뛸지도 모른답니다?”
살포시 미소 짓자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느릿하게 휘어진다. 그로 인해 실처럼 드러나는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 끼치게 하는 서늘한 얼음 빛깔이었다. 그러더니 일어나려 용을 쓰는 타나토스의 뒤통수를 꾹꾹 밟아 비비면서 물었다.
“그렇죠? 개새끼 씨?”
============================ 작품 후기 ============================
정말 죄송합니다.
워낙 체력이 달리다 보니 집필 내내 극도로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적느니 안 쓰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에 두 번 갈아엎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기다리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_(__)_
PS. 어제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8월 12일 수요일 하루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