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0
00959 If You Change, One. =========================================================================
전장은 여전히 고요하다. 갑자기 등장한 수나와 갑자기 변한 세상. 그리고 타나토스가 세 여인, 아니 두 여인과 한 여아에게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가운데,
“아.”
김유현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멍하니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사용자 신상용!”
간절한 부르짖음에 신상용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라냐와 임프리손을 시켜 사용자 무리를 가리키자, 쏜살같이 뻗어 나가는 거미줄과 강철 사슬이 한 명씩 순식간에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칭칭 감긴 사용자들이 공중으로 붕 솟구친다.
그 상태로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사방을 에워싼 사령의 벽을 넘어 무사히 땅으로 안착했다. 넘어간 수는 약 이삼십 명 가량에 불과했지만, 한순간 격전지를 벗어나 안쪽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던 단상이 이제 손에 잡힐 듯이 다가왔다.
“…저기 있었구나.”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게헨나는 차분히 단상을 응시했다. 입을 쩍 벌린 채 한껏 경악한 김수현을 보자마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었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살짝 꼬며 오른손을 내리쳤다. 부드러이 굽이친 불의 채찍은 슬금슬금 꿈틀거리는 타나토스의 등을 철썩 때리며 발그스름한 궤적을 남겼다.
멍한 와중에도 잔혹한 손속을 보이는 주제에, 게헨나는 무언가 애써 감추려는 듯 뺨을 살그머니 붉히며 입을 열었다.
“우선…. 메르세데스는 저것들을 처리해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저것들이라 함은 아직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사령 군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던 메르세데스는 스리슬쩍 발을 치우며 말했다.
“저 아이들도 오랜만에 보네요. 귀염둥이들…. 아무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왕께서 제 군단을 소환해주신다면 더 편할 텐데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저것들이 있는데.”
이번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제 삼 군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유. 어쩔 수 없네요.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들었니? 우리 검둥이.”
그러자 지목당한 검둥이, 아니 베히모스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 아마 해골이 아니라 생전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쯤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선봉에서 길을 뚫던 북 대륙 연합 주력 부대가 한순간 들러리 신세로 전락했다.
이윽고 게헨나는 여전히 타나토스를 밟은 채 어탑을 돌아봤다.
“왕이시여.”
어느새 권좌에서 벌떡 일어난 수나는 왜인지 빨개진 얼굴로 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한심해. 정말 한심하잖아. 내 반려면 반려답게 그런 약한 모습 따위는….” 이라고 중얼거리다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가보시지요.”
게헨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수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 응?”
“사령 군단은 메르세데스와 제 삼 군단이 청소할 테고, 타나토스는 제가 맡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부왕을 구해오소서.”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애초 저런 약하디약한 인간이 부왕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지만, 뭐…. 어쩔 수 없으니까.”
“…….”
뭐가 뭐 어쩔 수 없으니까 입니까. 당장에라도 구하고 싶으면서. 그러니 되지도 않는 새침함은 잠시 넣어두시고 빨리 구해오기나 하시지요. 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으나 게헨나는 가까스로 삼켰다. 하기야 자신이라고 얼른 구출하고 싶지 않겠느냐마는….
탁 까놓고 말해서 중증의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걸린 수나가 아닌가. 특히 게헨나를 연적으로 여기는 만큼 넌 가지 말라고, 혼자서 구하겠다며 못 가게 막을 소지가 다분하다. 아니, 불 보듯 뻔하다. 그이가 아직 적의 손에 붙잡혀 있는 이상, 쓸데없는 말다툼은 시간 낭비에 불과할 터.
그리고, 무엇보다.
문득 생각난 굉장히 중요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어쨌든 수나가 김수현을 구하러 가야 했다. 어차피 구출하는 건 수나 혼자서라도 충분하다 못해 남으며, 이렇게 나오게 된 이상 타나토스는 무조건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쓸 데가 있었으니까.
한편, 멈췄던 전장이 서서히 재개될 낌새를 보이는 즈음.
신상용 덕분에 사령의 포위망을 벗어난 북 대륙과 머셔너리 클랜은 목전의 단상을 향해 한창 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격전지를 벗어났다고 해서 길이 뻥 뚫렸다는 건 아니다. 사탄이 바보도 아니고, 단상을 지키는 최후의 병력 정도는 남겨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훅…! 훅…!”
주변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요동치는 심장 탓에 호흡이 금세 거칠어졌으나 왜인지 누구 한 명 낙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상이 가까워질수록 힘이 나는 듯 달리는 속도에 가일층 가속이 붙는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는 동원했다. GP로 사용자들을 살렸고, 괴조 군단을 끌고 왔으며, 실시간 부활 계획까지 가동했다. 영웅들의 영혼을 소환하고, 요정들도 돌려세웠다. 괴물 소환 상자로 타나토스까지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즉 이제 남은 건 하나뿐.
전력을 부딪쳐서 김수현을 구한다.
“크으으으…!”
물론 그 사실은 에르윈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그녀는 순간 심한 갈등에 사로잡혔다.
손 하나 까딱 않고 타나토스를 갖고 논 정체 모를 여아.
화정과 동급의 힘이라 평가받는 ‘만년설’ 메르세데스.
‘지옥의 겁화’ 게헨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애초 수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에르윈은 암암리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법이라고는 김수현을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 방법뿐.
하지만 과연 저 정도의 존재들한테 위협이 먹힐까? 그 타나토스조차도 끽소리도 못하고 벌벌 기고 있는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겨우 돌아가는 머리는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없다. 이 전쟁의 끝이 어떻게 나든, 종국에 이르기까지 십 분도 채 남지 않았다. 결국에는 사탄에게도 남은 방법은 하나.
모두 포기하고 김수현을 최우선으로 확보한다. 협박이 안 된다면 적어도 죽이기라도 한다. 영혼을 붙잡아놓을 수만 있으면 시체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니 말이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당장 죽여어어어어어어!”
에르윈의 일대를 왕왕 울리자 단상에 서 있던 마족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수현을 억누르고 있던 마족이 곧장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당장에라고 내리칠 듯한 기세로 오른팔을 하늘 높이 들었을 때였다.
휘리리릭!
막 손으로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찰나, 쏜살같이 단검 한 자루가 되려 목을 관통했다. 그 순간 잠깐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이 꿋꿋이 손을 내리치려는 찰나!
푹!
“키에에엑!”
곧바로 짓쳐 든 검붉은 화살이 관자놀이까지 꿰뚫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진다. 그 단상 아래에는 우정민과 선유운이 각각 무언가를 투척한 자세로 멈춰서 있다. 저들이 방금 처형당할 뻔한 김수현을 구했다는 사실은 안 봐도 알 수 있을 터.
은혜는 바다같이, 복수는 칼날같이.
두 사내는 가장 중요한 때, 마침내 김수현에게 진 목숨 빚을 갚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이 왔다고 하나 저 정도 높이에 있는 마족의 저격에 성공했다는 건 거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허나 위기는 이제 겨우 한 번 넘겼을 뿐이다. 피조물의 처지에서 조물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본능적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행동한다.
저격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이내 단상의 마족 전원이 삽시간에 김수현을 에워싸 모조리 달려들었다. 아무리 우정민과 선유운의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서른이 넘는 마족을 동시에 쓰러트리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대로라면 김수현의 죽음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
그때.
웅웅웅웅!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김수현과 한소영을 중심으로 희뿌연 막이 둥글게 솟아올랐다.
“되비침!”
백한결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낸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보호막이 말간 빛을 뿜는 것과 마족들이 막에 충돌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크으으윽!”
황급히 단상으로 돌아가던 에르윈은 달려든 마족들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거나 단상 아래로 추락하자 괴성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두 번의 살해 시도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상대와 단상의 거리는 이백 미터, 아니 일백 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결국, 이제는 이판사판 공사판이었다.
“전군…!”
이를 갈던 에르윈이 무어라 외치자마자 전장으로 나갔던 마족들이 일제히 등을 돌렸다. 놀랍게도 전원 전장을 포기하고 김수현 하나에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날개가 있는 마족들의 이동 속도는 인간보다 몇 배는 빠르다. 그런 만큼 후방에 있던 마족들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목적지 인근으로 도착해, 일부는 땅으로 나머지는 단상으로 한꺼번에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에르윈은 알고 있었을까. 전장을 버리고 단상으로 모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최악의 한 수였음을. 하기야 수나가 출현한 후 승산은 없어졌고, 또 그만큼 상황이 급하기도 했다. 발 빠르게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김수현 하나에 집중한다는 선택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주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봤다면.
그랬다면, 그와 같은 명령은 내리지 않았을 텐데.
왜냐면.
“뭐, 뭐야 저것들은 또?”
한 박자 늦게 따라붙은 수나가 눈이 벌게진 채 공중으로 무섭게 날아오는 중이었으니.
안 그래도 곧 아빠를 본다는, 아니 구한다는 생각에 몸이 달아오르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한데 갑자기 웬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전방을 빽빽하게 물들이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이이이익!”
끝내 사랑스럽게도 분노를 터뜨리며 팔을 앞으로 뻗는다. 이윽고 조그마한 손바닥이 단상에 있는 김수현을 정확하게 향한다.
수나가 다루는 힘의 정체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특징지을 수 있는 건 있다.
그건 바로 어떤 소리도 소음도 나지 않는다는 것.
말인즉.
수나의 의지가 발동하는 동시에 전방의 일대가 온통 붉은빛으로 번쩍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