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2
00961 If You Change, One. =========================================================================
툭, 툭.
부스스스.
자리에서 일어서니 가루가 된 구속 장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기분이 아득하다. 꼭 꿈을 꾸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천천히 팔을 굽혔다가 쭉 펴본다. 회로의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흐르는 느낌이다. 되찾은 자유는 자못 생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와아아아아아아아!
전방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하나의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날 담담히 보고 있는 형.
하나같이 울고 웃는 머셔너리 클랜원들.
양팔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북 대륙 사용자들.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드는 영웅들의 영혼들.
허공에서 날 흘깃거리는 괴조 우두머리.
그리고 게헨나….
…그래.
나는, 마침내 구출 받았다.
최후의 순간, 하승우가 안솔로 변장해 사탄을 속인 건 나도 예상치 못한 속임수였다.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일을 형이, 아니 동료 전원이 힘을 합쳐 이루어냈다. 그 끈질기기 짝이 없던 악마의 방해를 모조리 격파하고 끝끝내 나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기대에 보답할 차례였다.
화르르르!
염화 능력을 사용하자 시야로 맑은 불꽃이 타오른다. 게헨나가 있으니 목숨 걱정은 없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발동한 건 아니다.
예전에 이 능력이 개화됐을 때 화정은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됐다.
나는 화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서로 계약을 맺은 관계에 불과하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화정이 마음만 먹으면 힘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염화 능력만큼은 다르다. 내 사용자 정보 내 잠재 능력 슬롯에 등록이 된 이상 이것만큼은 내 의지로 발동 여부를 정할 수 있다.
말인즉 염화 능력을 발동한 이유는 하나. 타나토스 조각의 각인으로 모종의 제재를 받고 있는 화정을 사용자 설정으로 다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마력이 돌아온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다.
– 푸하! 푸하아아! 아이고! 아이고 죽겠다!
그러자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가슴이 화끈해지는 동시에 콜록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히 울렸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리운 음성이었다.
‘화정?’
– 후아, 드디어…. 응? 김수현?
‘화정!’
– 김수현! 너…!
화정치고는 격한 호응이다. 아마 화정도 나를 간절히 그렸음이 분명하리라.
– 이놈의 자식!
‘그래…. 어, 어?’
–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너 갇혀 있는 동안 뭐라 그랬어? 뭐? 타나토스의 봉인을 왜 해제했냐고? 나더러 미친 거 아니냐고? 실망했다고?
‘자, 잠깐만.’
– 바보 아냐? 너 살리려 그랬다 왜!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오니까! 봐봐! 덕분에 이렇게 구출 받았잖아! 그런데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듣고 있었어?’
짹짹짹짹짹짹짹짹! 화정이 그렇다는 듯 한층 소리 높여 무섭게 지저귄다. 타나토스의 조각에 강제로 억눌려 있는 동안 못했던 말을 전부 쏟아내려는 감도 없잖아 있는 듯하다.
결국, 화정이 진정한 건 아직 전쟁 도중이고 일단 복수부터 하자는 내 말에 동의했을 때였다.
문득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기대한 것처럼 감동적인 재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나았다. 평소와 같은 정상적인 반응이었으니까. 화정까지 되찾은 이상 이제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우선….
“아!”
왼손으로 상대의 팔을 잡고 화정의 기운을 흘려 넣자 한소영이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구속 장치를 깡그리 태워버렸으니 아까의 나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화정의 기운을 힘껏 방출했다.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맑은 불길은 살금살금 멀어지는 늙은 노인의 등을 직격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전신이 불에 휩싸인다.
“끄으으으!”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참는 건 칭찬해 줄만 하지만, 그뿐이다. 염화 능력을 발동했을 때부터 멜리너스, 아니 벨리알 따위 애초 상대도 되지 않는다.
이윽고 멜리너스가 찍소리도 못하고 한 줌의 재로 화했을 즈음, 불현듯 멍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안현과 진수현이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다기보다는 고맙다는 쪽에 무게가 쏠린 표시였다.
잠시 후.
“형….”
“형님….”
둘은 동시에 눈을 치뜨더니 서로 껴안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부끄러움은 내 몫이잖아.
“어? 뭐야. 벌써 구했어?”
그때 가는 톤의 음성이 머리 위로 흘렀다. 흘끗 눈을 드니 아니나 다를까. 수나가 허공에 둥둥 뜬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쪽 눈이 살짝 치켜 떠져 있다.
“나 참. 기껏 청소하고 왔더니만….”
약간 아쉽다는 어조라면 내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공중을 빽빽하게 메우던 마족 군단이 어느새 말끔하게 사라졌다. 누가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뉘 집 딸이길래 이렇게 청소도 잘하는지.
“수나야.”
이리오라는 뜻으로 양팔을 살며시 벌리니 수나의 입이 헤 벌어진다. 이어서 방실방실 해맑게도 웃으며 똑같이 팔을 벌리는 찰나.
“빠빠…. 아차!”
갑자기 정색하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멈칫한 양팔은 순간적으로 팔짱을 낀다. 솔직히 자연스럽다고는 못 해주겠다.
“뭐, 뭐 하는 거야? 다, 다 보고 있는데 나, 남사스럽게. 망측하잖아!”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괜히 신경질을 부리는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재회의 기쁨은 나중에 나눠도 충분할 테니.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 발을 내디디며 옆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여인의 정수리를 짚었다.
“아….”
우물쭈물하던 안솔이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이제는 정말 안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지금이야 예전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나….
‘사용자….’
‘…김수현!’
연한 초록빛이 스쳤던 눈동자. 등에 있었던 일렁거리는 날개.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아니라 사용자 김수현이라고 불렀다. 날 구했을 때의 안솔은 안솔이 아니라 분명히 세라프였다.
당최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중에 얘기하자.”
안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이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거리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쿵!
높이가 높이여서 그런지 땅에 착지하는 소리가 거대하다. 하지만 힘이 돌아온 이상 이 정도는 가뿐하다. 전장의 시선이 모조리 쏠리는 가운데 나는 풀썩 일어난 흙 연기를 헤치며 천천히 걸었다.
기실 전쟁 자체는 이미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수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적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내가 풀려난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하기야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하던 마족 군단이 전멸했으니 눈이 있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어도 승리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야만 한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나 악마나 서로 너무나 오랫동안 귀찮게 굴었다. 그러니 내 손으로 직접 끊어야 한다. 일 회차 때부터 이어져 온 십오 년간의 악연을.
“김수혀어어어어언!”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 나를 향해 질풍처럼 치고 들어온다. 뜻밖에도 아직 전의를 불태우는 이는 타나토스도 악마도 아니었다. 전신으로 어둠의 기운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여인은 바로 엘도라였다.
“잘도 멜리너스르으으을!”
아, 설마 단상에서 벨리알을 살해한 것 때문에 그런가?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도라는 여기까지 이르렀음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동료가 오래전 악마에게 먹혔다는 사실조차도. 이쯤 되면 그냥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검을 뽑아 대응할까 하다가 순간 조용히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왜냐면.
“죽어어어, 어어…?”
인근까지 근접한 엘도라의 몸이 느닷없이 멈칫 정지했으니까. 정확히는 휘두른 엑스칼리버가 코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췄다.
“에, 엑스칼리버…?”
물론 엘도라 자의로 멈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기 자신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안간힘을 쓰며 팔을 움직이지만, 칼은 허공에 딱 붙은 듯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엑스칼리버는 스스로 엘도라의 손에서 휘둘러지기를 거부한 셈이다. 엘도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진다.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 왜? 어째서…!”
약속의 신전에 갇혔을 때 찾아온 엘도라는 그랬다. 엑스칼리버에 무슨 짓을 했느냐고. 왜 자기를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냐고. 그러다 결국에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 당시에는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염화 능력으로 온몸의 감각이 극한을 넘어서는 지금은 칼의 감정이 더없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마 내가 엘도라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엑스칼리버는 주인의 생존 사실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엘도라는 타나토스의 조각을 받아들여 부활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 당시 엑스칼리버는 날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칼의 처지에서 보면 난 강제로 빼앗은 강탈자였고, 또 주인을 그리는 마음도 남아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온갖 능욕을 견디며 그토록 그리던 주인과 다시 만난 지금, 엑스칼리버는 몹시 슬퍼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엘도라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타나토스는 그 사악했던 고대 악신을 수하로 둘 정도의 악 성향을 대표하는 신이다. 나처럼 상반 속성을 품고 있다면 모를까. 조각 하나를 통째로 받아들였으니 성향이 뒤바뀌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즉 엘도라는 타나토스의 힘에 되살아난 시점부터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엘도라의 타락을 직접 확인한 만큼 이제 나한테도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생기지 않았을까.
“엑스칼리버어어어!”
흡사 절규하듯 부르짖은 엘도라가 증오에 찬 눈동자로 날 노려본다.
될지 안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천천히,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우웅우웅, 희미한 검음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와라.”
그리고.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나직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띠링!
『정상(頂上)의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갑자기 메시지 하나가 출력되는 동시에.
화아아악!
엑스칼리버의 검신이 휘황찬란한 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