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66
00965 If You Change, One. =========================================================================
전쟁은 끝났다.
아니. 이로써 홀 플레인에서 십오 년 동안 했던 사용자 활동의 끝자락에 겨우 한 발을 걸쳤다고 해야 하나.
중요한 건 아직 마침표 혹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보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여러 생각이 동시에 뇌리를 스쳤으나, 우선 전장을 확실하게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마족 군단은 수나가 말끔히 정리했고, 서, 남 대륙 사용자는 내가 직접 처리했다.
그것보다는 난 대 악마의 잔재를 살피는데 주력했다. 리리스, 사탄, 아스타로트의 소멸을 거듭 확인하는 한편, 보이지 않는 아스모데우스의 행방도 확인했다. 알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는 수나가 공중을 청소하면서 딸려 들어갔더라.
엘도라는 어느새 울부짖던걸 멈추고 조용해져 있었다. 쓰러져 혼절한걸 보고 목을 벨까 하다가 일단 포로로 데려가기로 했다. 어디서 한 번 부활했다는 말을 들었는지 비비앙이 연구용으로 사용해보고 싶다고 간곡히 요청했기 때문이다.
기실 타나토스가 소멸한 이상 죽음의 조각으로 생명을 잇던 엘도라는 곧 죽는다고 봐야 옳다. 하지만 그냥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어쨌든 시신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어서 타나토스 소멸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영혼 군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그들과 용이 잠든 산맥에서 맺었던 약속이 기억났으니.
가벼운 인사와 구출 협조에 관해 감사 인사를 하고 나서, 난 헬레나에 관해 알고 있는 대로 설명했다. 최후의 전쟁이 끝나고 마그나카르타가 어떤 저주를 내렸는지, 그리고 그때 헬레나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등등. 물론 용이 잠든 산맥 이후의 일도 잊지 않았다.
“흠…. 그랬던 것이군요. 그래서 헬레나가….”
일련의 설명을 끝내자 사내의 영혼은 심각한 얼굴빛으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후련하다기보다는 복잡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잠시 사내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혹시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대면시켜드릴 수도 있습니다.”
“예? 하지만 그때 소멸하셨다고….”
“완전한 소멸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는 존재의 힘을 회복하는 양분이 된 것이지요. 듣기로 지옥에서 마그나카르타와 같이 살아났다고 들었습니다.”
“지옥….”
순간적으로 사내의 낯에 갈등의 빛이 역력해졌다. 난 조용히 사내의 결정을 기다렸다. 정말로 원한다면 게헨나나 수나한테 부탁해 만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요.”
그러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뜻밖에도 사내는 단호히 거부했다.
“저주를 들은 당사자로서 느꼈을 갑갑함과 인간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전쟁에 승리해 기뻐했던 우리를 보며 들었을 복잡한 기분…. 그걸 이해 못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들리는 음성에는 여전히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마 저였다면 한 치의 가감 없이 사실을 밝혔을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동료 전원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방도를 강구했을 겁니다. 왜냐면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전우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사정이 어쨌든 헬레나의 독단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그러니 이해는 해도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졌다니 그 나름대로 속죄의 길이 될 수는 있겠지만요.”
“…….”
저렇게까지 말하니 차마 수나의 장난감으로 되살아났다는 말까지는 못하겠다. 쓰게 웃자 사내는 아차 하더니 멋쩍게 미소 지었다.
“아…. 뭐 저도 썩 호인은 아니라서요. 하하. 실망하셨지요?”
“아니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난 머리를 가로젓고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자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 들었으리라.
“그럼….”
“구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오히려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을 수 있어 기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그 순간 사내의 얼굴에 얼떨떨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말.”
약간은 서글프게 느껴지는 홀가분한 목소리.
“사실…. 수고했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부터요.”
그 순간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훌훌 털어낸 듯 보여 가만히 지켜봐야겠다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순간 햇살이 눈부시게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아!”
안솔의 탄성과 함께 사내의 영혼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흡사 물보라 흩어지듯 새하얀 입자 같은 것들이 분분히 흩날린다.
– 감사합니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반짝이는 빛 가루들이 천천히 한들거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이 세상에 얽매이던 것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 아마 원래 가야 할 곳으로 가는 것일 터.
“멋진 광경이네.”
옆에서 보고 있던 형이 홀연 중얼거렸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공감했다. 꼭 땅이 하늘로 눈을 내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좋은 곳으로…. 가셨겠죠…?”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던 안솔도 살짝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대답 대신 안솔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렇게 온 세상이 빛으로 반짝거리는 속에서,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형은 한결 개운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그래.”
난 꽉 쥐고 있던 제로 코드를 의미 없이 던졌다가 세게 잡아챘다. 그리고 말했다.
“돌아가자.”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으니까. 하기야 이 정도의 힘을 얻었으니 굳이 거리낄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서도.
난 약속의 신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우선은, 나도 돌아가자.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
돌아가는 길은 일 분. 아니, 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근원이 활성화한 워프 게이트가 남아 있어서, 포탈을 나오자마자 그리고 그리던 아틀란타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북적거리는 워프 게이트도, 사람 냄새 나는 거리도,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하얀 신전도, 그리고 머셔너리 캐슬도.
그렇게 도시를 보자마자 갑자기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긴장이 풀리니 그동안 억눌려 있던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거두절미하고 당장 뭘 해야 할지 딱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러나 지친 이는 가로되, 난 일단 쉬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딱히 죽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붙잡혀 있는 동안 체력이 소모됐고 이후 바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의 힘을 가졌다고 하나 사용하는 몸이 인간인 이상 휴식이 필요한 법이니까.
사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장본인으로서 약간 무책임한 감도 없잖아 느꼈으나, 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내 요청을 이해해줬다. 하고 싶은 말이나 듣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한 걸음 물러난다는 분위기였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쉬고 몸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하여 머셔너리 캐슬로 직행한 후, 난 오랜만에 보는 집무실을 감상할 틈도 없이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똑똑.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흘깃 눈을 떴을 때.
“…….”
주변의 풍경은 고요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똑똑.
마침 또 한 번 소리가 들렸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이 노크 소리였다.
단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자세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미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멍하니 문을 응시하다가 물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에 힘을 줬다. 그러자 비로소 침대의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는 동시에 머리에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가물가물하던 시야도 한층 초점이 잡혔다. 서서히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다.
내가 돌아왔을 때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다. 아마 정오 즈음이라 가정하면 못해도 어림잡아 한나절, 아니 그 두 배는 잠들었다는 소리다. 그럼 아마 밤을 지나 새벽일 가능성이 높다.
똑똑.
좋아. 수면도 충분히 취했고. 이 야심한 새벽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들어오라고 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에 딱 붙은 몸을 억지로 떼어낸 순간이었다.
달칵.
문득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놀라 눈을 돌리자 흰 가운을 입은 어두운 그림자가 살그머니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시야는 어렴풋했으나 긴 생머리를 보아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깼다는 걸 모르는 걸까. 여인은 발소리를 한껏 죽인 채 거침없이 가까워져 왔다. 방금 목욕을 했는지 뜨끈뜨끈한 공기와 향기로운 살 내음이 물씬 흐른다.
그때였다.
“머셔너리 로드…?”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작품 후기 ============================
사실 김수현의 얼굴은 완성 직전 제가 수정을 요청했습니다.
원래 버전은 음영이 강하고 약간 화난 듯한 표정, 그리고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한데 제가 차가운 콘셉트를 주장해 얼굴 부분 수정을 요청했고, 그 결과 인상이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독자 분들의 반응을 보니 그냥 일러스트레이터 분이 원래 그려주셨던 대로 갈걸 하고 후회했네요. ^^;
아무튼, 에피소드 1도 이제 한 3, 4회 남았네요.
좀 더 힘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