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3
00972 Code Name, Zero. =========================================================================
예컨대.
예를 들어 영장을 받고 갓 입대한 신병 처지가 아니라, 이 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는 병장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즈음 흔히 하는 말 중 이런 말이 있다. 정말 힘들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얻은 것도 많다고.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럼 한 번 더 할래?’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백이면 백 ‘아니. 그건 싫어.’ 라고 말하더라.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사용자도 비슷하지 않을까.
햇수로는 15년.
일로는 5,475일.
시간으로는 131,400시간.
분으로는 7,884,000분.
초로는 473,040,000초.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숫자들이다. 물론 이 긴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좋은 시절도 있었고 행복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번을 고민해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면.
“세라프.”
애초 겪을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넌 알고 있잖아.”
시야는 여전히 고정돼 있다. 들다 만 시선은 상대의 인중쯤에서 멈췄다. 세라프의 입술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이것만큼은 형도, 아니 아무도 몰라. 하지만 넌, 너만큼은 알고 있잖아. 그 누구보다.”
날 계속 봐왔으니까. 무려 십오 년 동안이나.
“네가 얼마나 날 도와줬고 또 위해줬는지는 알고 있다. 나도 그 점은 부인하지 않을게.”
원래대로라면 현재의 세라프한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일 회차를 끝과 이 회차의 시작 사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날 구하러 왔을 때의 안솔을 보고 의심했고 오늘 이 자리에 와서 확신했다. 무엇보다 방금 세라프의 입술이 살짝 떼어졌다가 닫힌 게 그 방증이다.
“그래도 넌 알고 있으니까….”
차분히 숨을 들이켠다. 그리고 도로 내쉬는 것에 맞춰 멈췄던 시선을 올리는 동시에.
“내가 이러는 거…. 나쁜 거 아니지? 그렇지?”
갈고 갈았던 칼날을 밖으로 드러냈다.
그리하여 비로소 보게 된 세라프는 극도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날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저 얼굴은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일까. 그럼 답이 없는 건 할 말이 없는 건가. 아니면 또 감언이설을 준비하는 건가.
뭐 아무래도 좋다.
“Yes.”
…………아니.
“물론 이해합니다. 우리 천사는 종족의 안전을 위해 지구의 인간을 강제로 소환, 악마와의 전투에 대리로 내세웠습니다. 홀 플레인의 사용자들은 마땅히 누려야 할 생활을 박탈당했으며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라프?”
“그러므로 그 분노는 지극히 온당하며 합리적입니다. 또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막강한 무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습니다. 설령 천사 수만이 모여도 한 번의 손짓으로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
“너….”
죽은 듯 미동도 보이지 않던 심장이 조금씩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세라프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허나.”
혼란스러운 와중 세라프가 말을 반전한다. 복잡하던 사고 회로가 순간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렇지. 이래야지. 어떤 변명이 나올지 모르지만 한 번 들어줄 의향은 있다. 그래야 나도 미련을 깨끗이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이윽고 나직한 음성을 듣는 순간.
“현재 가브리엘 님을 포함한 천사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다는 점입니다.”
돌연 숨이 멎는 동시에 시간도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악마의 소멸을 확인했으니 천계에 보고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말끝을 흐리는 세라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작 그 이유로 대 천사를 포함해 칠 할에 가까운 수가 자리를 비웠다는 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용자 김수현을 두려워해 지레짐작으로 물러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을 위시한 천사 대부분이 발을 뺐다는 뜻인가? 세라프만 남겨두고?
“그럼 넌?”
“저는 애초 이 전쟁의 전권을 위임받은 처지였습니다. 이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고 홀 플레인의 일을 매듭지으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다. 그 당시는 막연히 제대로 도와주려는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라프의 말인즉 가브리엘은 그때부터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하, 하하. 애초 이럴 생각으로 전권을 넘긴 거였나? 미친. 정말이지 끝까지 정이 안 가는 놈들이잖아.”
“기껏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똑같이 소멸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돼버리니까요. 아마 그들 입장에서는 사용자 김수현을 상대로 승산 없는 전투를 하기보다 얌전히 도망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래. 지독하리만치 합리적이기는 하네. 그나저나 방금 그들이라고 말했나? 꼭 타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기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사용자 김수현의 책임도 없잖아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이 이어졌다. 연달아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는 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처럼 고저를 유지했다.
“물론 어느 순간 감히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격이 높아진 것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평소 천사를 적대하는 태도를 필요 이상으로 드러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적의를 표출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특히 악마 다음은 천사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적도 있다. 정말 천사를 없애고 싶으면 속으로 숨기라는 형의 말이 이제야 와 닿는 느낌이다.
“정말로 천사까지 소멸시키고 싶었다면….”
그때 심원한 한 쌍의 연녹색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조용히 말을 잇던 세라프는 날 보더니 주저하며 입을 닫는다. 난 그제야 정면으로 겨눴던 엑스칼리버의 칼끝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단지….
한동안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사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후 목을 가다듬은 세라프가 새로 입을 열었다.
“……?”
“사용자 김수현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제가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상황? 네가?”
“네. 지금쯤 천계로 들어간 천사들은 제 소멸을 예상하고 있을 터. 하지만 제가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의문을 표할 겁니다.”
“거기서 네가 적당히 구슬려 돌아오게 하고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건가?”
“다시 돌아올지는 미지수지만 우선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세라프는 천사들이 날 두려워해 미리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만 된다면 확실히 돌아올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계획의 성공 여부보다는 더 큰 의아함이 앞섰다. 사실상 세라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Yes.’ 라고 답했을 때부터 생긴 의문이었다.
“그 말은.”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엑스칼리버를 고쳐 잡고 다시 세라프를 겨냥한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하는 말인가?”
“확신…. 말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마. 제로 코드를 발동하려면 네가 필요하니까.”
“아닙니다.”
뜻밖에도 세라프는 즉답했다.
“제로 코드의 발동은 천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 그렇다고 치고. 생각해보니 제로 코드를 이용하면 되겠네. 걔들은 이건 생각하지 못한 건가?”
“제로 코드로 통하는 요청에 최대한 간섭하라는 지시도 당연히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 명을 따를 생각은 없지만, 혹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지금은 말리고 싶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이미 원하는 바를 이룰 힘은 충분하고도 넘치지 않습니까. 아까운 제로 코드를 급하게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인가.”
이상하다. 왜 자꾸만 이를 악물게 되는 걸까. 딱히 반박할 말을 못 찾겠다. 분명히 세라프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그리고 진심으로 날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확히는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모르겠어.”
“네?”
“정말 내가 아는 세라프가 맞기는 한 건가?”
“사용자 김수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너도 천사잖아.”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으나 세라프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저는 사용자 김수현의 도우미입니다.”
“헛소리하지 마. 왜? 왜지? 어째서 이렇게 발 벗고 도와주려는 거지?”
“그….”
그때였다.
“그, 그건.”
그 찰나의 순간.
이제껏 시종일관 담담함을 유지하던 세라프의 표정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곧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차이점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좀 전까지 자연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무언가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으니.
“왜, 왜냐면.”
이윽고 덜덜거리는 두 눈동자가 가까스로 날 응시한다.
“저는.”
이제는 숫제 목소리도 떨려 나오고 있었다.
“저는….”
============================ 작품 후기 ============================
아아아아아아아아. 화가 나고 속이 터집니다. 00시 01분부터 조아라 접속 시도만 수십 번을 했는데 참 접속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PC로 저만 접속이 안 됐던 건가요?
주소 창에 www.joara.com 치고 멍하니 화면 보기만 계~~~~속 반복. 앱 접속은 잘만 되던데 말이죠.
제 컴퓨터가 문제인지 서버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진짜 접속 시도 하다 하다 짜증나 죽겠어요. 좀 된다 싶으면 페이지 넘어가면서 멈추고 또 멈추고 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오늘 이벤트로 표지 교체하고 공지사항 교체하고 클릭할 곳도 많은데 정말 가는 날이 장날입니다. 디도스 개xx.
오랜만에 혈압 빵 터지네요. 조아라 분들 부디 악의 무리 디도스에 지지 말아주세요!
후우우우우우우우. 뭐 각설하고!
완결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가벼운 이벤트를 해보고자 합니다.
현재 김수현 & 화정 표지는 약간의 수정 작업에 들어간 상태인데요.
정말 감사하게도 일러스트레이터 분께서 완결 축전으로 SD 캐릭터를 하나 그려주셨습니다.
(표지, 공지사항, 뜰에 오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림을 보시면 캐릭터 아래 『?』는 사랑입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는 그려진 캐릭터의 이름이 있었는데 제가 요청해서 공란으로 변경했지요. ㅎㅎㅎㅎ
독자 분들께서는 그림을 보시고 연상되는 캐릭터를 코멘트로 적어주세요.
정답을 맞춘 분들 중 선착순 5명, 랜덤으로 5명을 뽑아서 각각 딱지 100장씩 보내드리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 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