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4
00973 Code Name, Zero. =========================================================================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조용한 밤이었다. 그러나 성의 정원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로 몹시 부산스러웠다.
임한나는 생환을 축하하는 겸사겸사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라고 했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지금껏 겪었던 축제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우리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중앙 관리 기구나 이스탄텔 로우, 해밀 클랜 등 몇몇 외부 인사도 참여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이 넓은 정원이 북적북적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혼란스럽다기보다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가 흐른다는 점은 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버님이 그 계획을 입안했을 때 딱 감이 오더라고요. 아, 이건 가능하다. 정말 될 수도 있겠구나.”
고연주는 중앙 탁자에 앉은 채 싱글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날 구출하려는 계획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걸리는 게 너무 많아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죠. 누구부터 살려야 할까. 과연 설득에 응해줄까. 그리고 무엇보다 GP는 충분할까 등등.”
“바로 거기서! 이 몸이 나섰다는 말씀이지!”
고연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유정이 으스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이유정은 날 구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원 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고연주, 남다은이 육억에 달하는 GP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소원으로 살릴 수 있는 사용자는 육백 명에 불과하다. 즉 약속의 신전 전쟁에서 사망했던 인원과 구 북 대륙 사용자 수천 명을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었다는 소리다.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은 게 바로 이유정이었다. 예전에 내 허락을 받고 GP를 사용했던 것처럼 ‘대리인’의 자격으로 북 대륙 사용자 전원의 GP를 끌어모은 것이다. 살려낸 사용자의 GP까지 포함해서.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요. 이번에 들으면 정확히 스무 번째예요.”
“뭐라고?”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계획을 보강한 건 언니지만 직접 행동한 건 우리잖아요. 한 명 한 명 붙잡고 상황 설명하는 게 얼마나….”
“…….”
김한별의 핀잔에 이유정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할 말은 없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고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방에서 한 명씩 공을 자랑하는 말에 적당히 대꾸하며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어차피 준비는 진작 끝난 상태였고 참가자와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 축제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안현과 진수현은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해 옷을 벗어젖히고 막춤을 추며 주변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신재룡과 신상용은 껄껄거리며 웃는 얼굴로 잔을 부딪쳤다.
우정민은 원혜수를 데리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며 같은 탁자의 선유운은 둘을 흘깃거리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허준영은 그런 선유운을 보며 웃었다가 선유운이 무심히 응시하자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비비앙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어달라며 정하연에게 그릇을 내밀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고 시무룩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마침 옆을 지나가는 백한결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백한결은 싫다고 대성통곡을 하며 도리질을 쳤으나 끝끝내 한 입 먹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비비앙이 입맛을 다시며 눈을 돌리자 근원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수나는 아기 페가수스의 꼬리를 잡고 쥐불놀이하듯 신 나게 돌리다가 아차 하며 놓치고 말았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달을 바라보며 홀로 우유를 홀짝이던 안솔은 갑자기 날아온 아기 페가수스에 직격당해 울음을 터뜨렸다.
게헨나와 한소영은 서로 대치하며 모종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윽고 게헨나는 아기 페가수스가 날아간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수나를 안아 올리며 거만하게 웃었다. 그러자 한소영은 침착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인근에서 유니콘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던 마르를 데려와 똑같이 안아 올렸다. 게헨나는 당황했고, 마르는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제갈 해솔은 두 여인의 기 싸움을 구경하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난 축제의 한복판에서 스리슬쩍 물러나 불붙인 연초를 물고 연기를 길게 흘렸다. 하늘은 짙은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아래 캠프파이어처럼 타오르는 거대한 모닥불의 그림자는 조용히 한들거린다.
이 한가롭고 일상적인 장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지루하네.”
말하고서도 아차 싶었다.
“뭐 확실히 그럴 수도.”
그때 등 뒤로 낮은 사내의 음성이 말을 건다.
“사람에 따라서 지루하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
익숙한 목소리라고 느끼는 동시에 어깨너머로 술잔이 불쑥 넘어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형임을 알 수 있어 가볍게 술잔을 낚아챘다. 이내 옆으로 살그머니 붙는 기척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게 네가 원하던 광경 아닌가.”
형의 말에 애꿎은 잔만 만지작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 회차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난 이런 미래를 그렸고 원했다. 그 누구도 죽지 않는,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세상. 신경 쓸 적이 사라진 평화로운 세상.
그래. 맞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형이 입을 열었다.
“허전해?”
“…별로?”
“아, 신전에 다녀왔다며?”
“다녀오기는 했지.”
“다녀오기는?”
“그냥…. 생각 좀 해본다고 했어.”
거짓말이다.
‘저는….’
그 말 이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세라프는 무언가 알아주기를 바라듯 절실히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고, 난 끝내 선택을 내리지 못해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라프는 그런 날 붙잡지 않았다. 결국에는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재로써는.
“생각이라…. 하기야 시간을 두고 정리하는 것도 괜찮지. 이제 거리낄 것도 없는데.”
“왠지 너무 속 편한 거 아니냐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설마. 그리고 속 편하게 지내면 좀 어때서? 네가 그런다고 해서 욕할 사람 여기 아무도 없다. 설령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런가.”
격려해주는 말을 들었음에도 공연한 덧없음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무거운 적막이 가라앉는다.
“그런데 말이다.”
형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화제를 돌리려는 듯싶다.
“예컨대, 그러니까 정말 만약에 말인데.”
“괜찮으니까 말해.”
“…천사를 정리하고 여기에 남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응?”
“사용자로서 계속 이렇게 지내지는 않을 거잖아?”
“아하,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하다고 말한 순간 형의 표정이 약간 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질문을 듣자마자 돌연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한없이 아스라하게 느껴지던 모호한 경관이 돌연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잖아?”
“해야 할 일? 여기서 더 할 게 있다고?”
“그럼. 많지. 우선 시간을 두고 좀 추슬렀다가 서, 남 대륙 잔당 놈들을 처리해야지. 여태껏 당한 게 있는데.”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 대륙과 동 대륙을 전초 기지로 삼아서 불모의 황야와 서리 협곡을 공략하는 거야. 그 두 곳은 나도 잘 모르는 곳이니 모험하는 맛도 있겠지. 지금 우리 수준이라면 충분히 공략하고도 남아.”
“그래?”
그 말을 끝으로 형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직된 얼굴로 술잔만 연거푸 들이키더니 쓰게 웃었다.
“너…. 이제야 웃네.”
“뭐?”
“좀 전까지는 되게 힘없어 보였거든.”
“…내가?”
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젖혀 술잔에 남은 액체를 깨끗이 비울 뿐. 난 멍하니 손을 올려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제야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야호! 여기 난봉꾼, 아니 왕 등장이요!”
발랄한 외침과 함께 형을 보던 시야가 확 기울었다. 갑작스럽게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자자! 그럼 이제부터 모두가 기다리던 왕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내 팔을 부여잡은 제갈 해솔이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며 쩌렁쩌렁하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어? 빼지 마요. 축제 주인공이 구석에 처박혀서 복학생처럼 쳐다보고만 있는 게 얼마나 궁상맞아 보이는지 알아요?”
“그, 그게 무슨.”
“자 그럼 저부터 질문 시작! 우리 클랜 로드는 이 자리에 있는 여인 중에서 누가 제일 이상형에 가까워요?”
그 순간 쉴 틈 없이 떠들썩하던 사방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형형한 눈초리가 쏟아지는 게 그 방증이다. 매우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난 황급히 눈을 돌렸다.
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또 여전히 씁쓸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느긋하게 술잔을 흔들더니 천천히 등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
“…….”
그런 형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많은 독자 분들이 이벤트에 응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_(__)_
원래는 선착순 5분, 랜덤으로 5분을 선발할 생각이었는데, 코멘트 숫자를 보고 선발 범위를 좀 더 넓히기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물론 첫 조건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우선 내용부터 올리고, 지금부터 바로 선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완료되는 즉시 후기로 업데이트할 테니, 차후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진도가 느리거나 세라프의 떡밥 회수를 걱정하는 독자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에피소드 0은 6회 ~ 10회 안으로 확실하게 끝나며, 그 안에 세라프의 떡밥 회수도 예정돼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느긋하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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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최대한 많은 분께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한계는 있더라고요. ^^;
당첨되신 분께는 축하를 드리며, 당첨되지 못하신 분께는 양해를 구합니다.
딱지는 현 시간부로 순서대로 지급하겠습니다.
항상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