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5
00974 Code Name, Zero. =========================================================================
강렬한 햇살이 눈을 두드렸다. 힘겹게 눈을 뜨자 가물가물한 시야로 낡은 천장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흔들거린다. 초점이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끙 몸을 일으키니 어지러운 현기증이 해일처럼 밀려온다. 죽겠다.
“…….”
헝클어진 머리카락, 창백한 얼굴, 시꺼멓게 죽은 눈동자…. 지저분한 수정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한없이 처량하기만 하다. 난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그냥 죽는다. 어젯밤 진짜 죽을 뻔했다.
속으로 오만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자 돌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깨셨네요.”
흰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나오는 여인은 바로 한소영이었다. 날 보더니 기분 좋게 웃으며 다가와 살며시 품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등을 상냥히 토닥토닥.
“어제 정말 고생했어요. 후후.”
속살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어젯밤 무자비한 카우걸(Cow Girl)로 변신했던 한소영이 떠올라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고 빠르게 선수를 쳤다.
“고생은요. 그럼 저도 얼른 씻고 나오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예. 돌아가기 전에 아침이라도 먹고 갈까요?”
“네. 좋아요.”
한소영은 예전이었다면 십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거렸다. 혹시 ‘그냥 돌아가기 아쉬우니 아침에 가볍게 한 판?’ 이라는 말을 들을세라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문 너머로 들리는 흥얼흥얼 한 콧노래에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여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내내 한소영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심지어 헤어질 때는 클랜 하우스까지 바래다줘서 고맙다며 진한 입맞춤까지 받을 수 있었다.
어제 만났을 때만 해도 행동 하나하나에 까닭 모를 짜증과 히스테릭이 묻어 있었는데, 하룻밤 새 태도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정도로 욕구가 심히 쌓여 있었다는 소리다.
머셔너리 캐슬로 가는 동안 계속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하기야 누구를 탓하랴. 다 내 입이 문제지.
사건은 일주일 전 축제의 현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갑자기 끌려가고 나서 ‘누가 제일 이상형이냐.’ 는 돌발 질문에 난 아무 생각 없이 ‘흠. 아마 임한나?’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질문이 공명의 함정, 아니 제갈 해솔의 덫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흥겹기 그지없던 축제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단박에 가라앉았으니까.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몹시 부끄러워하는 임한나를 제외한 여인 전원이 각자의 방식대로 유감없이 불만을 표출했으며, 결과적으로 축제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말았다. ‘클랜 로드가 축제를 망쳤다.’ 나 ‘클랜 로드가 잘못했다.’ 는 비난은 덤이라고 해야 하나.
그 다음 날, 난 고연주를 통해 ‘타도 왕 찌찌’라는 이상한 집단의 공식 성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려면 한 명 한 명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는 깜찍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별것 있겠냐는 생각에 시원하게 승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니 어느새 이 지경까지 오게 됐다.
아니. 백 번 양보해서 소원을 들어주는 것까지는 좋다. 실제로 첫 타자였던 수나와 온종일 놀아줬을 때는 이것도 꽤 괜찮다고 여겼으니까.
하루 동안 누나라고 부르라던 고연주의 부탁도 할만했고, 남다은의 ‘자기는 검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온 세상의 우러름을 받는 고결하고 강인한 여성 용사인데,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김수현이라는 마왕과의 결투에서 패배해 붙잡혀 온갖 능욕을 당해 끝끝내 타락하고 저속해진다.’ 는 상황극을 하자는 별 괴상한 부탁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문제는 게헨나와 화정이었다. 넷째 순번이었던 게헨나는 화정 앞으로 날 데리고 가 ‘화정은 너무 못생겼다.’ 라거나 ‘역시 화정 따위보다 게헨나가 훨씬 낫다.’ 등의 말을 하기를 요구했다.
그러자 다섯째 순번이었던 화정은 바로 다음 날 ‘한 번 도망쳤던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느냐.’ 와 ‘꼴도 보기 싫으니 얼른 지옥으로 썩 꺼져라.’ 라는 말을 소리 높여 하게 했다. 결국에는 둘이 머리끄덩이 잡고 대판 싸우더라.
거기다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 한소영과의 만남까지….
“하아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 몇 명 남았더라. 한소영까지 여섯 명은 끝났고. 난 품에서 고연주에게 받은 성명서를 꺼냈다. 어디 보자. 남은 인원이 이유정, 정하연, 김한별, 엑스칼리버…. 응? 아니 엑스칼리버는 또 뭐야. 이거 누가 적었어.
“오빠!”
그때였다. 눈을 비비고 재차 성명서를 확인할 무렵 고음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흘끗 눈을 들자 어느새 도착했는지 새하얀 성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정문에는 한껏 예쁘게 차려입은 이유정이 날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렇게 나와 있다는 건….
“이제 오네! 히히.”
“어, 뭐 그렇지.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럼~. 내 차례가 오는 걸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나 오늘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기다렸다?”
“하하.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지 마. 좀 쉬자고 말하면 상처받을 것 같잖아.
“그, 그렇구나. 그나저나 어떤 부탁을 하려고?”
하지만 약한 이는 가로되, 기대에 부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얼마 전 전군을 호령하며 벌판을 가로지르던 위엄은 어디 가고 이런 허약한 모습이라니. 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유정은 나는 듯 가까워졌다.
“이미 다 생각해놨지. 따라와.”
“어디 가려고?”
“아 일단 따라와 보라니까!”
“그러니까 어디 가는지 말 좀….”
이유정은 꼭 날 제 것처럼 잡아끌며 방방 뛰었다. 그리하여 질질 끌려가 워프 게이트로 이동한 도시는 구 북 대륙의 바바라였다. 이유정은 포탈을 나오자마자 팔짱을 끼며 걷자 더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걸음이 멈췄다.
“여기는…?”
최종적으로 도착한 장소는 뜻밖에도 시작의 여관이었다.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은 예비 사용자가 처음 홀 플레인에 발을 내디디는 곳.
“어디였더라…. 두 번째였나? 아, 저기다!”
이유정은 왼쪽에서 두 번째 건물로 걸어가더니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약한 탄성을 질렀다.
“여기는 예전 모습 그대로네.”
“여기 오고 싶었던 거야?”
“응? 으응. 그렇지 뭐.”
“왜?”
“그냥 한 번쯤 와보고 싶었어. 오빠랑 단둘이서.”
“…….”
이유정은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날 보며 싱긋 웃는다. 생각보다 건전한 부탁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여러모로 의외였다. 난 멀뚱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틀란타로 이전 작업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구 시작의 여관은 이유정의 말대로 예전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먼지가 켜켜이 쌓였다는 점만 빼면 오 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야, 감회가 새롭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난 그때 오빠가 진짜 죽은 줄 알았다니까?”
“맞아. 여기였어. 여기서 부러진 석궁을 봤다는 박동걸 새끼랑 엄청나게 싸웠어.”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 지금쯤 뭐 하고 지내려나? 살아는 있을까?”
그러는 동안 이유정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깔깔거렸다. 난 혼잣말하는 이유정을 한참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
“응?”
“혹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집? 지구?”
느닷없는 질문이었는지 회답은 한 박자 늦었다. 이유정은 난간 아래로 굽혔던 허리를 펴더니 붉은 머리카락 끝을 살그머니 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무래도 한 번쯤은?”
“한 번쯤?”
“응응. 오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정말 갑작스럽게 끌려온 처지잖아. 그러니까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또 친구도 보고 싶고. 여기서 계속 산다손 쳐도 한 번쯤은 마음의 정리를 하고 싶어.”
“꼭 지구보다는 홀 플레인에서 살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마도?”
“어째서?”
쉴 틈 없이 반문하자 이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말했다.
“지구에서의 삶에 적응할 자신이 없으니까.”
아까 한 번쯤이라는 말은 이런 의미였나. 이유정의 말은 상당히 모호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 돌아갈 기회가 생겨도 가지 않겠다는 뜻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당연히 돌아가지.”
“뭐? 방금은….”
“아니, 오빠. 잠깐만 기다려봐.”
그 순간이었다.
“꼭 그렇게 하나만 정해야 해?”
한 마디.
그 단순한 한 마디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우뚝 멈췄다.
멍하니 응시하자 이유정이 뭐 어려울 게 있느냐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계속 이야기해보라는 신호였다. 이유정은 내 옆으로 털썩 앉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 세상이 좋아. 지구에서는 살 자신이 없어. 하지만 한 번쯤 엄마 아빠는 보고 싶어.”
“…….”
“그 뭐냐. 거주민은 힘들어도 사용자는 왔다 갔다 하는데 제한이 없다며. 그럼 오빠 말대로 기회만 생긴다면 갔다가 돌아오면 되는 거잖아?”
“…….”
“사실 잘 모르겠어. 가서 살만하다고 생각되면 계속 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사용자 능력으로 돈이나 잔뜩 벌어서 효도해야지. 한 일이 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
“그 후? 엄마 아빠? 글쎄? 괴물이랑 싸우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홀 플레인의 나보다는 여경이라는 평범한 꿈을 향해 착실히 걸어가는 지구의 내가 더 낫지 않으려나?”
“…….”
거기까지 말한 이유정은 “아. 착실하다는 말은 취소.” 라고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난.
“…………어.”
문득 신기한 기분을 느꼈다.
이유정의 말은 분명히 쉽다. 흔한 수다라고 봐도 무방한 말이다. 될지 안 될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그동안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로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법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일말의 거부감 없이 공감한다.
실로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다. 그냥 타인의 생각이 궁금해서 던져본 말인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꼭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걷다가 먼빛으로 빛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날 꽁꽁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벗겨내 몸이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상념에 잠긴 와중에도 한 번 터진 이유정의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오빠오빠. 이 얘기하니까 갑자기 그때 생각난다. 예전에 그 뮬의 여관…. 어디였더라?”
“조신한 숙녀.”
“아 맞다. 혹시 그때 기억나? 아직 영 년 차 사용자일 때 오빠가 나한테 단검 하나 줬었잖아.”
“그렇지.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혼자서 이불 뒤집어쓰고 꽁해 있었지.”
“읔.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하지 마. 창피하니까. 아무튼, 아마 그때 이후로 조금씩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변했는데?”
물어보며 은근슬쩍 옆구리를 찌르자,
“생각해봐. 그 착하고 순종적이던 소녀가 오 년 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세상에 피에 젖은 미친년이라니…. 으히히힝!?”
“오호. 오늘따라 신음이 아주 간드러진데?”
“뭐, 뭐야! 놀랐잖아. 신나서 말하는 중인데.”
“그럼 한 번 더.”
이번에는 불시에 겨드랑이를 기습하자 이유정은 “히이이익!” 교성을 터뜨렸다. 이 귀여운 반응을 보니 불현듯 장난기가 일어 아예 작정하고 양손으로 간질이기 시작했다.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치는 이유정을 보며 난 껄껄 웃었다.
“적당히 좀 참아봐. 밖에서 누가 들으면 그거라도 하는 줄 알겠다.”
“흐앙, 흐아아앙! 나 간지럼 약하다고!”
“이야, 그 명성 높은 용병 여왕이라는 사용자가 이렇게 낯 뜨거운 신음을 흘리다니. 우리 클랜원, 특히 안현이 보면 아주 기절초풍 하겠어.”
“그, 그런 말 하지 마! 힉! 내가 오빠 앞에서만 이러지! 흐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는 줄 알아? …아 오빠! 갑자기 왜 이러는데!”
기특해서.
이 말은 속으로 꿀꺽 삼키고 일부러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왜. 좋으면서.”
그리고 그대로 이유정을 덮쳐 쓰러트렸다.
“응. 사실 좋기는 한데…. 꺅! 자, 잠깐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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