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6
00975 Code Name, Zero. =========================================================================
소환의 방은 엄밀히 말하면 홀 플레인과 서로 차원이 다른 일종의 독립 공간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전 내 포탈과 연결된 공간은 명목상으로 천사가 맡은 사용자를 다각도에서 보조해주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도우미로 선발된 천사는 항상, 온종일 소환의 방에 상주하며, 한 시도 쉬지 않고 담당 사용자를 관찰하고 있다. 온통 잿빛 일색인 공간에서 차가운 제단에 앉아 언제나 사용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소환의 방.
제단에서 일어선 세라프는 다소곳이 앞을 응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의 도우미를 맡은 세라프입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천사로서는 보기 드문 정중한 몸가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용자 김유현입니다.”
상대 또한 최소한의 격식은 갖춘 목소리였다. 김수현의 영향으로 평소 천사를 곱게 보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나름 의외의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호출을 받고 조금 놀랐습니다. 설마 수현이의 담당 천사가 절 먼저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이윽고 바닥에 앉은 김유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혹시 폐가 됐습니까?”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마침 호출해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먼저 요청했을 테니까요. 한 번쯤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저나 수현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변 여인이 기운을 북돋아 주려 여러모로 노력하는 모양이니까요. 고마운 일이지요. 아무튼, 여기에 신경을 쏟을 여력은 없을 겁니다.”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가는 것도 잠시. 세라프는 조심스레 제단에 앉았고 김유현은 자세를 고쳤다. 마주 보는 시선 사이로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는다.
먼저 말문을 연 건 김유현이었다.
“천사 세라프.”
“네.”
“제가 수현이 몰래 와달라는 당신의 호출에 응한 이유는…. 그리고 한 번쯤 보고 싶었다 말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
김유현이 천천히 깍지를 끼며 말을 잇는다.
“당신만큼 사용자 김수현을 잘 아는 존재가 없으니까요.”
그랬다.
‘사용자’로서의 김수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천사, 세라프.
‘인간’으로서의 김수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형, 김유현.
오늘 이 두 명이 만난 목적은 결코 가벼운 주제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둘에 한해서는.
“최근 수현이의 동향은 알고 계십니까?”
김유현의 물음에 세라프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뭐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겠군요.”
김유현의 말인즉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소리였다. 어차피 서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만큼 세라프도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묻지요. 가능합니까?”
그리고 시작된 밑도 끝도 없는 질문. 하지만 세라프의 표정은 차분했다.
“지구와 홀 플레인을 오고 갈 수 있는 통로의 개설 여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일단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한 조건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가능하다는 대답에 김유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단.”
그러나 세라프는 곧바로 모종의 반전을 예고했다.
“지구로 돌아간다는 선택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적절한 행동이 될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차원의, 문제?”
“그렇습니다. 최근 사용자 김수현의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음….”
김유현의 머리가 살짝 숙어졌다. 바닥을 향하는 시선이 잠시 상념에 잠긴 듯한 기색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얼마 전에 축제가 있었어요.”
약간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쟁도 이겼겠다, 정말 즐겁고 흥겨운 분위기였죠.”
그때를 회상하는지 김유현의 입에 쓴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거기서 수현이는….”
그때였다.
“근질근질하겠지요.”
갑자기 끼어든 세라프의 음성에 김유현의 말이 멈췄다.
“항상 악마를 없애야 한다는 관념에 강박적으로 시달려온 수현은…. 마침 신을 넘어서는 힘도 얻었겠다. 비로소 얻은 평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김유현의 머리가 휙 들리며 입이 반쯤 벌어졌다.
“……!”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만 뻐끔거린다. 왜냐면 차마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했으니까. 그 당시 한 발 뒤로 물러나 조용히 축제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던 동생의 모습을.
그런 김수현이 즐거워할 때도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천사를 처리하고 잔당을 깡그리 쓸어버리겠다고 말하면서 김수현은 분명히 웃었다.
그때.
“이제부터 보여드릴 것은.”
문득 김유현의 눈앞으로 여러 개의 메시지가 출력됐다. 허공을 채우는 메시지를 보는 김유현의 얼굴이 순간 멍해졌다. 마치 믿을 수 없는걸 본 사람처럼 얼굴이 떨리기 시작한다.
1. 이름(Name) : 김수현(8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Us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아틀란타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1. 사이코 패스 2. 광인(狂人) 3. 정신 분열증 4. 에로토포노필리아(Erotophonophilia)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1)
7. 신장 · 체중 : 181.5cm • 63.2kg
8. 성향 : 혼돈 • 악(Chaos • Devil)
“이건….”
“팔 년 차. 일 회차 시절 가장 심했을 때….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사용자 김수현의 정신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을 때의 사용자 정보입니다.”
세라프는 한결 침착히 말을 이었다.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또 채찍질하고, 그렇게 계속…. 스스로 부여한 중압감에 쫓기듯이 살아온 만큼, 본능이 타성에 젖어 물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십오 년 동안 수현을 지탱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적이라는 존재였습니다.”
세라프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시궁창을 뒹굴고 뒹굴면서 그토록 악마를 증오하며 절규했던 사내를.
그 사내가 오매불망 원했던 건 단 하나에 불과했다. 오직 살고 싶었고,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이미 딱딱히 굳어버린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전장’이라는 곳을 제외하면 몸을 둘 곳이 사라져버렸다….
“악마라는 거대한 적은 이미 소멸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천사는 물론, 서 대륙과 남 대륙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을 거치고 거치고 거쳐서, 끝내 수현의 앞에 무엇도 남지 않게 되면….”
거기까지 말한 세라프의 눈은 서서히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저는, 그 이후의 일이 두려운 겁니다.”
안타까워하는 빛을 드러내며 서글프게 감겼다.
“그러니…. 까.”
그리고 일련의 말을 듣던 김유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은….”
“이번에는 제가 사용자 김유현에게 묻겠습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띄엄띄엄 말하는 김유현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세라프가 말을 받는다.
“지구의 인간 김수현은 홀 플레인의 사용자 김수현을 감당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김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기실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벌레 하나 죽이는 것도 주저하던 동생이다. 한데 살육에 길들여진 사용자 김수현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감당한다?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두 존재의 괴리감에 미쳐 자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김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고 말았다.
실로 얄궂은 일이었다. 마침내 원했던 바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이 돌아갈 장소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단지 결과에 이르는 시간 차이만이 있을 뿐, 인간을 선택하든 사용자를 선택하든 종착역은 동일하다.
잠시 후, 김유현은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그나마 나은 건 사용자….”
하, 덧없는 한탄이 새나왔다.
“결국, 수현이가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제 욕심이었다는 거군요….”
흡사 포기하는 듯한 목소리.
그 순간이었다.
“실은 그 부분에 관해서입니다만.”
돌연 세라프의 음성이 한층 강해졌다. 고요한 소리가 공간을 왕왕 울릴 정도였다.
“저조차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뭐라고요?”
김유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흡사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상대를 유심히 살폈으나, 세라프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이 방법을 실행하려면 사용자 김유현의 협조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이게 제가 오늘 당신을 호출한 이유입니다.”
“제 협조가 말입니까?”
“Yes. 왜냐면 사용자 김유현 또한 제로 코드를 계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김수현은 분명히 김유현은 제 이 계승권 자로 설정한 전력이 있다.
“그렇기는 한데….”
김유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세라프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길었던 이야기가 끝난 순간.
“…그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김유현의 어조는 자못 심각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