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7
00976 Code Name, Zero. =========================================================================
밤이 깊어서인지 방 안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거리자, 문득 내 쪽으로 돌아누운 채 조용히 눈 감고 있는 게헨나가 밟혔다.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살금살금 접근해 품에 코를 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살을 스치는 찹찹한 새벽 공기가 아니라, 따뜻한 살 내음이 콧속을 물씬 찌르고 들어온다.
뻣뻣하던 몸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에 기분도 절로 느슨해졌다. 하여 숫제 말랑한 젖무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얼굴을 문지르자, 돌연 부드럽게 안아주는 감촉이 전해졌다.
게헨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려 있다. 한 손으로는 내 머리를 살며시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내 등을 한없이 쓰다듬는다. 어쩔 줄 몰라 우는 아이를 달래듯 끊임없이, 끊임없이….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평안 속에서, 난 본능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문득 피식거리는 싱거운 콧소리가 들린다.
“오늘따라 꽤 칭얼거리는구나.”
“…응?”
“수나도 하지 않던 짓이건만, 그대는 무에 그리 못마땅해서 이리도 보챌까. 설마, 잠들기가 두렵다거나?”
“…….”
약간 놀리는 어조. 글쎄. 근래 들어 악몽을 꾸는 빈도가 잦아지기는 했다. 가끔 아는 얼굴도 나오지만 대부분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들이 퍽 그로테스크한 몰골로 출몰하더라.
하지만 두려우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하겠다. 이 회차를 시작하고 좀 잦아들었을 뿐,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니고 예전에는 흔하게 겪었던 일이다. 고작 꿈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무튼, 적당히 간질이고 어서 자거라. 답지 않게 구는 짓은 그만하고.”
“…나다운 게 뭔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반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뚝 멎었다. 잠잠함은 잠깐, 곧 나직이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
“그래….”
“또 침묵하는 건가. 그대여.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게냐? 그럼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다만.”
“그때 왜 몰래 도망갔어?”
“으, 응? 갑자기 무슨. 사, 사과하지 않았느냐.”
“뭐 그러기는 했지.”
그냥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픈 곳을 찔렀을 뿐. 정말 탓할 생각은 없었다.
“…….”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슬슬 밝힐 때도 됐으니까. 오직 게헨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물론 이대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이유정의 말대로 일이 년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여기 남는 이들에게 왜 떠나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시켜야 한다. 설령 회귀의 비밀을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 와서 숨겨봤자 딱히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 아직도 망설임이 남아 있다는 방증이겠지.
아아, 의미 없다. 시간은 하루하루 의미 없이 흘러가는데, 난 아직도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말하는 것도 문제네. 혹시 형한테 부탁하면 나 대신 알아서 잘 말해주지 않으려나. 한 번 부탁이라도 해볼까?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속으로 웃고 말았다. 모르겠다. 이대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생각도 정리되고 결심도 서겠지. 그저 한 시라도 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 지금은 그냥 편안해지고 싶다.
자는 게냐….
꿈결처럼 들리는 게헨나의 목소리를 반주 삼아 서서히 눈을 감는다.
이제 좀 잠이 오는 것 같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뒤척대던 김수현이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하자, 게헨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하더니 혹여 깰세라 조심스레 침대에서 멀어진다. 최대한 소리 죽여 방문을 열자 거무스름한 인영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게헨나는 빙긋 웃었다.
“가자. 어서 안내하거라.”
잠시 후, 두 남녀는 어둠을 틈타 조용히 머셔너리 캐슬을 빠져나갔다. 워프 게이트로 이동해 포탈을 넘어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구 북 대륙의 소 도시 모니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 머셔너리 클랜의 거점으로 사용되던 클랜 하우스였다.
“이제 오신 것 같아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꾸벅꾸벅 고개를 꺼트리던 수나를 안고 있던 임한나가 눈을 돌렸다. 라이트 스톤이 밝혀주는 사 층 회의실에는 이미 쉰 명 남짓한 인원이 들어앉은 상태였다. 머셔너리 클랜원은 물론, 평소 김수현과 가깝게 지내는 이는 전부 모였다고 봐도 무방할 터.
“왜 이렇게 늦었지?”
마침내 게헨나가 안으로 들어오자 화정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게헨나는 무시하고 회의실을 가로질러 적당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발끈한 화정이 붉어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늦었냐니까?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시끄럽구나. 소리 지르지 마라.”
게헨나는 눈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뭘 시시콜콜 캐묻고 그러느냐. 귀찮게. 이 야심한 밤에 남녀가 한 방에 있었으면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되지.”
그 순간 수십 쌍의 눈초리가 일제히 게헨나를 향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게헨나는 킥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다, 농담. 오늘따라 그이의 칭얼거림이 심하더군. 재우느라 애 좀 먹었다. 이해해다오.”
“물론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 밤은 길게 남았으니까요.”
그때 잔잔한 음성이 후끈해지려는 회의실을 차갑게 식혔다. 그러자 게헨나에게 모였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김유현이 상석에 앉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 손은 탁상에 얹어 놔둔 채로. 이내 살며시 말아 쥔 손 틈에서는 미미한 빛줄기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게헨나가 흘러나오는 빛을 보고 이채를 띠는 동안, 김유현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 갑작스러운 요청에 협조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에도 태클은 화정의 몫이었다.
“시간은 상관없지만, 어째서 김수현 몰래 모여야 하는 건데? 뭐 켕기는 게 있다는 거 아니야?”
이어지는 말에 다수가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김유현은 조금도 불쾌해 하지 않고 침착히 말을 이었다.
“저도 이 방법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총 세 가지입니다.”
그리고 팔걸이에 얹었던 왼손을 들어 엄지와 소지를 접는다.
“일단 첫 번째. 오늘 드리게 될 말씀은 사실 전적으로 제 생각이 아닙니다. 수현이의 도우미를 맡은 천사 세라프에게서 비롯된 생각이며, 저는 긴 고심 끝에 그녀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말인즉 이 자리는 김유현뿐만이 아니라 세라프의 의지도 섞여 있다는 소리였다.
“두 번째는 수현이의 방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지요. 처음에는 시간을 두고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이 상황이 길어져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 여러분을 호출하게 됐습니다.”
몇몇 여인의 낯빛이 심각해졌다. 기실 최근 김수현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건 여기 있는 전원이 동의하는 바였다. 무언가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의 주도적으로 움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있다. 흡사 언제라도 사라져버릴 사람처럼, 혹은 꺼지기 일보 직전의 촛불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형으로서, 친동생인 수현이를 위해서라고 하겠습니다.”
김수현을 위한다. 짧지만 사실상 가장 설득력 있는 한 마디였다. 설령 여기서 김유현이 ‘김수현을 죽이자.’ 라는 발언을 한다고 해도 농담이라 여기며 웃고 넘길 것이다. 왜냐면 상석의 사내가 평소 동생을 얼마나 위하는지, 어지간한 사용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생을 위하는 마음을 알기에.
김수현한테 알리지 말라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기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통해 그대가 얻으려는 건 무엇이지?”
게헨나가 손등에 턱을 괴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건 수현이에 관한 여러분의 이해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김유현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어색한 흐름을 전환하고 싶었는지 불현듯 진수현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러니까 뭔데요. 뭐길래 이렇게 무게를 잡아요? …아, 혹시 형이 미래에서 온 사나이라던가?”
“야 인마.”
옆에 앉아 있던 안현이 분위기 파악 좀 하라는 듯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진수현은 낄낄 웃었다.
“아 왜. 만화에서는 자주 나온다고.”
그때였다.
“그래, 맞다.”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진수현의 웃음이 뚝 멎었다. 화정의 눈이 가늘어졌고, 한소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수현이는 미래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시간을 돌렸다. 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 전체의 시간을. 말인즉 우리는 사실상 두 번째로 이 세상을 겪는 셈이지.”
김유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비단 진수현뿐만이 아니라, 회의실에 있는 모두가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두 여인만 제외하고.
“뭐야…. 그, 그게 뭐예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진수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김유현은 씁쓸히 웃으며 탁상에 얹어놨던 손을 활짝 펼쳤다.
“그렇게 말하니까 꼭 진짜 같잖아…. …요?”
그 결과 가까스로 꺼낸 말은 끝에 가서 갑작스레 높아졌고,
“무…!”
“…아?”
곳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졌다.
손바닥 아래에는 푸른 불을 품은 작달막한 수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진실의 수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예전에 3회차는 없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무한 루프를 걱정하시는 독자 분들이 계시는 것 같군요.
정말이지 독자님들은….
…………………….
진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실은 저는 독자 분들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감히 곧 완결이 난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완결은 무슨, 사실 여기까지는 프롤로그에 불과합니다.
우선 김수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제로 코드를 이용해 지구로 이어지는 통로를 개설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종의 문제가 생기고, 결과적으로 지구 곳곳에 차원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수한 괴물이 쏟아집니다. 처음에 지구는 혼란에 빠지지만, 곧 차원 괴물에 세상에 엄청엄청 도움되는 물질이 있다고 밟혀집니다. 즉 대 레이드 시대가 도래하게 되죠. 거기서 김수현과 동료들은 사용자 능력을 발휘해 엄청난 부를 쌓게 됩니다. 우선 여기까지가 1부.
거기서 끝이 아니죠. 갑자기 핵전쟁이 터집니다. 그 결과 세상 곳곳에서 좀비가 창궐합니다. 갑자기 맞이하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속에서, 김수현은 극한 서바이벌을 거치며 좀비 숙주를 파괴합니다. 여기까지가 2부.
그러나 지구가 안정되자마자 외계인이 침공을 해옵니다. 김수현은 지구의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아 외계 전력을 맞서고, 지구를 지켜내는데 엄청난 공을 세웁니다. 그렇게 지구에 군림하게 되죠. 여기까지가 3부.
그리고 비로소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게 되나, 돌아간 세상은 멸망해 있었습니다. 김수현은 살아 남은 동료들과 재회하고, 세상을 이렇게 만든 적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신을 죽이고 스스로 신이 되기에 이릅니다. 여기까지가 4부.
여기서 끝이냐? 아니죠. 신이 된 김수현은 엄청난 무료함을 느끼죠. 그래서 우주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무수한 외계 종족과 싸우는 건 물론, 다른 은하도 정복하고, 중간중간 천계와 대계라는 곳도 보게 되죠. 최종적으로 우주의 신과 싸워 이겨 전 우주를 평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들과 평생을 행복하게 산답니다. 이 5부가 바로 진정한 최종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예상컨대 9123478917329081회쯤에 완결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일 연재를 한다고 가정하고 제 평균 수명을 100년 정도로 해서 계산하면, 249958326502번 인간으로 환생하면 완결이 가능할 것 같네요. 그때까지 부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_(__)_
…………………….
…설마 진짜로 믿으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
아무튼, 드리고 싶은 말씀은, 완결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