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79
00978 Code Name, Zero. =========================================================================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서 넘어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날은 아직 밝았으나 황혼이 깔릴락 말락 하며 제 자리를 찾는 걸 보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 늦게 잠든 감은 있지만 참 오래도 잤다.
옆구리가 휑한 게 게헨나는 벌써 일어난 건가. 아마 잠꾸러기라고 한 마디하고 나갔겠지. 일어날 때 같이 깨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창문에 빗물 자국이 선명하다. 눈 부신 햇살을 분사하는 물 흔적을 한동안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또 뭘 할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질문이다. 내가, 이 내가 오늘은 뭘 할지 걱정하고 있다니.
예전에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해본 기억조차 없다. 이루고자 했던 게 남은 이상 난 언제나 목표에 매진해 달렸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만큼 충분히 벅차고 힘겨운 삶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사라진 지금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는 자못 낯설게 느껴졌다.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대로 사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적이 없는 세상에서 아무 걱정 없이 일상을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 근 한 달 동안의 생활을 돌이켜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점이, 아니 좋은 점만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게헨나가 날 보며 아름답게 웃어준다. 식당으로 내려가면 화정이 밤에 뭘 했느냐며 입술을 삐죽거린다. 두 여인이 싸우기 시작하면 스리슬쩍 끼어든 제갈 해솔이 살살 부채질을 하고, 주방에서 나오는 고연주가 또 싸우느냐며 혀를 차고 식사를 내놓겠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임한나의 품에 안겨 말다툼을 구경하는 동안,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며 신경질을 부리며 등장하는 수나를 보며 인사할 것이다. 거기서 식당은 침묵한다. 난 이익이익거리는 수나를 껴안고 입맞춤을 퍼붓는다.
아, 그러고 보니 수나의 동생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다. 한소영이 임신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하기도 했으니까. 그래, 내 아이를 여럿 낳아 육아에 전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여쁜 부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일도 분명히 즐거움이 있으리라. 상상만 해도 행복….
…아니.
행복하지 않아. 거짓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랬으면 좋겠다는 기분은 들지만, 행복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진짜 속내를 털어놓으라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세라프의 계획은 훌륭하다.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도망간 천사들을 돌아오게 하고 자리를 만들어 한꺼번에 쓸어버린다. 천사가 아니었으면 애초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테니 명분은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 정도로 날 위해주는데 세라프 하나쯤 살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제로 코드의 사용을 위해서도 남겨둬야 하고.
이뿐이랴? 이 회차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서 대륙도 깔끔하게 청소하고, 악마에게 힘을 보탠 남 대륙도 깡그리 몰살시킨다.
아아,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증오해 마지않는 적을 굴복시켰을 때 얻는 쾌감은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다. 머리통이 짓밟혔을 때 가브리엘은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분노로 일그러질까, 아니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할까. 살려준다고 안심시킨 후 불시에 목젖을 찌르는 것도 좋을 터.
엘도라는 목을 베는 게 좋겠지. 긴 창끝에 목을 꽂고 농성하는 남 대륙 사용자들을 향해 보란 듯이 흔들면 굉장한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즐거울 거야. 하하.
“…….”
뭔 생각을 하는 거지.
짝!
양손으로 뺨을 쳤다. 멍멍한 정신으로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망상의 나래를 펼친 듯싶다. 일의 경중을 따져야 하는데.
일단 세라프를 찾아가 지구와 홀 플레인을 잇는 통로 개설 여부를 확인한다. 또 이제 슬슬 클랜원들한테 말할 때도 되지 않았나. 다짜고짜 밝히면 설득력이 떨어지겠지. 이건 형을 찾아가 조언을 구해봐야겠다. 우선 침대에서 나와 씻는 것부터 하고.
세안을 끝내고 방을 나오자 고요한 복도가 날 맞이했다.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때이니만큼 꽤 소란스러울 법도 한데 성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하다. 심지어 사 층에서 계단을 내려와 일 층에 도착했을 때도 조용하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다. 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걸까….
“응?”
사방을 둘러보며 로비를 가로지를 즈음, 문득 정면에 시선이 꽂혔다. 일 층 입구로 들어오던 안현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걸음을 멈칫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현뿐만 아니라 한 무리의 사용자가 들어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머셔너리 클랜원들이었다.
“단체 소풍이라도 다녀온 건가?”
농담조로 건네기는 했지만, 피로가 그늘진 얼굴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안현은 입을 반쯤 열더니 흠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따라 시선을 내리자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무표정한 얼굴의 수나를 볼 수 있었다.
“수나….”
웃으며 양팔을 뻗은 순간 탁, 손을 쳐내는 감각이 전해졌다. 엉겁결에 행동이 멈춰졌다. 그러나 수나는 날 보지도 않고 찬바람이 날릴 만큼 세게 지나쳐버렸다. 이내 숫제 양 갈래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달려가 계단 위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까닭 없이 서운함이 몰려온다. 방금은 진심 같았다고 해야 하나.
“뭐야…. 뭔 일이라도 있었어?”
수나가 사라진 계단을 올려다보며 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제야 이상함이 느껴졌다. 의아한 기분에 머리를 갸웃하자 안현이 터벅터벅 걸어와 힘없이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말했다.
“형.”
잔뜩 쉰 목소리였다.
“우리 축제해요.”
이게 피로에 절은 낯을 하고 뭔 말을 하는 거지. 뜬금없이.
“갑자기 뭔 소리야. 축제는 얼마 전에 한 번 하지 않았나.”
“해요, 축제.”
“안현?”
“하자고요.”
고장 난 인형처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하긴 이제 하든 말든 별 상관없기는 하지만.
“뭐 마음대로 해라.”
한 마디하고 수나를 찾으러 올라가 보려는 찰나, 돌연 강하게 잡아끄는 감각이 전해졌다. 살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안현이 날 부여잡은 채 서서히 머리를 들고 있었다. 흐릿해 보이던 두 눈동자가 순간 진해지며 날 직시한다.
“형도 와요. 어디 가지 말고.”
“놔라…. 뭐?”
“형도 오세요. 하루, 아니 반나절 정도 시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뭐라고?”
나 또한 저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이 지금 장난하는 건가?
그러나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진심이 여실히 전해졌다. 안현이 이를 악물었다.
“축제 따위, 다시는 안 해도 좋으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마지막이어도 좋으니까….”
급기야 옷깃이 찢어지라 손을 꽉 말아 쥐기까지 한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건가? 흘끗 입구로 눈을 돌리니 고연주가 서글프게 미소 짓는다.
“그래요. 해요. 저번에는 중간에 분위기를 망쳤지만, 오늘은 원 없이 놀아봐요.”
심지어 고연주까지.
“허 참.”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말았다.
그렇게 즉석에서 하기로 한 축제는 시작부터 축 처진 분위기였다. 원 없이 놀아보자고 했으나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오직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릴 뿐. 고연주를 비롯한 여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을 만들고 나르기 바쁘고, 나머지는 곳곳에 비치된 탁자에 앉아 입을 닫고 기다리기만 한다.
이래서야 축제는커녕 여느 때와 같은 저녁 풍경이지 않은가. 나야 떠들썩하지 않아서 좋기는 하다만.
건너건너 탁자에 앉은 비비앙은 언제나처럼 잘 먹는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나 쉴 틈 없이 양손을 움직이는 게 음식을 욱여넣는 듯싶다. 목이 막히는지 가끔 꺽꺽 소리 죽여 흐느끼며 고개를 들고 천장을 응시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어깨를 가늘게 떨기 시작한다.
그렇게 맛있나? 참 반응 한 번 좋아. 한 번쯤 지구로 데려가 먹방을 시켜보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러고 보니.”
문득 옆자리로 그릇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축제만 하면 오빠는 항상 조용히 있다가 어느 순간 몰래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늘처럼.”
의자에 털썩 앉은 김한별이 날 보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축제처럼 보이느냐고, 당최 어딜 다녀왔길래 이러는 거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목구멍으로 씹어 넘기는 음식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축제를 즐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건 그래요.”
김한별은 순순히 동의하며 웃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억지 미소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와 김한별뿐만이 아니라 식당 전체에 정적이 흐르고 있다. 우리 대화에 집중이라도 하는 것처럼. 뭐, 착각이겠지.
“저기, 오빠.”
“응? 왜.”
“있잖아요, 만약에요. 정말 만약인데요.”
“그냥 말해. 슬슬 짜증 나려고 하니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통과의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상당히 새삼스러운 질문인데.
“글쎄.”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적당히 대꾸했다. 일 회차에서는 통과의례에서 죽었으리라 예상하지만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일 회차와 이 회차가 달라진 만큼 어떻게 됐을지는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요.”
또? 애초 뭘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또다시 통과의례에서 만난다면…. 그때도 예전처럼 살려주실, 이끌어주실 거예요?”
탁.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움찔 몸을 떤 김한별은 한없이 불안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아차 하고 말을 바꾸기는 했으나 분명히 살려주실 거냐고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하다. 기실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이었다. 느릿하게 연초를 꺼내며 주변을 돌아보자 한 명도 빠짐없이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난 다시 김한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1. 현재 진행 중인 에피소드들은 오름차순이 아니라 내림차순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에피소드로서는 0이 마지막입니다.
2. 완결은 에피소드 0은 10회, 에필로그는 4회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제 에피소드 0은 2회, 그리고 에필로그 4회가 남았습니다. 즉 메모라이즈는 앞으로 6회 연재 후 완결이 납니다.
* 위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대부분의 독자분들이 알고 계시는 만큼, 앞으로 1, 2번에 대해서는 이번 후기를 마지막으로 더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3. 독자분들의 결말 예상 코멘트가 거의 한 방향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애초 그 방향으로 생각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니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차후 진행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미리 답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건,
1. 1회차로 돌아가지 않는다.
2. 2회차를 재 시작하지 않는다.
3. 3회차를 시작하지 않는다.
4. 그러므로 무한 루프 결말은 없다.
이 정도입니다.
완결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양해 부탁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