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82
00981 Epilogue 1. 안녕, 세라프. =========================================================================
흘끗 뒤를 돌아보니 반쯤 일어나다 만 세라프가 보였다. 언제 붙잡았는지 살짝 쥔 손아귀로 붉은색 망토가 그러모아 져 있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기는 게 아니라 느슨하게 잡아끄는 것이 약간만 힘을 줘도 뿌리칠 수 있을….
“가시렵니까…?”
것 같은데,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애처롭다. 그런 눈동자로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꼭 하룻밤도 지내지 않고 무정히 떠나버리는 낭군을 보는 가여운 여인 같잖아.
난 괜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에 잡히는 제로 코드를 만지작거렸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세라프가 입을 열었다.
“수현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야기?”
“그냥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듣고 가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뭐, 뭔.”
천사는 평소답지 않게 스스럼없이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이내 진정하고 무언가 갈구하듯 눈동자를 빛내는 세라프를 빤히 응시한다.
…하기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라프와는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겠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제로 코드를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맘 놓고 이야기할 기회는 어쩌면 지금뿐일지도. 아마 그래서 저러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응할까, 말까.
“…….”
사실 근래 세라프를 보며 드는 감정은 상당히 미묘하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확실한 기준이 내려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언제부터였더라? 세라프가 안솔의 몸을 빌려, 아니 날 따라 일 회차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였나?
어쨌든 그 이후 하나 확신하는 건, 옛날처럼 꼴도 보기 싫을 정도의 증오는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뿐. 그래, 그뿐이다.
“그러고 보니.”
망토를 천천히 당겨 빼며 말하자 세라프가 눈을 살짝 치뜨며 제단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나도 묻고 싶은 게 남아 있었지.”
그 순간 “잠시만,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이라도…!” 라고 뒤늦게 외친 세라프는 제단에 도로 앉는 날 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왜? 좀 더 있어도 괜찮은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연덕스레 연초를 꺼내 물자, 곱게 눈을 흘기더니 얌전히 제단에 앉는다. 그러나 두 눈이 전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아랫입술이 삐쭉 튀어나온 것이 단단히 삐친 게 분명했다. 세라프가 토라지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꽤 귀엽잖아.
“삐쳤어?”
“안 삐쳤습니다.”
“에이, 삐…. 알았어.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날 붙잡은 거야?”
“…….”
약간 화난 음성으로 말한 세라프는 한동안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던 세라프가 날 비뚜름히 흘겨봤다. 이윽고 입꼬리가 살그머니 올라갔다.
“사실 최근 수현의 동향을 간간이 관찰했습니다.”
“뭐?”
“여러 여인과 무척 즐겁게 지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봤어?”
세라프는 스리슬쩍 끄덕거렸다. 으음. 화끈한 기운이 올라오는군. 하지만 난 ‘그래서?’ 라는 의미가 전달될 수 있도록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혹시 내가 창피해 하기를 바랐다면 오산일 거다.”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유치하지 않습니다.”
불현듯 길게 하품이 나왔다. 밤이라서 그런가. 이상하네. 늦게 일어났으니 잠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그때 세라프가 말을 이었다.
“단지….”
“단지?”
“부러웠습니다.”
“하, 부러울 것도 쌨다.”
연초를 씹으며 말하자 가볍게 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흠. 세라프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농담 따먹기 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그래서 말인데, 수현.”
이윽고 살금살금 몸을 밀착해온 세라프가 귓가에 나직이 속닥거렸다.
“혹시,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들어보고.”
질근질근 씹던 연초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갑자기 시야가 확 미끄러졌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잿빛 천장이 밟혔다. 그 아래로 세라프가 반쯤 고개 숙인 채 날 내려다보고 있다. 동시에 뒷목을 편안히 받쳐주는 푹신푹신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릎베개라. 짐작하건대, 아마 세라프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같다.
“이게 부탁?”
기껏 물었으나 세라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않은 채 두 손을 움직여 내 머리카락을 차분히 쓸어 넘기기 시작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쉬지 않고…. 나도 이제 와서 거부할 이유는 하등 없어 가만히 몸을 맡겼다.
“으으으음….”
회색 제단은 차가웠으나 세라프의 손길은 그 이상으로 따뜻했다. 기분 좋다. 머리가 풀리자 몸도 늘쩍지근해져 저절로 눈이 감긴다. 꼭 싱그러운 봄을 맞이한 초원에서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누워 있는 것 같다.
이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현.”
문득 세라프가 말을 걸었다. 난 완전히 감기려는 눈을 반쯤 감는 걸로 타협하고 세라프를 응시했다. 시야가 좁아진 탓인지 아까보다 약간 가물가물해진 것 같다.
“수현은…. 홀 플레인에서의 삶이 어땠습니까?”
“……?”
뜬금없는, 하지만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갑자기 뭔 소리냐고 반문하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이 답변이 세라프가 말한 부탁일지도 모르니까.
“글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상념에 잠겼다.
예전이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부정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단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다르게 말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불행하기도 했지만….”
형의 죽음을 목격했을 당시 난 불행했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해야 했고, 동료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으며, 동경하는 여인의 타락을 확인했을 때의 기억은 지금조차도 떠올리기 싫을 정도다. 이것 말고도 불행한 기억은 무수히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사용자로서 활동하는 내내 불우하기만 했을까?
“좋은 기억도 있고….”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아니었다. 형을 만났을 때, 한소영에게 구원받았을 때, 게헨나와 만났을 때, 마르와 수나가 태어났을 때, 동료들이 날 구하러 와줬을 때…. 그때의 기억은 분명히 불행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얼굴을 간질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은은히 빛나는 은발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세라프의 얼굴이 점차 기울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아까보다 자세히 보이지가 않는 거지? 시야가 상당히 불선명해졌다. 눈꺼풀도 나도 모르는 사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것 같다.
“과거를 잊을 필요는 없지만, 굳이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순간 번쩍 눈을 뜨려다가, 그냥 조금 더 눈을 감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신을 부드러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가히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대로 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다.
“그러니 수현도 이제 행복하게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거야….”
당연하다. 어느 누가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세라프가 말을 잇는다.
“그럼 수현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 순간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
이게 문제였다.
사람은 개인에 따라 우선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러므로 무엇을 행복하다고 정의하는지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행복이라….”
보통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과 내가 행복하다 느끼는 삶은 서로 굉장히 어긋나 있다. 끊임없이 죽이고 살육해야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삶이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나 자신이 만족한다손 쳐도, 형이나 한소영 등 주변 사람의 시선은…?
약속의 신전에서였나.
‘미지는 외면의 결과인가. 선택이 다가올 미래에 두려움을 느꼈다니, 실로 안타깝구나. 십오 년간 목적했던 순간을 비로소 앞뒀음에도….’
‘하긴, 그나마 버티게 해주던 독이 빠졌다면 남는 건 정신의 마모일지도. 그렇다면 너는 이미 아름답게 부서져 가는 중이겠지….’
제로 코드의 말은 뼈저릴 만치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난 스스로 감정을 속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계했던 건 슬픔과 아픔에 대응하는 감정이었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우는 건 약한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복수를 위해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힘들어 울고 싶을 때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정 참지 못할 것 같으면 분노라는 감정으로 대체했다. 스스로 계속해서 감정을 속인 결과 눈물샘이 완전히 메마르고 말았다.
…결국, 남는 것은 공허함과 허무함뿐.
“아마….”
그래서였다.
그래서 울고 싶었다. 웃는 것보다는,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행복할 때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지만, 불행할 때는 진심으로 웃을 수 없다.
하지만 우는 일은 단순히 슬픈 상황일 때만 국한되지 않는다. 행복할 때도 가능하다. 너무 기뻐서, 혹은 감동을 이기지 못해 우는 경우는 많지 않은가.
그래. 말인즉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삶.
좀 더 나아가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런 삶…?”
“…그렇습니까.”
간신히 대답을 마치자 불현듯 눈앞을 어지럽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멀어져 감을 느꼈다. 아마 세라프가 고개를 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이상하다.
“수현이 정말로 그러기를 원한다면.”
따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수현의 진심을 존중하겠습니다.”
도리어 몸이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난 그제야 정신 줄이 놓일락 말락 하는 지경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 안 되는데. 아직 묻고 싶은 게 남았는데.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 순간이었다.
“저는, 오 년 전 회귀를 앞두고 제로 코드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불현듯 시야가 급속히 어두워지는 동시에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세라프의 형체가 완전히 흩어져버렸다.
“이제야 그때의 서약을 이행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세라프?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상당한 양의 G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없애는 건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우선 수현이 원하는 바와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대로 아무 대책 없이 돌아간다는 건 결코 합리적이라 볼 수 없습니다.”
세라프?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의지는 제로 코드의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좋습니다. 도우미의 권한으로, 세부 사항은 임의로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사용자 김수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작업을 끝내고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은…. 도우미의 권한으로…. 임의로 요청하도록…. 물론 수현에게 해가 가는 일은….”
젠장, 잘 들리지 않아. 아무리 집중하려 용을 써도 의식이 시시각각 흐려져 간다.
“그럼 작업이 끝난 후….”
그런 내가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건.
“다시 뵙는 건….”
살짝 젖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라프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힘들겠지요…?”
그와 동시에 난 간당간당하게 쥐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김수현 : 아마, 울 수 있는 삶…?
세라프 : 그럼 울어봐.
김수현 : ?
세라프 :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봐! 이 갈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