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83
00982 Epilogue 2. 지구로…. =========================================================================
“당신이….”
“세라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림자 여왕.”
“네네. 아, 그이는…?”
“사용자 김수현은 사용자 김유현이 데리고 먼저 돌아갔습니다.”
“…그래요. 나머지도 다 갔겠죠?”
“전원 무사히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후유…. 그나저나 보랏빛 포탈은 처음 보네. 아무튼, 저기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요?”
“Yes.”
“좋아. 그럼 나도….”
“…….”
“…….”
“…….”
“…저기, 뭐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네?”
“저 말고, 수현한테요. 적어도 당신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맘에 담아둔 말 있으면 지금 해요. 꼭 전해줄 테니까.”
“아….”
…젠장! 그때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 응? 왜 그러느냐? 궁금하구나. – Gehenna
/ 왜긴 왜예요. 요즘 그이랑 섹라프랑 하는 짓 보면 몰라요?
PS. 잠깐만. 누가 멋대로 회고록 훔쳐보랬어요? 아주 이름까지 당당하게 밝히셨네?
+ 아, 회고록이었느냐? 하긴 일기치고 서술이 꽤 자세하더군. 그나저나 섹라프는 또 누구지? 설마 그이가 또…? – Gxxxxxx
/ 또는 아니고요. 누구겠어요. 하루가 멀다고 그이와 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음탕 천사죠. 줄여서 섹라프.
PS. 그런데 앞글자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내가 보지 말라고 했죠?
+ 무엄합니다. 음탕 천사라니. 회고록을 적는 건 사용자 고연주의 자유지만 호칭만큼은 조속한 수정을 요구하겠습니다. – Seraph
PS. 그때 해주셨던 말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미처 메시지로 전하지 못했던 말을 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얼씨구? 본인까지 납셨어? 싫다면? 섹라프 주제에. 억울하면 그쪽도 마음대로 부르세요~.
+ 꼬-연-추. – Seraph
/ ?
+ 아하, 중간에 하이픈(-)을 빼고 읽어 보아라.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게 읽힐 게다. – xxxxxxa
/ 이 여편네들이 진짜! 아니! 그전에 남의 회고록 멋대로 보지 말라고 했잖아!
– 아틀란타 머셔너리 캐슬 『그림자 여왕 회고록』 中 발췌.
*
가늘어진 눈 틈으로, 흔덕흔덕 흔들리는 눈동자가 흐릿한 빛으로 흐려졌다. 바르르 떨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가고, 머리도 축 늘어졌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움직임이 뚝 멎는다.
잠시 후, 미세하게 떨리는 흰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얼굴을 살며시 감쌌다.
여인은 그 상태로 한참을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가끔 거친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질 뿐,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하염없이 응시한다. 차디찬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뺨의 온기를 잊지 않으려는 듯이.
그러나 여인이 이 순간의 영원을 바랄수록, 얄궂은 시간은 찰나의 틈도 남기지 않으려 흐르는 속도에 한층 박차를 가한다….
불현듯 어두운 그림자가 제단을 드리웠다.
언제 들어온 걸까. 짙은 색 코트의 사내가 우두커니 선 채 김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소환의 방에 두 명의 사용자가 같이 있는 건 드문 일이나 세라프는 동요 없는 눈으로 사내를 마주했다.
“오면서 계속 고민했습니다.”
살며시 눈을 찡그린 김유현은 느릿하게 무릎을 굽혔다.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되는지…. 차라리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직이 말을 흘리며 김수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 장식을 다루듯 살살 쓸 듯이 소중하게 쓰다듬는다.
“나중에 전말을 알려주면 굉장히 원망할 겁니다.”
일말의 후회가 묻은 어조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처럼,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다는 듯이.
“아마 그렇겠지요?”
그러나 세라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남긴 메시지가 출력되기 시작하면 원망은 오롯이 저 하나로 쏟아질 테니. 그리고….”
말을 멈추더니 양팔로 김수현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고개를 묻는다.
“원망은 하되, 이해해줄 겁니다…. 언제가 되더라도 수현이라면 분명히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한층 힘주어 말한 천사는 팔을 풀려 했지만, 품에서 갑자기 칭얼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멈칫하고 말았다. 세라프는 자꾸만 가슴으로 파고드는 김수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김유현은 못 말리겠다는 듯 쓰게 웃었다.
“지구에서 원래 저랬어요. 몸만 컸지 어리고 야리야리한 성격이죠.”
“…그렇, 습니까. 아, 제로 코드는…?”
김유현은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걸 알아챘으나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수현이가 가지고 왔을 겁니다.”
김유현은 김수현의 주머니로 손을 넣더니 갑자기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천천히 손을 빼더니 다른 곳으로 침착히 손을 옮겼다.
괜히 갑옷을 건드리거나 망토를 들추는 등등. 몹시 느릿한 속도로 제로 코드를 찾는 동안, 세라프는 낑낑 보채는 새끼를 억지로 떠미는 어미 새처럼 가까스로 감은 팔을 풀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삼십 분. 단순히 구슬 하나 찾는 것치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김유현이 처음 뒤졌던 주머니에서 제로 코드를 빼냈을 때, 세라프는 언제나처럼 제단에 앉아 고요히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지만 세라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결심을 굳혔는지 세라프 본연의 웅혼한 미성(美聲)이 소환의 방을 가득히 울렸다. 이제 더는 시간 끌지 말자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사용자 김유현. 같이 돌아갈 분들은…?”
“전원 신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호를 보면 바로 들어올 겁니다.”
“통로가 개설되는 건 금방입니다. 유지되는 시간은 짧다고 볼 수 없으나….”
“예. 사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용자 고연주가 그랬습니다. 서로 작별도 끝냈고 준비도 마쳤다고요. 그러니 공연히 시간이 지체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김유현은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는 내심 제로 코드가 발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말이죠.”
“제로 코드가 반응하지 않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어 그래요? 사실 저도 발동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는데요.”
“왜냐면 수현의 바람과 우리의 바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세라프는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저는 도우미로서, 사용자 김유현은 제 이 계승권자로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
“무엇보다 단순한 통로 개설 여부를 떠나서 수현 스스로 말했습니다.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인즉 우리의 요청과 수현의 소망이 동일한 이상, 제로 코드가 반응하지 않을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하기야 수현이에게 해를 입히는 요청이었다면 애초 들어줄 리가 없겠지요.”
김유현이 씩 웃었다. 그때였다. 한창 달게 자던 김수현이 느닷없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두 남녀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이런, 설마?”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화정의 기운이 없는 상태라 겨우 잠재우는 데 성공했지만, 수현의 사용자 정보가 워낙 강력한 탓에….”
세라프가 말을 흐렸다. 여기서 김수현이 깨버리면 기껏 준비한 계획이 물거품으로 화할 건 불 보듯 뻔하다.
김유현과 세라프의 눈이 마주쳤다. 기실 준비는 초저녁에 끝난 상황이었다. 단지 서로 아쉬움이 남아 미적미적하고 있었을 뿐.
“이제…. 정말 끝이군요….”
김유현이 중얼거렸다. 긴 한숨과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유현은 웅크려 누워 있는 김수현을 조심조심 부축해 일으켰고, 구슬을 쥔 손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세라프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이 계승권자의 권한으로….”
그 찰나의 순간.
“…제로 코드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은은하게 빛나던 제로 코드가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제로 코드의 반응을 확인한 세라프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사용자 김유현의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25%, 50%, 75% 100%. Loading…. 승인. 요청이 통과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 Code Name, Zero의 실행을 알립니다.”
작업을 처리하면서도 세라프의 시선은 김수현한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김유현은 동생을 더욱 강하게 안으며 정면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끄긍, 끄그그긍!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녹슨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김유현의 손을 벗어난 제로 코드가 허공으로 올라가 빛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잠시 후, 소환의 방이 새하얀 빛무리로 가득하게 물들었다.
*
번쩍!
어두운 새벽을 밝히는 빛이 터졌다. 입구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일제히 턱을 젖혔다.
신전의 꼭대기로부터 진한 보랏빛이 치솟는다. 빛무리는 일말의 미련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늘로 솟구쳤다. 혜성처럼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더니 눈 깜빡하기도 전에 어둑한 하늘을 밝히며 사라져버렸다.
“성공했나 보네. 결국에는.”
고연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용자들 너머로 약간 뒤쪽에 서 있는 무리가 눈에 밟혔다. 그중 시선을 마주친 한 명이 성큼 걸어 나왔다.
“빨리 안 가고 뭐 해? 신호 왔잖아?”
화정이 날카롭게 외쳤다. 고연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어깨를 웅크리며 키득거렸다.
“어머, 보자마자 가라니. 매정하셔라.”
“놀고 있네. 그럼 서로 껴안고 펑펑 울기라도 할까?”
“할래요?”
“싫어. 김수현이라면 모를까. 아니 걔도 될까 말까야. 어쨌든 우리가 그렇게 정다운 사이는 아니잖아.”
화정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거절했다. 그러나 고연주는 딱히 매몰차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썩 꺼지라기보다는, 우리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라는 어조에 가까웠으니까.
“하, 하하. 사, 사실 저희보다 돌아가는 분들이 더 큰 일 아닙니까?”
신상용도 어수룩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오 년 전으로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그, 그리고 제로 코드가 충전돼서 돌아오는 통로가 열리는 것도 오륙 년 후. 즈, 즉 그쪽은 온전히 오륙 년을 기다려야겠지만, 이, 이쪽은 끽해야 일 년?”
“…신상용 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만, 그렇게 울먹거리면서 말해봤자 설득력이 없네.”
횡설수설을 보다 못한 신재룡이 점잖게 타일렀다.
“그래도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구나.”
게헨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 사내의 말대로 시점이 공교롭게 딱 맞아떨어지지 않느냐. 우리 처지에서는 이 상황이 끝나자마자 돌아오는 통로가 열리는 걸 볼 수도 있다. 정말로.”
신상용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더니 팔짱을 끼며 고연주를 바라봤다.
“뭐, 고생하거라. 워낙 까다로운 사내다 보니 고생길이 훤할 것 같다만.”
“걱정하지 마요. 오 년 동안 당신 따위 까맣게 잊게 해버릴 거니까.”
“흠? 그 세상에 계속 있을 게 아니라면 적당히 까부는 게 좋을 텐데?”
“그보다 상심에 빠진 귀여운 따님을 어떻게 달랠지 걱정부터 하시는 게?”
고연주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받아쳤다. 게헨나는 아차 했다. 이윽고 두 여인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게헨나는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배웅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지. 아무튼, 부디 온전히 돌아오게만 해다오. 부탁한다.”
고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찡긋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거기까지였다. 이별은 진작에 마쳤고 신호는 왔다. 시간은 부족한 건 아니지만 끌어봤자 좋을 건 없다.
결국, 남은 일은 하나.
“김수현한테 전해! 약속 안 지키면 죽을 줄 알라고!”
마흔 남짓한 사용자는 악을 쓰는 비비앙을 뒤로한 채 신전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리하여 하나같이 우르르 달리는 와중 고연주는 김유현의 기대에 부응해 침착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포탈에 도착해서 일렬로 줄을 세우고, 최소 이 분 간격으로 한 명씩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소환의 방은 애초 천사와 사용자, 이 두 대상을 상정하고 설계된 공간이다. 즉 수십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는 장소라 혼잡함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클랜원 중 일부는 순순히 통로로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언니. 나….”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니. 어차피 돌아올 거잖아.”
“하지만….”
“그럼 남을래? 기다리기 싫으면 여기 계속 있어도 돼. 그렇게 할 거야?”
중간중간 주저하는 사용자를 어르고 달래던 고연주는, 약 한 시간 반이 지나고 나서야 전부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줄이 사라지자 어둠에 휩싸인 신전의 복도는 을씨년스러우리만치 적막해졌다.
최후로 들어가기에 앞서 마지막 남은 여인은 뒤를 돌아봤다. 이미 긴 통로를 지나쳐온 만큼 무언가 보일 리는 없을 터. 그러나 고연주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하여간, 손 많이 가는 남자라니까!”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빛으로 뛰어들었다.
포탈을 빠져나온 고연주가 볼 수 있었던 건, 소환의 방 중앙을 차지하는 처음 보는 보랏빛 포탈 하나. 그리고 제단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아름다운 천사였다.
고연주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날 밤.
아틀란타의 하늘은 새벽 중 총 마흔두 번 빛을 쏘아 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마흔세 번.
마흔두 개의 보라색 빛무리가 차례대로 하늘로 치솟은 후, 한 푸른색 빛무리가 신전의 꼭대기로 떨어졌다고 한다.
============================ 작품 후기 ============================
에필로그가 끝난 후, 외전은 2회 정도 예정돼 있습니다.
외전 1은 안솔의 일기(현대에서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내용입니다.), 외전 2는 5년 후의 홀 플레인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