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86
00985 Epilogue 4. Face Up To The Reality. =========================================================================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야로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칼날 같은 바람이 귀를 차갑게 긁는다. 머리는 사거리를 교차하는 차들처럼 어지럽고, 중간중간 웅성거리는 소란도 거슬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냥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도 쉬지 않고 전력으로 달리자, 어느 순간 낯익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무려 십오 년 만에 보는 우리 동네였다.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달리는 속도는 줄기는커녕 가일층 가속했다. 홀 플레인에서 수백, 수천 번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으니까. 물론 그 상상은 이렇게 갑작스럽지 않았지만….
집으로 기억하는 연립 주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듯 계단을 올라 현관문 앞에서 멈추자, 쿵쿵 고동치는 심장이 느껴졌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잠금이 풀리는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서서히 드러나는 빛바랜 흰색 벽지를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현관으로 들어가니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도둑이라도 들었는지 상당히 엉망으로 어지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방의 전자레인지는 쩍쩍 갈라져 금이 갔고, 안방의 문고리는 박살 나 구멍이 뻥 뚫려 있다. 부엌도 난리가 났다. 싱크대는 거칠게 잡아 뜯기라도 한 듯 떨어져 있으며 바닥에는 깨진 컵 조각이 흐드러지게 널렸다.
“이게…?”
그때 희미한 신음이 얼핏 들렸다. 마력 감지를 돌리고 화장실 문을 젖히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화장실은 방보다 훨씬 가관이었다. 세면대는 처참히 묵사발이 난 상태였고, 타일은 토사물로 범벅돼 있다.
무엇보다 이 만신창이가 된 공간에 형이 있었다. 변기에 엎어지듯 쓰러져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형!”
곧바로 다가가 흔들었지만, 헛구역질만 할 뿐, 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강제로라도 각성시켜 어떻게 된 일이냐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다. 하지만 심안으로 진정된 마음은 계속 흔들어 깨우기보다 침대로 눕혀주는 길을 선택했다.
한동안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형을 보고 있다가, 무형의 기운에 이끌리듯이 화장실로 돌아갔다. 온수 조절기를 끝까지 돌리고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이 세찬 소리를 내며 정수리를 적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뿐이었다. 제 3의 눈은 진작에 발동하고 있었고, 뺨을 쳐도 허벅지를 꼬집어도 정신은 또렷해지기만 했다.
꿈에서 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
눈을 떴을 때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하도 머리가 복잡해 눈을 붙였는데 푹 잠들어버린 듯싶다.
실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홀 플레인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시야는 면면이 내 방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내 그리고 그리던 집에 왔는데 별 감흥은 느껴지지 않는다. 감회가 새롭기는커녕 줄곧 의문이 샘솟는다.
상정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세 가지.
첫 번째는 꿈속이라는 것이나, 일단 제외하는 게 좋겠지. 꿈 치고 너무 선명하니까. 감각도 살아 있고 사람의 반응도 굉장히 현실적이다.
두 번째는 환상을 보고 있다는 점이지만, 역시 가능성은 낮다. 정말로 환상이었다면 제 3의 눈으로 이미 해제됐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EX 랭크까지 찍었는데 못 깰 리가 없다.
세 번째는….
“정말 지구로 돌아온 건가.”
사실 이성은 이미 그렇다고 외치고 있었다. 단지 감성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 하지만 여러모로 봐도 세 번째가 확실했다.
형도 지구로 돌아왔다면 집에 도착했을 때 봤던 풍경도 이해가 갔다. 아마 사용자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터. 정신적인 혼란을 이기지 못해 그 난리를 쳐놨던 거고.
“하………….”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이상해졌을까.
돌이켜보면 기차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아니, 소환의 방으로 갔을 때부터….
아니 아니, 식당에서 클랜원들과 만났을 때부터….
갑자기 딩동 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책상의 휴대폰 액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념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했다.
딩동. 딩동.
그러나 삼십 분 후 신호음이 연달아 울리자 마냥 묵살할 수도 없었다. 허공섭물로 휴대폰을 가져오자 문자 세 개가 와 있었다.
첫 문자의 발신인은 모르는 번호였다.
『탄천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탄천 계단? 아, 누가 고백하려나 보다. 잘못 보냈을 거라는 생각에 싱겁게 웃고 말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웃음은 자동으로 멈췄다.
『올림픽대로로 와서 탄천으로 쭉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게.』
왜냐면 발신인이 형이었으니까.
침대를 박차고 나와 확인한 결과 형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자는 동안 의식을 차리고 나간 게 분명했다. 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원래 집에서 올림픽대로까지 걸어서 삼십 분은 걸리는 거리지만, 전력으로 질주하니 오 분도 안 돼서 도착할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옮기고….”
세 번째 문자는 지도였다. 위치를 확인하며 탄천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불현듯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을 둘러보니 계단 아래 서 있는 거무스름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사내도 날 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클랜 로드!”
“조승우?”
사내는 조승우였다. 아래로 내려가자 꾸벅 인사하더니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몸은 괜찮으시죠? 이야, 저는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용자 조승우.”
“예 예. 저 맞습니다. 맞아요.”
“같이 돌아온 겁니까?”
조승우는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돌연 날 빤히 응시했다.
“클랜 로드. 왜 제가 마중 나왔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괴리를 가장 적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머셔너리 클랜에 가입했을 때부터 비전투 사용자로 활동했으니까요.”
“예?”
“성에서 매일 헉헉거리며 서류 작성에 시달렸는데, 회사에서 보고서 작성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받아들이는 게 비교적 빨랐습니다.”
“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전쟁, 전투, 탐험보다 행정만 담당했으니까. 괴리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전투 사용자보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을 테지.
“이쪽으로 가실까요?”
조승우가 왼쪽으로 나 있는 보행로를 가리켰다. 어차피 가야 할 방향이었다. 가면서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은데 거절할 이유는 하등 없다.
“지구로 귀환한 사용자는 마흔 명이 좀 넘습니다.”
잠시 후, 나란히 서서 걷자마자 조승우가 말문을 열었다. 마흔 명이 좀 넘는다고….
“꼭 돌아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맞습니다.”
시원스레 인정하더니 안색을 굳혔다.
“제가 돌아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아 물론 적응하는 시간은 필요했지만요. 어쨌든 귀환자들한테 연락하는 거였습니다. 미리 연락처와 집 주소를 받아두기까지 했죠.”
안경을 추어올리며 말을 잇는다.
“첫 번째로 전화를 돌렸을 때 총 몇 명이 연락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한 절반?”
“여덟 명이었습니다.”
“여덟 명이요?”
“예. 우리가 귀환한 시각은 오전 열한 시 사십오 분. 제가 전화하기 시작한 시각은 오후 여섯 시가 좀 안 돼서였습니다.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전화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심신이 안정된 사람이 여덟 명이었다는 겁니다.”
“…….”
난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마흔 명 중에 고작 여덟 명….
“뭐, 결과적으로 전원 무사합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받기도 했고, 나중에 통화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요.”
“설마 아까 통화가…?”
“아, 들으셨습니까? 사실 딱 한 명이 끝까지 연락이 안 됐었는데 방금 통화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아 가까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죠.”
“잠시만요. 안전 확보? 설마 자살 기도라도 했다는 겁니까?”
“예.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부하 직원을 집 주소로 보냈는데…. 안타깝지만,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쯤 병원으로 가는 중일 겁니다.”
“누가…?”
조승우는 쓰게 웃더니 걸음을 멈췄다.
“클랜 로드. 중간에 끊어서 죄송하지만, 나머지는 차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 먼빛을 가리켰다.
“보행로로 쭉 가시면 됩니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정면에는 어둠밖에 없었으나 시력을 높이니 금세 경관이 명확해졌다.
조승우가 가리키는 곳에는 두 남녀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형은 예상했지만, 한소영도 있다는 건 의외였다.
“…알겠습니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누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전원 무사하다 하니 우선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을수록 두 형상이 점차 확실해졌다. 형은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을 가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으나 약간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은 몰라도 형은 전말을 알고 있을 터.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왜냐면 제로 코드 발동 권한을 가진 사용자는 나 말고 한 명밖에 없으니까.
이윽고 나무 의자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갔지만 앉지는 않았다. 돌담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는 한소영과 눈을 맞추고 탄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을 빨아들인 강물은 오싹하리만치 고요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시커먼 빛깔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왔구나.”
형의 음성은 잔뜩 쉬어 있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슴을 한 번 추스른 후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난 모르는 사정을 형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형은 여전히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느릿하게 끄덕거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지구로 돌아온 거 맞지?”
형도 또다시 말없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아마.”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인정하는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양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주머니로 찔러 넣고 일부러 숨을 힘껏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뭐? 형이 나 몰래 제로 코드를 사용했다는 거?”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까맣게 몰랐네. 언제부터였어?”
그러나 언성이 점차 높아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형은 이마를 짚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알아. 알고 있다.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울 거라는 거. 그리고….”
“됐고, 언제부터였냐고.”
형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빨리 본론을 말하라는 뜻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비난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꽤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물론 너 모르게 진행했지.”
형은 차분하게 말했다. 침착한 목소리가 까닭 없이 몹시 거슬렸다.
기실 나도 일단 지구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만큼 귀환을 책잡을 생각은 없다.
“앞장서서 실행한 것도 나고, 제로 코드를 사용한 것도 맞아.”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일을 벌였다는 건 아무리 삼키고 삼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계획을 세운 건 내가 아니야. 세라프다.”
“뭐?”
“세라프가 계획을 세웠고 난 계획을 실행했다.”
“……!”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달아올랐다. 가까스로 가라앉혔던 속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식당에서부터 꾹꾹 눌러 참았던 거북함이 비로소 한꺼번에 들끓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세라프와 형이 한통속이다?”
그래서인지 저절로 비웃는 어조가 깔렸다.
“수현아.”
“아아, 그래. 물론 이유가 있으시겠지.”
“…….”
“말해봐. 얼마나 대단한 계획이길래 이 지랄을 했는지 감도 안 잡히네. 뭐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형 앞에서 이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미리 경고하는데 날 위해서라는 말 따위….”
“널 위해서였다.”
그 순간 간신히 버티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머니에 넣어놨던 오른손이 형의 멱살을 움켜쥐기 일보 직전이었다.
찰나의 순간, 가까스로 방향을 틀어 뒤의 돌담을 쳤다.
쿵, 막판에 힘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돌담 전체가 진동하는 소음이 울렸다.
형한테 주먹질을 할 뻔했다. 스스로 하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형을 노려봤다.
“왜.”
왜.
단순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왜 그랬어.”
형은 비로소 강물에서 눈을 떼고 날 바라봤다.
“왜 멋대로…!”
“하나만 물어보자.”
이번에는 형이 힘없이 말을 끊었다.
“넌 왜 날 살렸지?”
“뭐라고?”
“네가 그랬잖아. 내가 죽기 직전에 날 되살리지 말라 했다며. 하지만 넌 날 살렸어. 넌 왜 그랬지?”
“…….”
“지금 네가 느끼는 기분이 내 대답이겠지.”
“…….”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형은 그렇게 말했었고 난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멋대로 행동한 셈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해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날 위해서, 형을 위해서.
“물론.”
형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야. 어떤 이유가 있든, 어떤 변명을 하든, 멋대로 행동한 건 사실이고,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으마.”
낮은 목소리는 피로에 잔뜩 절어 있었다.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지 띄엄띄엄 이어졌다.
“수현아. 약속하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왜 그래야 했는지. 이 자리에서 전부 가감 없이 밝힐 테니까….”
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떨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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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다음 회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