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93
00992 외전 2. 전조(前兆). =========================================================================
‘백한결 사건이 뭡니까?’
스치는 기억에서 발로한 단순한 물음이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어젯밤 진수현을 핀잔하는 안현의 어조는 쉽게 말하지 말라는 꾸짖는 것 같은 말투였다.
꼭 금기라도 범한 듯한 태도였다고 할까?
“…….”
전혀 근거 없는 생각이 아니었다.
방금까지 훈훈하던 대화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는 게 그 방증일 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침묵하던 허준영이 품으로 조심스레 손을 넣는다.
거무튀튀한 지갑을 꺼내 벌리고 쭈뼛쭈뼛 꺼내는 건 빛바랜 사진 한 장.
온천에서 찍은 걸까.
맑은 물과 허연 김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알몸을 한 김수현의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아래는 흰 수건으로 둘러 가렸으나 어쨌든 약간 보기 부끄러운 사진이다.
또, 그 옆으로 역시 알몸을 한 백한결이 나와 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살짝 풀린 표정, 그리고 김수현을 꼭 안고 있는 채였다.
정리하자면 달려드는 백한결과 곤혹스러워하는 김수현이 찍혀 있는, 나름 보기 재밌는 사진이다.
아직, 겉으로 보기는 말이다.
“이 사진은….”
“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예? 여행이요?”
“아니, 그 여행이 아니라.”
오해를 인식한 허준영이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그 여행이 아니라 다른 여행이야. 진수현 놈이 찍은 사진이지. 우리 몰래.”
허준영은 ‘놈’과 ‘몰래’를 강조해서 말했다.
“현장에서 잡고 고문했더니 누구누구한테 부탁을 받았다고 실토하더군. 날것 그대로의 사진을 찍어오면 비싼 값에 사주겠다고 했다던가.”
“그, 그거 범죄 아닙니까? 클랜 로드가 가만히 계셨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여성과…. 특히 김유현 씨가 진수현을 적극적으로 두둔하더군.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 예. 그렇군요.”
신상용은 그 말만으로 자초지종을 알아차렸다.
한편으로는 왜 이 사진을 허준영이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결국에는 김수현도 그냥저냥 넘어갔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다.”
화제를 원위치시킨 허준영이 사진을 톡톡 두드렸다.
검지는 정확히 백한결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상용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흠…. 글쎄요. 사랑 고백이라도 한 건가요? 하하.”
“맞아.”
허준영이 바로 인정하자, 신상용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작은 웃음이 터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살짝궁 긴장하는 도중 순간적으로 김이 샜다.
행여 몹시 심각한 일이 아닐까 근심했으니까.
그러나 허준영은 여전히 손가락을 치우지 않는다.
오히려 한층 정색하며 침묵하고 있을 뿐.
금세 웃음을 거둔 신상용이 재차 사진을 응시한다.
“여기를 봐라.”
검지가 사진의 한 지점을 꾹 짓누른다.
반듯하게 깎인 손톱이 사진 속 백한결의 나신을 꾹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새하얀 살이 훤히 노출된 가슴 부분이었다.
“……?”
한참을 살펴보던 신상용의 눈매가 살그머니 가늘어졌다.
거부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민망하다고 해야 할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괜스레 거슬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흐릿한 수증기처럼 떠돌던 위화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가슴이었다.
물론 남자라고 꼭 근육질이라는 법은 없고, 살결이 매끈하다거나 하는 점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흉부였다.
소복하게 솟은 희고 고운 살덩이,
완만하지만 볼록한 곡선을 그리는 부드러운 라인,
낮은 두 언덕의 꼭대기에 수줍게 도드라진 연한 색의 유두.
거기다 탄탄한 탄력으로 받치는 모양은 여유증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어딜 봐도 여성의 가슴이다.
“설마 백한결 군은.”
탄식과도 같은 음성에 허준영이 머리를 앞뒤로 천천히 끄덕거렸다.
“역시, 여성이었던 겁니까.”
이건 좀 놀라운데요, 라고 덧붙인 신상용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말했다고 스스로 대견해 했다.
그러나 허준영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언가 잘못 짚은 듯하다.
“그러니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한숨과 함께 입이 열렸다.
“역시 여성이었던 게 아니라, 남성이다. 아니, 남성이었던 게 맞다.”
두 번이나 강조하며 말을 잇는다.
“혹시 성전환자라고 들어봤나?”
성전환자.
트랜스 젠더(Transgender).
신상용은 바보가 아니었고, 자기 귀를 의심하는 빛이 번진 건 약 삼 초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 잠시만요. 그, 그럼…. 백한결 군, 아니 양, 아니 아니!”
순식간에 충격에 빠진 신상용을 보며 허준영이 역시나 하는 기색을 비쳤다.
“오해하지 마. 성적으로 백한결은 아직 남자다. 수술까지 가지 않았어.”
딱 잘라서 말하더니 씁쓰름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현대에서 성별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그 말대로 성별을 바꾸는 건 단순히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우선 정신과에서 성 주체성 장애라고 판단하면 진단서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산부인과에서 성호르몬을 처방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호르몬을 약 일 년 동안 지속해서 투여 및 생활하면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일종의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 그 사진은….”
“성호르몬을 투여한 지 반 년 정도 지났을 시점이었다.”
무거운 침음이 흘렀다.
신상용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한참 동안 아랫입술만 짓이겼다.
잇자국이 선명해질 정도로.
“하겠다는 걸 굳이 비난하고 싶지 않아. 백한결이 원래부터 성전환을 원했었다면 신경 쓸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이건 그게 아니지 않나.”
말 그대로였다.
백한결이 김수현이 좋다고 한 수준이었으면 그냥 웃고 넘겼을 수도 있는 사건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김수현의 매력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한 후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신상용이 기억하기도 백한결은 여성으로서 사는 삶을 원하는 사용자가 아니었다.
말인즉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김수현에 의해 백한결의 정신에 장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마냥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묘하게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
특히 정신 오염을 극도로 경계하는 김수현은 느낀 바가 한층 컸으리라.
“으, 으음. 그래도 어떻게 잘 해결은 됐나 봅니다. 아까 아직 남자라고 하셨으니….”
“그렇지만도 않아.”
신상용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으나 허준영은 단박에 부인했다.
“사실을 밝혀진 후,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뜯어말렸는데 너무 심하게 고집을 부려서…. 정말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더군.”
“고집이요? 그 백한결 군이 말입니까?”
“음. 수술은 절대 안 된다고, 일단 보류하고, 정 그러면 홀 플레인으로 돌아가서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로 진정시켰지만, 해결됐다고 보기는 어렵지.”
“그건….”
전혀 해결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신상용은 간신히 삼켰다.
실제로 겪지 않은 만큼 함부로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무튼, 너도 조심하라고.”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하려는 걸까.
긴 한숨을 내쉰 허준영은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라고 제 이의 백한결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지 예전처럼 지내지 않는 게 좋아.”
김수현이 찍힌 사진을 소중하게 갈무리하는 허준영을 보며,
“…….”
신상용은 왜인지 입을 뗄 수 없었다.
한편, 같은 시각.
“저, 저기요!”
근원은 비비앙의 연구실에 찾아온 한 불청객을 무심한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겉으로 보기만 그럴 뿐이고, 속으로는 미미한 혼란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왜냐면 눈앞에 외모는 여성이지만,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판단되는 인간은 자신에게 볼 일이 있는 듯싶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말해보면 근원의 인간관계는 협소하다.
김수현과 비비앙을 제외하면 딱히 말을 나누는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이따금 타인이 비비앙의 연구실을 찾아올 때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비비앙에게 볼 일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현재 비비앙은 부재 중이고, 성별이 미심쩍은 인간은 근원을 찾아왔다.
직접 지목되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만큼 근원이 생소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죄송하지만 큰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는데요….”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다.
작은 부탁도 아니고 큰 부탁이다.
낯선 상황 속에서 근원은 신속히 머릿속을 점검했다.
이 경우 어떻게 반응하는 게 알맞은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적절한 해답을 도출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티브로 삼는 건 그나마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온 비비앙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근원은 두 개의 상황을 상정할 수 있었다.
1. 김수현이 왔을 때 비비앙의 반응.
2. 김수현이 아닌 타인이 왔을 때 비비앙의 반응.
전자의 경우, 비비앙의 골반이 갑자기 현란하게 움직였었다.
후자의 경우, 비비앙은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거의 비슷한 태도를 보였었다.
몇 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근원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사실 근원은 어째서 김수현이 올 때마다 비비앙의 엉덩이가 요사해지는지 일말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눈꼬리를 올리고, 고개는 빳빳이 쳐들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다리도 꼬고….
그 모습을 백한결이 ‘한 번 말해보라.’ 라는 의미로 이해한 건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한동안 주저주저하더니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혹시 예전에 숲에서…. 기억나세요? 저희가 처음 만났던 장소요.”
근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있잖아요. 숲에서 안개가 몸을 감쌌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몸이 변했던…. 안개의 숲이라고 했었나?”
안개의 숲.
근원이 머리를 작게 끄덕거렸다.
“아, 기억하시는군요! 그럼 혹시 그 숲을 감쌌던 안개도 기억나세요?”
“……?”
“그 안개, 또 만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
근원의 눈이 반짝였다.
*
병아리로 변신한 아내들에게서 벗어난 건 정오가 다 돼서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집무실로 돌아왔으나, 어쩐 일인지 세라프가 사라져 있었다.
새벽 때만 해도 심한 열병에 시달리며 계속 신을 찾더니, 침대는 하얀 시트만이 곱게 개어져 있다.
남아 있는 것은 네모나게 접힌 쪽지 하나뿐.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소환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흠.
그러고 보니 세라프의 필체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외견만큼이나 세련되고 아름다운 글씨체다.
어쨌든 괜한 일로 오라 가라 할 성격은 아니고, 우선 소환의 방으로 가는 게 낫겠지.
주변을 구경하며 걸으니 신전은 금방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애틀랜타의 아침 일상은, 뭐랄까.
딱히 특별한 건 없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기는 오 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아니, 이곳 시간으로는 사나흘에 불과하던가.
포탈을 뚫고 소환의 방으로 들어서자, 잿빛 제단에 반투명한 날개가 일렁거리는 중이었다.
쪽지를 보기는 했지만 세라프가 자리에 있는 걸 보니 까닭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사용자 김수현.”
고요한 음성.
어제와는 달리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이제 좀 괜찮은 거야?”
웃으며 팔짱을 끼자, 세라프는 짧은 숨을 터트렸다.
“소환의 방에서는 제 권능이 일부나마 회복됩니다.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저항이라…. 밖에서는 어땠는데?”
세라프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느낀 바를 말하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안기고, 응석 부리고 싶었습니다.”
오호.
“자.”
양팔을 한가득 벌리자, 벌떡 일어선 세라프가 환하게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곧 엉거주춤 몸을 멈추더니 실눈으로 날 곱게 흘긴다.
“농담이라도 그러지 마십시오.”
“왜, 싫어?”
“사용자 김수현. 저는 지금 진지합니다.”
“…그 정도야?”
살짝 화난 듯한 목소리였다.
다시 제단에 앉은 세라프는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변화는 예상했지만…. 이 경우는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아마 수현도 인지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만.”
이번에는 안쓰럽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음….”
내게 생긴 변화.
그리고 그 변화가 주변에 미치는 영향.
세라프의 말대로 확실히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실생활에 지장이 생겼을 정도니까.
또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여하튼 장난칠 분위기는 아니라 얌전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나저나 역시 세라프라고 해야 하나.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해후를 나누기보다는, 내 몸부터 걱정한다.
조금이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는 동안 고개를 끄덕거리던 세라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사용자 정보부터 개방해보시겠습니까?”
============================ 작품 후기 ============================
생각보다 많이 늦었습니다. ^^;
전례가 있는 만큼 아마 많은 분들께서 걱정하셨을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한 달이나 두 달이나 무언가 사건이 생기면 꼬박꼬박 공지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외전은 다음 주 안으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_(__)_
어설픈후니 / 하하. 그렇다기 보다는, 이후에 일어날 사건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파란가오리 /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것과 관련해서도 하나의 에피소드가 구상돼 있습니다. 크게 보면 이번 백한결 사건 이후 이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태성쉪 / 물론 나옵니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은 만큼 여러 에피소드에 나눠서 중점적으로 등장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해솔님 / 수현의 카리스마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유효합니다. 기대해주세요!
못난리자 / 물론이죠.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수나와 연관시켜 등장시킬 계획입니다.
라우넬리스 /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조아라 말고 갈 곳이 없어요…. ㅜ.ㅠ
들마로 / 안솔은 김수현과 더불어 유일하게 EX급 사용자니까요. 후후.
샤티엔 / 니뮤에, 오벨로 기사단. OK. 접수했습니다. 오벨로 기사단도 잘 적으면 재밌을 것 같아요.
UrDREAM / 아니요. 하하; 저는 지극히 신체 건장한 남성입니다!
에르반테스 / 정하연은 조강지처 노릇을 했습니다. 아마 1, 2회 후면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게 될 겁니다. 🙂
도즈 / 네. 사실 제 욕심으로 많은 부분이 바뀔 예정이라, 천천히 진행해 나가는 중입니다. 연재 중 아쉬웠던 점이 많은 만큼, 보완할 것도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