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emo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27
광마전생 (27)
오랜만에 입을 연 호태산은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끄집어내서 불었다.
듣자 하니 호태산은 명분만 장로일 뿐 사실상 흑천이 휘하에 있는 문파들을 관리하기 쉽게 만들어 둔 일종의 장치였다.
권력을 주고 충성을 요구하는 아주 기본적인 방법.
흑천은 총 열두 명의 장로로 구성되어 있고 육 번에서 십이 번까지가 전부 한 문파나 단체의 주인들이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흑도. 이렇게 삼파전을 만들려고 한 건가.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그 도원영이라는 녀석……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말이야. 실력자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고…….”
혼잣말을 하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고민하는 그때.
똑똑.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오기 전부터 누가 밖에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나를 독대하러 올 만큼 간이 큰 놈은 가야허와 백리강 두 놈뿐이었고 한참 바쁠 이 시간에 올 만한 사람은…….
“백리강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찾아온 이유도 알고 있다.
자신을 백리세가에 보내 달라는 거겠지.
사실 나도 처음에는 백리강을 조금 부려 먹은 뒤 백리세가로 다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이 녹림의 산적들과 부대낄 만한 성격도 아니었고 백리세가가 그 통합무림인지 뭔지에 속해 있는지도 알지 못했으니까.
무공이 고강하여 옆에 두고 싶은 그런 인재도 아니었기에 살려 준 목숨값만 받아 내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부 정리.
딱히 시킬 것도 없어서 대충 던져 준 일감이었는데 원래 회계 담당자였던 홍봉도와 채주인 홍송도가 감탄할 정도로 그녀는 장부 정리의 신이었다.
어찌나 꼼꼼한지 빠트리는 게 없었고 설사 누락되는 게 있으면 귀신같이 찾아냈다.
나는 커다란 단체를 꾸리는 데 있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군, 저는 주군의 밑에서 평생 일하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파의 후기지수이자 백리세가의 후계자. 제가 없으면 백리세가를 이을 후계가 없어지기 때문에 저는 저희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꼭 돌아가야만 합니다.”
역시 예상했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그녀의 눈에서는 ‘이번에야말로 꼭 돌아간다’는 결의가 보였다.
“흠…….”
통합무림은 아무리 내가 혼자 날뛴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그런 놈들을 박살 내려면 단체가 필요하고 단체를 운영하려면 그만한 인재가 필요한데 지금 눈앞에 있는 백리강은 가야허의 ‘눈치’에 못지않은 ‘장부’의 인재였다.
당장 힘으로 눌러 계속 부려 먹을 수도 있지만, 그 방법이 장기적으로 봤을 땐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여자잖아? 근데 무슨 가문의 후계를 잇는다는 말이지?”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제 사연도 그렇다고 이해해 주시면…….”
“뭐, 그럼 여자가 여자랑 혼인해서 아이를 낳겠다는 건가? 그런 능력이 있어?”
“그, 그건…… 아버지께서…….”
“자네 아버지는 신이라도 되는가 보군 여자들끼리 만나서 후사를 잇게 하겠다니. 아, 자네 아버지를 모욕하는 건 아니야. 신기해서 그래, 신기해서.”
얼굴이 불그락해진 백리강을 보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앞서 말한 것들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충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쫓길 이유가 있나? 여차하면…… 아니지, 아니야. 기린아, 무림맹주를 하면서 그렇게 데였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건 아니겠지?
“만일 보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지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죽음을 불사하겠다?”
“예.”
백리강의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어쩔 수 없군.”
내 말에 백리강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보내 주시는 겁니까?!”
“어. 그렇게 가고 싶다니 어쩔 수 없지, 뭐. 다 같이 삼도천으로 보내 주는 수밖에.”
“예?”
나는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진다.
모용진은 가지고 싶은 건 모두 가져야 성미가 풀리는 천기린이니까. 그리고 백리강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가지고 싶은 인재다.
“넌 지금 녹림의 이인자. 즉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지. 내가 그런 너를 그냥 ‘아, 그래. 잘 가고, 행복하게 살아.’ 하면서 보내 줄 줄 알았나? 호태산 봤지? 사람이 완전 개가 된 거. 녹림왕이라는 사람도 개로 만들었는데 살인멸구(殺人滅口) 하나 못 하겠어? 그리고 난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널 죽였다는 걸 알면 백리세가에서 분명 날 귀찮게 하겠지. 그러니까 백리세가도 그날로 끝. 너랑 같이 삼도천으로 보내 줄게.”
“그런…….”
“왜? 못 할 거 같아? 흑도지만 백리세가보다 몇백 배는 더 큰 녹림도 하루 만에 집어삼킨 게 바로 나야. 명문정파라고 하지만 오대세가에도 못 드는 백리세가를 중원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백리강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내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백리강이 본 호태산과 광천악은 거의 화경에 달하는 고수.
그런데 나는 그런 호태산을 개처럼 부렸고 광천악은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백리청 역시 초절정에 달하는 고수였지만 호태산보다 강하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게 현실일 것이다.
“잠…… 잠깐…….”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게 흘러간다고 느꼈는지 백리강이 황급히 손을 들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그때.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끊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냐. 보다시피 녹림을 개과천선하게 만들었고 산적들 틈에서 죽을 뻔한 널 구해 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난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성미가 풀리거든.”
“예……? 갖고 싶은 거라니…… 설마?”
백리강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고 나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저저, 저요?! 저, 저는 아직 그그그그, 그런 쪽의 마음의 준비가…….”
얼굴이 붉어지며 황급히 몸을 감싸는 백리강.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는 나의 눈은 반쯤 죽어 있었다.
“남장하고 다니는 변태녀 주제에 뭔 상상을 하는 거야. 나도 눈이라는 게 달려 있어서 예쁜 사람을 좋아하지, 너 같은 못난이는 한 부대를 갖다준다고 해도 필요 없거든?”
“남장 변태…… 못난이…….”
“아. 뭐, 그건 됐고. 하여튼 백리세가의 가주 즉 네 아버지가 백리청이라고 했지? 그분 좀 내가 만나 봐야겠어.”
끼이익.
문을 닫고 나온 백리강은 살짝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용진이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니 뭐니 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남장 변태…… 못난이라니…….”
후기지수들 중 그녀의 실력이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잘 쳐줘도 중간 정도.
하지만 그가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항상 일 위에 머물고 있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외모였다.
남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미녀들보다도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이가 바로 백리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얼굴에 관한 자부심 하나만은 하늘을 뚫고 있었는데 오늘 모용진의 한마디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다.
“하하…… 하하…… 내가 못난이라니…… 하하하…….”
자신의 아버지와 모용진이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백리강이었다.
* * *
“뭐? 독각사가 사라져?!”
쿵!
장내를 휘감은 짙은 살기에 당하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당철삼은 크게 분노했다.
그 한 쌍의 독각사는 통합무림이 된 기념으로 천마가 직접 보내 준 영물이었다.
독각사는 마교가 보낸 우호의 표시이자 그 독각사의 새끼를 취한 뒤 몇 년 뒤엔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이게…… 후으…… 그럼 두 마리 다 죽은 것이냐? 새끼는? 새끼든 뭐든 흔적이 남아 있을 것 아니냐!”
“그, 그것이…… 제가 직접 사굴에 내려갔으나 그 어떤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뱀들의 시체는 있었지만…….”
당연히 흔적이 남을 리가 없었다.
모용진이 조금이라도 더 독각사의 효능을 보기 위해서 뼈까지 가루를 내 사용했고 날카로운 이빨은 도구로 쓰다가 심하게 닳아 얼핏 보면 새하얀 돌덩어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럼 지금 그 독각사들이 하늘로 솟았다는 것이냐! 아니면 땅으로 꺼졌어? 내가 널 그곳으로 보내 찾아오게 만들어야겠느냐!”
“아…… 아닙니다! 소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독각사들을 찾아오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반드시!”
독왕 당철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당하경은 빠르게 뒷걸음질 쳐 그곳을 벗어났다.
“가, 가자!”
수행원들을 이끌고 도망치듯 전각을 벗어나는 당하경.
당철삼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당진서.”
“예, 독왕이시여.”
아무것도 없던 천장에서 검은 인영이 떨어져 내리더니 당철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명교의 장로인 자네가 보긴 어떤가. 방금 하경이가 거짓말을 고한 것인가?”
당철삼이 묻는 것은 당하경이 독각사를 취한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거짓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은 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당신의 아들인 당하경 공자는 그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명교라는 사파에서 온 외인이 아비의 앞에서 아들의 흉을 보는 것이었지만 당철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진서는 당철삼에게 그 정도로 신의를 얻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겠지. 내 아들이니까 말이야. 당분간 부탁하네. 혹시 딴짓을 한다면 바로 나에게 전달해 주게.”
“존명(尊命).”
당진서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혼자남은 당철삼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달아나듯 걸음을 옮기는 당하경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아무리 내 새끼라고 해도 통합무림(通合武林)에 해가 된다면 제거해야겠지. 자손은 더 만들면 그만이니까.”
* * *
제일차 녹림 회의 이후.
모용진은 육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회의를 연 적이 없었다.
한번 모두를 모아 ‘산적질 금지! 착하게 살아라.’라고 말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고 실질적인 회의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육 개월 동안 보인 행보도 딱히 없었다.
일차 회의 때에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보이며 중원 무림을 박살 내겠다 하고, 흑도를 지배하는 흑천을 무너뜨려 자신이 ‘흑제(黑帝)’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에 비해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기엔 중경녹림이 더 이상 산적질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포부에 비하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진짜 그는 녹수각(綠秀閣) 안에 박혀만 있었고 가끔 정원에 나오는 것도 호태산을 개처럼 가지고 놀 때뿐.
직접 만나러 가지 않으면 얼굴도 보기 힘든 이가 바로 모용진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제이차 녹림 회의를 소집했다.
중경녹림의 중추가 되는 모든 인물들이 착석한 회의장.
그곳에는 일차 녹림 회의에 참석한 인물들은 모두 있었고 그때는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적림단주와 풍림단주까지 참석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저번처럼 그 말도 안 되는 걸 또 이야기하려는 건가?’
하도 모용진이 아무것도 하지 않자 이제 일차 회의 때 모용진이 했던 말을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지금 모용진의 자리는 비어 있지만 그 옆 바닥에 개처럼 앉아 있는 호태산의 모습을 보면 모용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아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내가 못난이라니…….’
‘오늘은 또 어떤 안건을 제시하시려나!’
‘제발 빨리 끝나라…… 죽엽청이나 한 사발 때리게.’
‘아, 수련이나 하고 싶다아…….’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하는 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가야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두 손을 모았다.
“중경녹림의 패왕! 흑제(黑帝) 모용진 님이 입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