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emo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74
광마전생 (74)
씻겨 준다는 말.
내 것이라는 말.
그리고 사악한 미소와 아프진 않을 거라는 말.
왕세진은 오늘이 언젠가는 찾아올 자신이 순결을 잃고 더렵혀지는 날이라 생각했다.
암살자로 만일 붙잡히게 된다면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해 왔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제로는 무서워도 너무나 무서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모용진은 외모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할 줄 모르는 왕세진을 기다린 것은 거대한 약탕이었다.
“응? 읇륿프릅릏릅!”
약탕을 보자마자 괴상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끝까지 약탕에 담가진 그녀는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통해 전달돼 오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매일 마주하던 지네는 평범한 지네가 아냐. 엄청난 맹독을 가진 지네 중의 하나지. 그 지네가 매일 몸을 누비고 다녔으니 몸이 성할 리가 있나.”
“쿨럭. 그럼 씻겨 준다는 건…….”
“독을 씻겨 준다는 거지. 설마 몸까지 내가 직접 씻겨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
“무,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그 통 안에서 얌전히 있어라. 곧 시비가 와서 몸을 씻겨 줄 테니까. 혹시 모르니 마혈은 나중에 풀어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곤 모용진은 정말로 자리를 떴고 잠시 후 여자 시비가 들어오더니 자신의 몸을 꼼꼼하게 씻겨 주기 시작했다.
“당신도 저 이여립의 수하인가? 아니면…….”
왕세진은 열심히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비는 정말 몸만 깨끗하게 씻겨 주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혔고 잠시 후 몇 사람이 더 들어와 그녀를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묘한 냄새가 나는 기루였다.
홍혜아라고 적힌 기루.
혹시 자신을 기루에 팔려고 하는 건가 싶었던 왕세진이 눈을 크게 떴지만 잠시 후 그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루의 삼 층. 화려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거워 보이는 장소.
다른 곳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곳에 끌려온 왕세진은 거칠게 그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크윽.”
바닥에 쓰러지며 내팽개쳐진 왕세진.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전에 앉아 있는 모용진과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교가 사천당가를 흡수했고 곧 곤륜에 큰 위기가 닥칠 거다. 그런 말인가?”
“예. 이미 마교는 많은 무기를 사들였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소리 소문 없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당가를 손에 넣었지요. 그 세를 반절은 부풀렸으니 곧 곤륜을 치려 할 게 분명합니다.”
“음…….”
청화의 보고에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서 급하게 이들을 불러 모았고?”
“불러 모은 것은 아니지만 서신을 보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흑제 님이 내려 주신 은혜를 갚을 기회라며…….”
한걸음에 달려왔다는 그들은 다름 아닌 섬서와 감숙에 위치한 전 녹림도이자 지금의 흑천파 사람들이었다.
섬서녹림과 감숙녹림의 현 채주들인 장영성과 막첨.
둘은 함께 나란히 모용진의 앞에 서더니 무릎을 꿇었다.
“섬서녹림채주 장영성이 흑제를 뵙습니다.”
“감숙녹림채주 막첨이 흑제를 뵙습니다.”
이들이 현 채주인 이유는 전 채주들은 모용진의 말에 반발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용진이 아닌 흑천파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지만.
“이렇게 달려와 줘서 고맙지만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을 것 같군. 온 김에 술이나 왕창 먹고 가.”
“할 일이 없다니요? 지금 당장 곤륜을 구하러 가도 모자랄 시간에…….”
“제갈영 군사,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
모용진의 말에 제갈영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모용진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곤륜과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뿐, 아직 정식으로 정해진 게 아니야. 소공자인 진가은이 함께하고 있지만 아직 곤륜파와 이야기가 된 것은 없다.”
“하지만…….”
“제갈영, 착각하지 마. 우린 명문정파가 아니니까. 널 구해 낸 사람이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라면 당장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 내 목적은 오로지 통합무림일 뿐이니까. 그리고 흑천파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 낸 나의 문파고.”
모용진의 말에 제갈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곤륜을 전면적으로 도와주는 일이 흑천파에겐 해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흑천파는 어디까지나 어둠에서 몰래 움직이고 있는 집단.
게다가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를 악물고 제갈영이 물러나는 그때.
그녀의 귀에 모용진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곤륜을 버리자는 건 아니야. 곤륜은 마교와 서장과 맞닿아 있는 청해의 수호자. 게다가 내 제자이자 친우인 진가은의 가문이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곤륜은 아직 공격받지 않을 거란 뜻이다.”
“어째서죠……? 곤륜을 무너뜨리는 것은 마교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곤륜을 뒷받침해 주던 사천당가라는 큰 세력마저 손에 넣었으니 지금이 가장 공격하기 좋은 적기일 텐데 말입니다.”
제갈영의 질문에 모용진은 피식 웃어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에 다가갔다.
“그게 마지막 시험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마교는 한동안 곤륜을 치지 않을 거야. 지금 그들을 치기에 아주 좋은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지. 그 이유를 알아 오는 게 네게 내 주는 마지막 시험이 될 거야. 한번 잘 생각해 봐.”
제갈영의 어깨를 두드리고 지나간 모용진은 그대로 쓰러져 있는 왕세진을 향했다.
왕세진은 지금의 상황을 보고 너무나도 놀라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제갈영과 하오문의 청화 유미옥.
그리고 섬서와 감숙에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초고수 장영성과 막첨까지.
모두 모용진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뒤에 도열해 있는 녹림도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은월령의 암살자로 돌아다녔던 왕세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여기 있는 자들이 조금만 힘을 발휘한다면 섬서 내의 중소 문파 정도는 하룻밤 만에 쉽게 사라지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 씻고 오니까 많이 괜찮아졌는데. 도화야.”
“예, 흑제 님.”
모용진의 부름에 청화의 뒤에 서 있던 심도화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왕세진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도 왕세진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저 모용진이 신경 쓰지 말라고 명령했을 뿐.
모용진은 심도화를 시켜 모두의 앞에 서게 하더니 혈도를 짚어 마혈을 풀어 주었다.
마혈이 풀리는 그 순간.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왕세진은 은월신보를 극한으로 펼치려 했다.
은월신보의 은보는 극강으로 펼친다면 은월신보 이외에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모용진이 은월신보를 펼치긴 하지만 자신이 먼저 기다렸다는 듯이 극한으로 은월신보를 밟는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그녀였다.
하지만 보법을 밟은 직후 왕세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병장기.
파바바박!
자신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 앞을 가로막은 이들은 바로 여섯 명의 여성들이었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여성들.
그들은 바로 청화 직속 정보단 ‘흑영단(黑影團)’이었다.
검은 안개와 같이 내려앉은 그들은 왕세진의 주변에 창을 내리꽂았고 그 여섯 개의 창대에 끼인 왕세진은 허공에 떠 있었다.
“뭐,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너무 예상대로 움직이는 거 아냐?”
“이럴 수가…….”
“왜? 뭐가 그렇게 놀랍길래 그래? 세상에서 네가 제일 빠른 줄 알았어?”
모용진의 말에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돌려 모용진을 쳐다봤다.
“어떻게…… 어떻게 전부 은월신보를 익히고 있는 거지? 이건 은월령에서만 내려오는……!”
은월신보는 은월신보를 사용하는 자만이 알아볼 수 있다.
왕세진은 한눈에 깨달은 것이다.
자신을 붙잡은 이들이 모두 은월신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은보를 극성으로 펼친 자신의 몸놀림을 붙잡을 정도로 빠른 기보로.
믿을 수 없다는 왕세진의 목소리에 모용진은 보란 듯 은월신보의 보법을 밟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건 내가 가르쳤어. 물론 은월신보 자체를 가르친 건 아니야. 그들이 익힌 건 조금 다른 보법이지.”
“그게 뭐지……?”
“은산신보. 내가 직접 은월신보를 개량한 보법으로 우리 흑천파의 기본 보법이야.”
* * *
왕세진이 은월령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솔직히 내심 나는 기뻤다.
왜냐하면 은월신보는 소피두가 죽고 난 뒤 천기린도 죽음으로써 그 명맥이 끊겼다고 생각했으니까.
천기린인 내가 죽으면서 당연히 은월령도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월령은 건재했다.
소피두와 천기린이 죽었음에도 살아남은 것이었다.
내가 소피두를 때려서 은월신보를 뺏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두들겨 팬 이유는 이런 엄청난 보법을 도둑질 같은 좀스러운 곳에만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은월령이 이름만 들으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 은월령은 고아들이나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주는 곳이었다.
소피두가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하다 대도가 되었던 이유.
그 이유가 바로 은월령이었다.
버려진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키우기 위해서.
그 사실을 안 나는 은월령을 손수 거두었다.
더 이상 소피두가 은월신보라는 엄청난 무공으로 좀스러운 짓을 하지 못하게.
소피두가 지키던 보육원에 은월령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바로 나였다.
나는 은월령에게 지원을 해 주는 대신 소피두에게 은월령의 아이들에게 은월신보를 가르치게 했다.
무공이 고강하지 않아도 뛰어난 보법이 있다면 어디에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소피두가 죽은 것은 내가 죽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사인은 모른다.
그저 죽었다는 것만 알려져 왔을 뿐.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은월령은 자연스럽게 무림맹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도 사망했다.
그래서 나는 은월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만든 것이니까.
그 더러운 공성 대사 같은 놈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은월령은 아직 존재했다.
그것도 왕세진이라는 이렇게 뛰어난 암살자를 배출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암살자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고 어떻게 은월령이 살아남은 건지는 모르지만 지금부터 차차 캐물으면 될 것이다.
왕세진이라는 은월신보의 새로운 후계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