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emo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75
광마전생 (75)
아쉽게도 일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왕세진과 독대의 시간을 가지고 그녀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함께 은월령으로 가시죠. 그럼 모든 게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질 테니.”
왕세진은 그렇게 제안했고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왕세진은 곧바로 출발하자고 했지만 나는 곧 있을 백호비무제(白虎比武祭)에 나가야만 했기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물론 왕세진은 도망가지 않겠다며 풀어 달라고 했지만 나는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백호학관으로 돌아왔다.
인피면구를 복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그런 끔찍한 물건을 잘도 사용한다? 사람의 가죽을 벗겨 만든 가면이라니. 아무리 나라도 조금 꺼려지는걸.”
“이름만 인피면구일 뿐. 요즘은 사람의 얼굴로 만들지 않아.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 조금 투박하긴 하지만 피부가 거친 남자로 변장하기엔 나쁘지 않지.”
왕세진은 내가 곁에 두고 감시하기로 했다.
당연히 진가은에게도 그녀의 정체를 알렸고 진가은은 크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왕세진이 여자라고?”
하지만 진가은도 금세 납득했다.
본인도 여자라고 많은 오해를 받아 왔었으니까.
“그나저나 왜 반말이야. 그전엔 잘도 형님 형님 하더니만.”
“흥. 이제 그럴 필요가 없잖아? 내가 누군지도 알고. 그리고 그 나이라면 내가 누님이라고. 난 올해로 스물여섯이니까. 알겠어?”
“뭐, 진가은에게 그러는 건 인정하겠다만 나는 알다시피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데?”
“흥. 난 아직 네 말을 믿지 않는다고. 내 말투에 불만이 있으면 빨리 은월령에 가서 인정을 받던지.”
무슨 인정을 받으라는 건지.
왕세진은 그날 이후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어쩌면 옛날이 더 좋다고 생각될 정도로.
물론 본모습인 그 예쁜 여성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의 말투도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왕세진은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도 그 폭풍다변 왕세진의 모습으로 저런 말투를 하고 있으니 굉장히 화가 난다고 할까.
“그럼 이제 숙소로 돌아갈까. 수업도 전부 끝났으니.”
“오…… 드디어 해방이구나.”
왕세진의 방은 우리와는 다른 기숙사에 있었다.
조금 걸어서 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는 기숙사.
드디어 해방이라며 뛸 듯이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응, 안 돼. 못 가.”
“못 간다니? 그게 무슨…….”
“당연히 우리랑 같이 지내야지. 잊고 있었나 본데 넌 나한테 잡혀 있는 중이라고? 고독으로 널 통제하고 있다지만 언제 도망칠지 어떻게 알고? 이미 사감님께는 보고 드렸어. 백호비무제 대비 무공 수련을 이유로 같이 합숙한다고. 관주님도 승인하셨어.”
“그, 그런……! 지금 남자 기숙사에 여자를 데려가는 거라고! 그건…….”
“애초에 너 학관에 ‘남자’로 들어왔잖아? 문제 될 게 있나?”
나는 안 된다며 도망가려는 왕세진의 목 뒤를 잡고 기숙사로 돌아왔고 그녀를 방구석에다가 던져 놨다.
“거기가 당분간 네가 지낼 자리. 백호비무제가 끝날 때까지만 조용히 지내자.”
“자, 잠깐. 내 침상은? 지금 날 바닥에 재울 셈이야?”
“그거야 당연하지. 침상이 두 개뿐인데 하나는 내 거고 하나는 가은이 거니까. 천장에 매달아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그…… 그런……!”
왕세진이 뭐라고 또 하기 전에 나는 바닥에 네모반듯한 선을 그어 주었다.
딱 왕세진이 웅크려서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
나무를 마치 칼로 베듯이 자르는 내 손가락을 보며 왕세진이 깜짝 놀라더니 뭐 하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공간이야. 물론 우리도 들어갈 생각이 없고 너도 나와서는 안 되는 곳이지. 만일 거기서 벗어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보다시피 나는 남자고. 저기 미인도 일단은 남자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그곳에서 나오지 말라고 협박한 것이었고 왕세진은 나를 혐오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같이 있다가 사고가 발생하지 않게 미리 조치한 것이었다.
아무리 왕세진이 남성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고 해도 여자였고 진가은이나 나나 건장한 남자였으니까.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잠에서 깬 다음 날.
나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손으로 느껴지는 말랑한 느낌.
조심스럽게 눈을 뜬 내 앞에 있는 것은 왕세진의…….
퍽!
“쿠엑!”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가 버렸다.
인피면구를 벗은 왕세진이라면 몰라도 남자 왕세진의 얼굴이 코앞에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다짜고짜 자는 사람의 얼굴을 패?!”
“네놈이야말로 무슨 짓이지? 분명 내가 그려 준 공간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감히 내 앞에 사내놈의 얼굴을 들이밀어?!”
나는 그때의 촉감이 어느 부위의 촉감인지 알지 못했다.
알기도 전에 왕세진의 얼굴을 날려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좋은 기분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제 왠지 부드러운 것만 잡으면 그 얼굴이 떠오를 것 같은…….
그다음 날에도 왕세진은 집요하게 침대 위로 올라왔다.
놀랍게도 이는 그녀의 의사가 아니었다.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까.
그녀는 그저 편한 잠자리를 찾아 들어온 것이고 이는 거의 몽유병에 가까웠다.
차라리 진가은과 같이 자겠다고 했지만 진가은은 단호한 얼굴로 내 부탁을 거절했고 왕세진은 다시는 안 올라온다면서도 매번 아침이 되면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포기했다.
그렇다고 내가 바닥에서 자거나 바깥에서 잘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오히려 그녀가 원하는 걸지도 몰랐다.
잠시 나가 있는 사이 도망갈 수 있을 테니까.
뭐, 원래라면 잠을 잘 필요가 없어 왕세진을 끌고 나가 수련을 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곧 개최될 비무제 때문인지 연무장은 출입 금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호비무제가 개최되는 당일 아침.
“진짜 암살자가 맞긴 맞나…….”
왕세진은 또 내 침대로 기어 올라와 있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픈 인피면구를 낀 채로.
벗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지만.
퍽!
마치 일상처럼 왕세진을 날려 버린 나는 그녀의 성화를 뒤로한 채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있자 진가은도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은아.”
“응?”
“내가 없는 동안 이 녀석 좀 잘 보고 있어. 혼자 놔뒀다간 도망갈지도 모르니 묶어 둬도 좋고.”
“뭐?! 내가 도망가려고 마음먹었으면 벌써 도망가고도 남았거든?”
내 말에 왕세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지만 귓등으로 흘려 버렸다.
“내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그래. 아 참. 그리고 비무제가 끝나면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미리 자리 좀 마련해 둬.”
“자리?”
“하태벽 학생주임. 곧 곤륜에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질 것 같아서 말이야.”
학생주임의 이름을 거론하자 진가은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예선을 치르러 가 볼까.”
* * *
백호비무제(白虎比武祭).
관주가 직접적으로 주최하는 백호학관 최고의 비무제로 반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유서 있는 비무제다.
예선부터 시작하여 결선까지 단 한 번의 패배로 떨어지게 되는 승자 위주의 비무로 이 비무제의 결과로 백호학관 백대고수가 정해졌다.
그 백대고수를 정하는 데에는 여러 심사관의 평가나 비무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그중 최고가 되는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우승.
말 그대로 모두를 꺾고 그 위에 올라선다면 백호학관의 일대고수. ‘백호군(白虎君)’이란 별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모용진은 지금 연무장 위에 서 있었다.
수많은 관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새로운 도전자라는 이름으로.
본선 첫 비무.
상대는 아흔여덟 번째 고수 강량.
그는 구파일방 중의 하나인 공동파(崆峒派) 출신으로 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어제 치러진 예선에서 극한의 지루함을 겪었던 모용진이었기에 지금은 나름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마주한 백대고수 중 한 명이었고 게다가 명문정파인 공동파 출신이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재미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 그의 기대였다.
“백호학관 삼학년 공동파의 강량이다.”
“백호학관 이학년 이여립이라고 합니다.”
서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자 심판은 자연스럽게 비무장을 내려갔고 이는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과 마찬가지였다.
“네가 그 광견 이여립이군. 남궁박을 일격에 날렸다고 하던데 말이야.”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미친놈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검이 부드러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강량의 검을 타고 오르는 백색의 내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그것은 복마검(伏魔劍)을 사용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는 강량이 공동의 정수를 이어받을 정도의 수재라는 뜻이었다.
그 복마검의 아지랑이에 모용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오랜만에 비무 같은 비무를 벌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모용진은 무공을 익히는 것도 좋아하지만 익힌 무공으로 상대와 대련하는 것도 매우 즐겼다.
그가 무림맹주였던 시절 그는 심심하면 암행부를 불러 한 수 봐주겠다며 대련을 하자고 했고 그 대련을 못 이겨 결국 암행부에서 탈퇴한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랜 시간 복수를 위해 제대로 된 비무도 해 보지 못한 모용진이었으니 지금 이 시간이 매우 기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실력 발휘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실력이라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받아 줘야 뽐낼 수 있는 것.
여태껏 이여립을 쓰러뜨리고자 모용진을 찾아왔던 놈들은 그에게 있어서 짜증을 해소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잔뜩 기대하며 강량의 복마검을 기다리고 있는 모용진.
그런 그의 바람을 알았는지 강량이 먼저 거세게 대지를 박차며 날아들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백색 내기에 휘감겨 모용진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강량의 검.
콰작!
“오오!”
“저것이 바로 공동파의 복마검!”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마를 무릎 꿇린다는 그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니었어!”
그 강대한 내기와 연무장을 흔드는 위력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처음 그 광경을 접한 이들은 감동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검을 마주하고 있는 모용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마치 똥을 씹은 듯한 표정.
모용진이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는 강량의 공격이 너무나 위협적이라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게…… 복마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