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emo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85
광마전생 (85)
대화를 나누기 위한 대화.
어딘가 이상한 문장 같지만 앞의 대화는 몸의 대화였고 뒤의 대화는 말로 하는 대화였다.
“언…….”
모용진의 손에 붙잡힌 왕세진이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모용진이 빠르게 그녀의 아혈을 짚으며 말을 봉쇄시켜 버렸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모용진의 되물음에 표정을 잔뜩 찡그린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겠다.”
붉은 머리카락의 그녀가 교섭에 응하자 왕세진이 발버둥 쳤지만 진가은이 황급히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그래. 잘 붙들고 있어 줘.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모용진이 눈치 빠르게 움직여 준 진가은을 향해 곁눈질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모용진은 다시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단 교섭 전에 알려 두도록 하지. 왕세진……이 본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우리가 붙들고 있는 그녀는 지금 독을 삼킨 상태다.”
“독?”
“너도 은월령의 일원이라면 잘 알 거야. 고독 알지? 지금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그 고독을 터뜨릴 수 있어. 그럼 왕세진은 내장이 녹는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 치다가 죽게 되겠지.”
“……원하는 게 뭐냐.”
말투는 덤덤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절정의 고수인 진가은의 몸이 마구 떨릴 정도의 살기.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살기에도 모용진은 눈 하나 껌뻑하지 않았다.
“내기하자.”
“내기?”
“그래 내기. 난 내기를 하는 걸 참 좋아하거든. 어찌 됐든 실력이 더 좋은 자가 모든 것을 갖게 되는 거잖아?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야.”
“좋다.”
“아직 내기의 내용도 정하지 않았는데?”
“좀 더 넓은 곳에서 널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모용진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인질이 잡혀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절대 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까.
곧바로 나가자는 그녀의 손짓에 모용진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쉽지만 나는 내기를 할 때엔 모든 조건을 걸고 하는 편이라 말이지. 끝까지 들어 주겠어?”
“…….”
그녀가 대답 대신 해 보라는 듯이 턱짓을 했고 모용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풀어냈다.
“우선 네가 잊고 있는 듯해서 말해 주는 건데. 고독의 사용자가 죽어 버리면 고독을 먹은 자도 죽게 되는 건 알고 있지? 그러니 만약 네가 이긴다면 왕세진의 몸의 고독을 제거해 줄게 덤으로 내 목숨까지 거두어 가도 좋아.”
“……그렇군. 그럼 네가 이기면 날 죽여라. 그거면 된 것 같군.”
“아니. 나는 그것보다 다른 걸 요구할 생각인데.”
다른 걸 요구한다는 말과 함께 모용진의 손가락이 그녀를 가리켰다.
“뭐지, 그 손가락은?”
“너. 만일 네가 패배한다면 그 순간부터 넌 내 것이 되는 거야.”
“그러지.”
놀랍게도 그녀는 단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며 대답했다.
그 빠른 대답에 오히려 놀란 모용진이 눈을 크게 뜨자 그녀는 이제 그만 나가자는 듯이 몸을 돌렸다.
“어차피 내가 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과 함께 밖으로 나온 모용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기숙사 전체를 둘러싼 뿌연 안개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시선들.
은월령에서 찾아온 것은 단 네 명이 아니었다.
족히 서른 명은 넘는 듯한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졌고 그들의 눈은 온통 모용진을 향해 있었다.
“안내해라.”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의 차가운 목소리에 모용진은 왕세진을 붙잡은 진가은을 앞장세웠고 바로 뒤에 붙어 따라갔다.
그렇게 그들은 조용하게 기숙사를 빠져나갔고 별일 없이 이동한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호원에 마련된 연무장이었다.
“이제 슬슬 여기도 익숙해지는 느낌이란 말이지.”
연무장에 올라선 모용진과 붉은 머리의 여성.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는 여성의 눈빛에 모용진은 먼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는 이여립이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지만 내 본래의 이름은 모용진이라고 한다. 출신은 바닥. 호칭 따위도 없어.”
암살자와도 같은 이를 앞에 두고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이는 일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기에 보고 있던 진가은과 왕세진의 두 눈이 크게 떠졌지만 놀랍게도 상대방 역시 예를 갖춰 포권을 취했다.
“은월령의 비사(飛司) 홍련(紅蓮)이다.”
“홍련이라…… 이쁜 이름이네.”
서로의 고개가 들어 올려지는 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의 신형이 길쭉하게 늘어졌다.
홍련의 붉은 신형과 모용진의 백색 신형이 얽히며 울려 퍼지는 병장기의 울음소리.
그렇게 서로를 스치고 지나간 둘의 표정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담담했던 모용진의 얼굴은 희열에 가득 찬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에 반해 홍련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자검(隱刺劍)……. 네놈이 어떻게 이걸……?”
모용진과 잠시 스쳐 지나가면서 나눴던 여덟 번의 합.
단순해 보였지만 홍련이 내지른 검은 은자검의 절초 중의 하나인 ‘진유이도(進流利道)’였다.
물 흐르듯이 나아간 그 자리에 날카로운 검흔을 남기는 초식으로 내뻗는 검이 너무나도 은밀하여 웬만한 무림의 고수들도 쉬이 막아 내지 못하는 검이었다.
그런데 모용진은 그 검을 모두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홍련과 완전히 똑같은 ‘진유이도’를 사용했다.
마치 홍련을 희롱하듯이.
“궁금하다면 나한테 이기고 물어봐. 그럼 내가 모두 대답해 줄 테니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모용진의 검에 홍련은 깜짝 놀라면서도 소검을 들어 막아 냈다.
카앙!
묵직한 느낌과 함께 밀려난 홍련은 모용진의 검을 보고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묵직해 보이는 검.
마치 둔기와도 같은 그 검으로 진유이도를 펼쳤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게 검집이 아니었던 건가.’
“흐라압!”
모용진의 기합과 함께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묵직한 검.
하지만 홍련은 어느새 그곳에서 사라져 있었다.
홍련이 나타난 곳은 바로 모용진의 머리 위.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그의 뒤를 잡은 그녀는 소검을 아래쪽으로 돌려 잡으며 그대로 내려찍었다.
검기를 두른 채 모용진의 정수리를 향해 곧바로 내려찍힌 소검.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 있던 모용진의 검이 어느새 그녀의 얼굴까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앙!
“크헉!”
황급히 모용진의 검을 막아 낼 순 있었지만 내뻗은 손을 급하게 회수하다 보니 그녀는 내상을 입고 말았다.
홍련은 바닥을 구르듯이 하여 충격을 최소화해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생각보다 내상이 심했는지 비틀거렸다.
“아아. 미안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홍련에게 사과를 건네며 목을 긁는 모용진.
그를 바라보는 홍련의 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가 우습게 볼 만한 사내가 아니다. 최소 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 그리고 방금 전의 그 검은…….’
분명 모용진은 뒤돌아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날이 찔러 들어왔고 홍련은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심검(心劍)?’
검의 극의에 도달해야 쓸 수 있다고 알려진 검술의 전설로만 내려오는 경지.
하지만 이내 홍련은 고개를 저으며 소검을 세게 거머쥐었다.
“그럴 리가 없지.”
홍련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모용진은 그녀를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홍련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허리춤에서 소검 하나를 더 뽑아 들었다.
“오호, 쌍검술(雙劍術)?”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얕본 것은 사과하지. 일개 학관의 관도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으니까.”
처음으로 길게 말을 이어 가는 홍련의 모습에 모용진이 살짝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소검을 교차하며 들어 올리더니 모용진을 향해 몸을 낮췄다.
“은월령의 비사의 명예를 걸고, 그대에게 최고의 월령을 보여 주지.”
월령을 보여 준다는 말.
모용진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와라. 그 진심, 내가 모두 받아 줄 테니.”
모용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련의 검에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거칠게 소검을 감싸는 화염과 그녀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폭풍 같은 내기에 휘날리는 피풍의.
본연의 모습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강함.
그 강함을 표출하는 충격파가 한차례 퍼져 나왔고 그것은 모용진의 등골을 시원하게 자극했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걸까. 이 느낌”
홍련이 화경의 경지라는 것은 이미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은 그도 알지 못했다.
내공으로만 따지면 모용진을 가볍게 압살하고도 남을 정도였고 저 검에 흐르는 불길은 은월령의 것이 아니니 그녀의 고유한 무공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은자검으로 화경에 오른 것이 아니었구나. 하긴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긴 하지.”
처음 화경의 벽을 뚫었을 때를 회상하며 모용진이 검을 들어 올리자 홍련이 입을 열었다.
“그것으로 되었나?”
그러고 보니 어느새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은 모용진에서 홍련으로 바뀌어 있었다.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줘야 하는 성미를 가졌던 홍련이었기에 그녀를 기다려 줬던 그를 급습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인간적인걸. 처음에는 딱딱한 목석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쿵.
가볍게 내디딘 진각.
하지만 그 진각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는 모용진의 주변을 감싸 압박하고 있던 홍련의 기운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와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축을 흔드는 굉음.
그것은 두 화경의 고수가 동시에 바닥을 차며 생긴 것이었고 멀리 떨어져서 보던 진가은은 그 충격에 몸이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화령조익(火靈鳥翼) 불영섬(不影閃).”
모용진을 향해 나아가는 홍련의 쌍검에서 불꽃이 마치 새의 날개처럼 퍼져 나가더니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모용진의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진가은과 왕세진의 눈으로는 도저히 쫓지 못하는 극강의 쾌속(快速).
그 성광은 순식간에 모용진의 가슴을 뚫어 버릴 듯했지만 그 순간 모용진의 검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검.
아무것도 아닌 그냥 아래로 떨어지는 검 같았지만 그 검을 마주한 홍련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한없이 천천히 떨어지는 검은 그녀의 눈에 잔상을 남기고 있었는데 그 찰나의 순간이 홍련에게는 마치 영겁이 된 듯 세상이 느리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검이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 자신의 목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큰 사람이었던 건가.’
서걱!
날카롭게 베이는 소리에 홍련은 죽음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검은 아직 모용진에게 닿지 못했고 모용진의 검은 이미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붙들며 진격하던 몸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허릴 휘감는 묵직한 느낌에 그녀가 눈을 뜨자 놀랍게도 그녀의 앞에는 모용진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오. 생각보다 많이 예쁜 얼굴이네. 뭐 하러 검은 천으로 숨기고 다녀? 아, 암살자니 어쩔 수 없나?”
놀랍게도 그녀는 죽지 않았다.
베인 것은 오직 그녀의 입과 코를 가리고 있던 검은 천 조각뿐.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그녀가 마구 흩뿌리고 있던 내공도 초식도 어느새 완벽하게 와해되어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모용진의 손길 한 번에.
“무, 무슨……!”
“네가 한순간이지만 생(生)을 포기했으니 내가 이긴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넌 눈을 감지 않았을 거야.”
모용진이 그녀를 휘감고 있던 손을 놔주자 홍련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서진 연무장의 돌조각을 손으로 움켜쥔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구더니 모용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