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27)
이세계 편돌이-126화(127/331)
126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4)
* * *
회의 도중 누가 이런 안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은 자가 다른 이에게라고 솔직할 수 있을까.
발안한 건 엘레나 양이었다고. 쑥스럽다는 어투로 마저 말을 잇는다.
“제가 저희 팀에서 막내거든요. 그래서―”
“커…피… 나왔소….”
도중에 카운터 쪽에서 웬 고목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엔트 바리스타가 막 포션병 두 개를 올려놓는 참이었다.
둥근 포션병을 거치대로 기대고는 우리 쪽으로 목을 돌리는데,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우두둑 난다. 바로 일어나, 엉거주춤 선 엘레나 양에게 말했다.
“받아올 테니까 앉아 계십쇼.”
“아뇨, 제가―”
냉큼 가서 커피 가져왔다. 이것도 서비스업 직업병이야, 아주.
들고 오면서는 느낀 게, 이 커피 담은 포션병이 지나치게 비실용적이란 것이었다. 밑면이 정원(正圓)에 가깝게 둥글어 거치대 없이는 세우기조차 힘들 것 같다.
더해서 포션병에 커피를 담아놓고 보니, 아메리카노랑 라떼가 아니라 사약, 변신 물약을 각각 주문해 받아온 듯한 기분이야.
심지어 내 건 라지사이즈라 포션병 크기가 두 배고. 이게 상급 물약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가져와서 테이블 위에 거치대와 같이 올려놓자, 엘레나 양이 먼저 받아서는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더라. 나도 뚜껑 열어 한 모금 마셔봤는데, 시원했다. 부드러웠고.
“맛 좋네요. 맨날 체인점 커피만 먹었었는데, 이런 건 또 신기하네.”
“그쵸? 여기 엄청 좋아요. 워낙 컨셉이 뚜렷한 곳이어서 찾는 분들만 찾구, 조용하구.”
“여기 손님이 원래 많이 없는 편이에요?”
“그렇긴 한데, 이렇게까지 적은 건 처음 봐요. 게이트 때문에 이런 것 같은데.”
이 빌어먹을 게이트가 편의점 매출뿐만이 아니라 도시 매장 매출을 전부 도려내고 있는 모양이다. 이걸 위안 삼아야 하나, 같이 애석해해야 하나.
“그래서… 어, 죄송해요.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회사에서 막내라는 얘기 하셨었습니다.”
“아, 네. 그래서 말할 때 엄청 조심스럽기도 했고.”
안건을 내뱉은 뒤의 과정은 이러했다고.
우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선임연구원 서큐버스 중 하나가 ‘괜찮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솔직한 거니까 외부에 영향 끼치는 것도 없고, 성분 한두 개만 더 포함하면 되고.’
이걸 시작으로 안건이 긍정적으로 검토된 뒤, ‘따로 허가받아야 할 거 있나?’ ‘없을걸요?’ ‘기한은.’ ‘2주 비어요. 이번에 반마법사분이 일 처리 빨리해 줘서.’ ‘예산 많이 필요한가?’ ‘별로 안 들 듯?’
마지막으로 실장 왈, ‘재밌네요. 진행시키죠.’
다 들은 뒤 소감을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회사에서 막내 의견 통과되는 게 쉬운 게 아니잖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검증이 잘돼야 한다는 전제이긴 하지만….”
“어우. 그럼 제가 일을 아주 잘해야 되겠네요. 부담되네.”
“네? …아. 그, 그런 얘기가 아니라―”
“농담이에요. 부담 별로 안 느낍니다.”
자기 딴엔 농담으로 들리질 않은 건지, 반은 안절부절못하고 반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바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엘레나 양 회사 얘기 하는 건 거의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요.”
“어… 그러고 보니. 혹시 궁금한 거 있으세요? 찬이 씨?”
“아뇨. 회사 얘기가 궁금해서 여쭤봤던 건 아니고.”
이것도 이것대로 신기해서였다. 늘 일 얘기, 아니면 진정한 사랑 어쩌구 얘기만 해왔으니까. 내친김에 마저 물었다.
“이건 좀 딴 얘기인데, 혹시 묘약 외에 다른 마법약도 만들 줄 아세요? 왠지 잘하실 거 같아갖고.”
진정한 사랑 추구하는 만큼은 아니어도, 엘레나 양은 마법약에도 나름 진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이한 컨셉의 카페까지 구태여 찾아 들어올 정도잖아.
“잘하지는 못해요. 회사에서도 만들 일이 없어서, 집에 따로 세트를 사서… 어… 취미 삼아 만드는 정도?”
“마법약이 집에서 만들어져요? 그것도 세트로?”
“네. 멀리 있는 약초 가게에서 재료들 이것저것 사다가 만들기도 하고, 가끔은 인터넷으로도 주문해서 만들기도 하고.”
난 간단한 마법약도 제대로 자격증 따고, 어디 공방 같은 데를 가서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말만 들어보면 집에서 빵 굽는 것과 접근성이 비슷한 수준 같다.
“예를 들면요?”
“그건, 어… 찬이 씨께서 아무거나 한번 말해주실래요? 종류가 워낙 많아서.”
“뭐, 잠 잘 자게 해 주는 약이라든가?”
점장이 근무 첫날에 만들어 줬던 게 기억이 나서였다. 그때는 점장이 전혀 어렵지 않다는 투로 말해왔었는데, 말 들어보니 그게 또 아닌 모양이다.
“그건 좀 어렵긴 해요. 잠을 잔다는 게 신체활동을 강제로 멈추는 거나 다름없기도 하고, 뇌 기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마법이나 약초들도 다룰 줄 알아야 해서―”
여러 방면에서 빠삭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온갖 설명이 이어졌는데, 반의반도 이해가 안 돼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마무리.
“그래도… 음…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좀 걸리겠지만.”
“많이 어려워도?”
“네. 그 약 말고도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만들 수 있고, 또… 아. 혹시 찬이 씨께서는 필요한 마법약 따로 없으세요?”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마법약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적당히 둘러댔다.
“당장은 없는데, 그래도… 보고는 싶네요. 마법약 만드는 거.”
“그럼 나중에 미팅할 때 세트 한번 가지고 나와볼게요, 찬이 씨. 휴대도 간편하거든요.”
마법약 만드는 세트를 어떻게 휴대하고 다니는 건지가 또 의문이었지만, 알아서 생각하기로 했다. 접이식이라 가방에 넣고 다니든, 캐리어로 끌고 다니든 하는 거겠지.
엘레나 양이 마법약 만드는 데에 빠삭하단 것도 의외였고. 이것도 내가 모르던 서큐버스들 종족 특성인 건지, 아니면 엘레나 양이 유독 특이한 건지―
“…아, 그러고 보니.”
생각하는 도중, 엘레나 양이 반쯤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예.”
“찬이 씨께서 자기 얘기 하시는 건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제 얘기요?”
“네. 찬이 씨 얘기.”
글쎄였다. 내 얘기라면 충분히 많이 하지 않았나? 당장 지난번 미팅 때만 해도 편의점에서 겪었던 썰들만 2~30분 넘도록 얘기했었고.
난 이 생각이었는데, 엘레나 양이 바라는 게 내 생각과는 좀 달랐다.
“그러니까, 찬이 씨 취미생활 같은 거.”
“…아. 그런 거.”
“네. 그리고 찬이 씨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신다든가, 편의점 일 하시기 전엔 어떤 일 하셨다든가―.”
일부러 말을 잘랐다.
“취미는 없어요. 딱히.”
“…어….”
“밤샘근무하고 집에서 자기도 바빠서요. 뭐 하겠다고 몇 시간 더 밍기적거리고 그러면 지각할 거 같아서. 평소에 지내는 것도 이게 전부고….”
이런 자리에서 술술 내뱉기엔 실격인 대답이란 건 안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마저 말했다. 솔직하게.
“편의점 오기 전에는 직장 다녔습니다. 회사. 여기저기 출장 다녔고.”
“…….”
“그리고, 직장 다니기 전에는….”
여러 일 했다. 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하루 18시간씩, 6년.
“…썩 좋게 살진 않았는데.”
“아.”
“그래도 듣고 싶으세요?”
일부러 눈 마주치고, 목소리 가라앉혀 물었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이방인이라는 걸 들키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말 자체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내 목소리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내 삶을 하나하나 나열해 나가겠지.
그것조차도 싫다. 내가 살아온 삶은, 술자리 안줏거리 삼아 씹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질기고 비릿하다.
이래도 안 받아준다면 그때는 좀 더 단호하게 말할 뿐이다. 지금 선 넘으려 하고 계신 거라고. 다행히도, 엘레나 양이 이 부분에선 눈치를 발휘해줬다.
“아…뇨.”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눈에 빤히 보인다.
이해한다. 한낱 편돌이가 자기가 어디서 살아왔는지도, 뭐 하다 왔는지도 아무것도 이야기를 안 해. 충분히 답답할 만하겠지.
하지만 내가 원래 이런 놈인 걸 어쩌겠어. 이왕 말 돌린 거, 끝까지 말 돌리기로 했다.
“엘레나 양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실 일 아니에요. 제가 이상한 거지.”
“그래도 저는, 그….”
“저희 다시 일 얘기 하죠? 일 얘기. 아까 효능 얘기 하다 말았었잖어.”
말하며 테이블 위의 묘약 병을 살짝 들어 올렸다. 엘레나 양은 여전히 답답하다는 얼굴이었으나, 잠시 뒤 푹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전에는 저희 둘이 묘약 절반을 나눠 마셨었잖아요.”
“네.”
“이건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 그럴 필요는 없어요. 혼자서 마시면 효과가 발휘되고, 약효는 그리 세지 않고요. 단지.”
어떤 부작용이 발생할지 아직 예측이 안 된다고 한다.
이 묘약의 원래 효능은 ‘묘약을 마신 두 대상이 서로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대상을 한 명으로 좁힐 경우, 질문하는 대상이 사라져 버린다.
때문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줄 누군가’를 따로 만드는 과정이 추가되었고, 이 누군가는 묘약 복용자의 자아와 생각을 본뜬 또 다른 자아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마음속에 또 하나의 내가 잠깐 생겼다 사라진다?”
마시면 중2병에 걸려버리는 묘약이라니, 약효가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다. 반농담조로 한 말이었는데, 엘레나 양이 이걸 아주 부정하지는 않았다.
“네. 그리고, 생겼다 사라질 자아가 복용자에게 어떻게 반응할지는 몰라요. 어쩌면 공격적으로 나올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자아조차 복용자에게 뭔가를 숨길 수도 있고….”
“그게 마냥 질문만 하는 건 아닌가 봅니다.”
“그럴 것 같긴 한데, 그게 의도한 효과가 아니라서요. 회의 중에는 마땅한 대안이 나오질 않았어서….”
첨가하는 약품들의 배분, 추가할 마법 등을 한창 고민하는 중이라는데, 듣자마자 떠오른 게 있어 물어봤다.
“그건 그냥 메모지 같은 걸 쓰면 되지 않아요?”
“네?”
“아예 질문을 못 하는 구조로 만들면 되겠다 싶어서요. 메모지에 적은 걸 읽는다거나 할 때만 효과를 발휘하게 한다든가.”
마음속에 태어날 내 어둠의 파트너가 눈까지 달고 태어나지는 않을 거잖은가. 뭔가를 읽고 대답하는 건 뇌의 언어영역이 할 일이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내뱉은 거였는데, 엘레나 양이 어안 벙벙한 얼굴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생각은 전혀 못 했네요. 약품 쪽만 생각했었는데….”
“이게 되긴 돼요?”
“네. 심층적인 질답까지는 못 나누겠지만, 이러면 안정화하기 위해 약품이 더 들어갈 일도 없고, 마법도 마찬가지고… 잠시만요.”
곧바로 태블릿PC를 테이블 위에 올려서는 메모지 앱을 켜고, 여러 문장을 적어나가기 시작하는 엘레나 양.
한두 문장 적고 끝낼 줄 알았는데, 적어 내려가는 메모 양이 생각보다 많다. 집중하라고 일부러 말 안 걸고 조용히 포션병 커피만 홀짝였다.
10분 뒤, 태블릿PC를 다시 집어넣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게 뭔가를 중얼거리더라. 슬쩍 물어봤다.
“다 끝내셨어요?”
“아, 네! 다 끝났어요, 죄송해요, 느닷없이!”
“뭘요. 비전문가가 생각 없이 말한 거였는데, 도움 됐다니 제가 다행이지.”
“아녜요. 찬이 씨에게는 늘 도움만 받네요….”
또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최근 몇 주가량을 봐 오며 느낀 게, 엘레나 양이 자존감이 많이 높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내성적이기도 하고.
이 이유를 물어볼까, 물어보면 어디서부터를 물어볼까를 생각하다가, 관뒀다.
자존감이 낮다면 필시 자존감이 떨어지게 된 계기가 있을 거다. 그걸 먼저 들어야 판단을 할 텐데, 내 옛날얘기도 안 하면서 엘레나 양 옛날얘기를 묻는 게 옳은 짓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약효 말인데,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솔직히 이게 안건으로 통과됐다는 게 의아하다. 사랑의 묘약이라는 게 일반적으로는 동화책이나,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마법약이잖은가?
그게 현실로 많이 끌어내려졌다는 느낌이고, 사랑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종족이 다룰 만한 주제 같지도 않았다. 허나, 엘레나 양이 이 부분은 자신 있게 말해왔다.
“그런 거 있잖아요. 인터넷이나, 강연 같은 데에 나가서도 자주 나오는 말.”
“어떤 말 말입니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사랑이다―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