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28)
이세계 편돌이-127화(128/331)
127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5)
* * *
“그걸 보고 느낀 게,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였거든요. 회의 중에 문득 떠올라서, 네.”
“아하.”
“그래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으면, 사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찬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날 바라보는 게, 내가 긍정해 줬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딱 해야 될 말을 했다.
“엘레나 양.”
“네, 네.”
“지금 스마트폰 진동 울리고 있는 거 같은데.”
어딘가에서 자꾸 부르르 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엘레나 양이 움찔하고는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처를 확인한 뒤, 두 손으로 붙잡았다.
“네, 팀장님. 네. 네. 아….”
직장 상사였구만. 당황한 얼굴이 된 게 듣기 곤란한 얘기라도 들은 거 같다. 말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통화를 끊은 뒤 내게 말해왔다.
“팀장님 지금 출근하셨다고… 선배님들도요.”
“게이트 때문에 회사 쉬는 거 아니었어요?”
“네. 그렇기는 한데, 저희 팀에서 다른 부서 업무 넘어온 게 좀 있거든요. 막내가 맡을 일 아니라고 다들 쉬라고는 하셨는데….”
이 상황에서 나라면 얼굴에 철판 깔고 드러누웠겠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니 속으로는 이미 회사에 나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인 듯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 상사 눈치가 보여서일 수도 있겠고, 순수하게 직장 상사들한테 보탬이 되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고. 전화받을 때의 어조를 생각해 보면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가보시는 게 맞아 봬요. 30분 얘기했으면 많이 했지.”
“죄송해요, 제가 먼저 뵙자고 약속 잡은 건데….”
“원래 헤어지는 타이밍은 제가 잡겠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금이 딱 그때니까, 오늘 그만 좀 죄송해하시고… 이건 부탁에 가깝긴 한데.”
“네, 말씀만 하셔요.”
“이 묘약, 오늘 제가 가져가서 좀 테스트해 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이 부탁을 할 타이밍을 좀 재고 있었다. 회사에서 개발 중인 약품을 가져가는 게 되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본 건데, 엘레나 양이 편하게 대답해 왔다.
“네! 괜찮아요. 첫 미팅 끝난 다음 날에 찬이 씨 명의도 따로 등록해 뒀거든요.”
“와, 일 처리 엄청 빠르게들 하시네.”
“원하시면 회사 직접 찾아오셔서 출입증 만들어 드릴 수도 있고. 나중에 한번 찾아오실래요?”
정중하게 고개 저어 사양해 줬다. 오피스룩 입은 서큐버스들이 가득한 사랑의 묘약 회사에 걸어 들어간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발상이야?
“아쉽네요. 회사 구경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나아아중에 해 주십쇼, 나아중에. 이거 가지고 다닐 때 주의사항 있습니까?”
“특별한 건 없고, 계약사항만 준수해 주시면 돼요.”
“유출금지 얘기면, 준수해야죠. 당연히.”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가져가시려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별건 없고, 그냥….”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할 필요가 느껴져서였다. 이젠 더 못 미룰 것 같다.
“어차피 나중에 할 건데, 미리미리 해두면 좋겠다 싶어서.”
“엄청 부지런하시네요. 찬이 씨.”
“저한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요, 뭐.”
남방 앞주머니에 넣은 뒤, 간단히 테이블 정리하고 일어났다. 나중에 보자고 인사하려던 와중, 엘레나 양이 내게 조심스레 말해왔다.
“저… 찬이 씨.”
“예.”
“오늘 많이 죄송해요. 찬이 씨에게 민감한 부분들, 생각 없이 자꾸 여쭤보려 든 것 같아서.”
아까 내가 정색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바로 대꾸했다.
“괜찮다니까요. 그런 거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가 이상한 거지.”
“그래도요.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반은 자신 없는, 반은 간절하다는 말을 이어온다.
“혹시라도 고민 있으면, 저한테 얼마든지 말해주셔요. 찬이 씨께서 제 얘기 들어주신 만큼, 저도 찬이 씨 얘기 들어드리고 싶어갖고….”
눈빛도 마찬가지로 간절한 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건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속으로 곱씹으며 대답했다.
“기회 되면.”
“…네….”
“나중에 또 톡해요. 급한 건 아니니까.”
* * *
카페 밖으로 나와 엘레나 양과 헤어진 뒤, 주소지를 확인해 가며 호텔로 향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데에 걸린 시간이 15분 정도.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준 시간보다 5분가량이 더 걸렸는데, 호텔 정문 앞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유가 짐작이 안 되는 장식물 하나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였다.
그러니까, 눈사람 말이다. 신장 3m에 당근 코, 건포도 이빨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며 머리에는 중절모가 씌워져 있다.
더해서 눈사람 머리 위의 작은 구름에서는 눈이 솔솔 내리고 있었는데, 평소에 할 일 없는 후방 쪽 군부대 갖다 놓으면 참 좋아하겠….
[ 혹시 궁금하신 거 있으세요? ]멍하니 바라보는 와중, 눈사람이 묵직하게 몸을 돌려서는 변성기가 오기 시작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건 이것대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으나, 궁금한 게 몇 개 있기는 했다.
“여기서 뭐 해요?”
[ 발렛파킹 준비 중이에요. 아직은 손님이 하나도 없지만. ]“덥지는 않고?”
[ 괜찮아요. 마법사 주인님께서 신경 많이 써주셔서. 저한테 존댓말도 써주시고, 엄청 친절한 분이시네요. ]“아뇨. 먼저 존댓말 쓰시길래, 그냥.”
[ 그래도요. 혹시 악수 한번 해보실래요? 더위도 식혀지고 좋아요. ]사양했다. 마법사 주인 얘기 하는 걸 보면 소환수 비스므리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건드렸다가 녹아내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몇 달 악몽 꾸지 않을까?
햇볕 쨍쨍한 날씨에 왜 하필이면 눈사람을 세워다 발렛파킹을 시키고 있는 건지도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아무튼 미관상 나쁘진 않았으니까.
어쩌면 이게 진짜 의도하는 바일 수도 있겠다. 마법으로 외관 꾸미는 비용 절약하는 거. 호텔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호텔이 보통 4시까지 대실이잖아요. 지금 오후 1시도 안 됐는데, 들어가도 체크인 가능한가?”
[ 그건 잘 모르겠어요. 태어난 지 며칠 안 돼서, 아직 직원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거든요. ]“아. 괜한 거 여쭤봤네. 고생하십쇼.”
[ 손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한 뒤, 눈사람을 지나쳐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천만다행하게도 호텔 내부까지 겨울왕국 꼴이 나 있지는 않았다.
대신, 마법스럽게 고급지더라. 어둡되 은은한 분위기에 천장에는 별자리가 잡힐 듯 말 듯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며, 로비 끝에 자리 잡은 칵테일 바 위에는 웬 거대한 오크통 하나가….
“신분증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거 내가 담배 팔 때 쓰는 대사인데?
목소리 들린 방향을 돌아봤는데, 말한 주체가 어딜 찾아봐도 전혀 보이질 않았다. 대체 뭔 영문인가 생각하는 찰나에 발 언저리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오더라.
내려다보니, 키가 60cm 즈음 될 법한 반인반신 여우 코볼트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편의점에서는 인간 함유량이 99%쯤 되는 이종족들만 봐왔는데, 이런 5:5 비율은 또 처음이다.
“신분증 부탁드릴게요, 손님.”
당돌한 목소리가 왠지 여우스럽다는 인상이다. 반마법사 자격증을 꺼내 내밀자, 자기 뒷주머니에서 외안경을 꺼내 신분증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뒤엔 외안경을 집어넣고, 등 뒤에서 카드키와 큼지막한 식당 메뉴판 같은 걸 꺼내 내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비즈니스 클래스 룸으로 2박 3일. 이찬 님 명의로 숙박 예약되어 계신 것 확인했어요. 건네드리는 안내판은 신청 가능한 룸서비스 목록이에요.”
“어….”
“객실 내부에 비치된 전화기로 0번 눌러주시면 언제라도 신청 가능하세요. 객실까지 따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궁금하신 점이라도?”
안내는 부담스러워서 싫다. 카드키 넘버가 1204니까, 12층 올라가서 적당히 헤매다 보면 내 방 찾을 수 있겠지.
그것보다 룸서비스는 또 뭐며, 비즈니스룸 2박 3일은 또 뭔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 와서 들어본 말들 중 제일 이세계 언어스러운 말 같어.
“제가 2박 3일 예약이 되어있어요? 비즈니스 클래스로?”
“네. 따로 염려되는 점 있으세요?”
“…아뇨, 잠시만요.”
얼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호텔 분위기가 돈 얘기 꺼냈다간 소금 맞으며 쫓겨날 것 같아 엄두가 안 났다. 나중에 교수 양반 붙잡아다가 가격을 묻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대신 딱 한 가지만 물어봤다.
“혹시 바닥이불 있습니까?”
“네? 트윈침대 있는데요?”
“제가 바닥에서 자는 거 아니면 잠을 못 자서.”
“아하. 객실 도착하시기 전에 미리 가져다 둘게요.”
그러더니 엘리베이터 위치를 알려주고는 엘리베이터 정반대 방향으로 총총 달려가 버렸다.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난 나대로 엘리베이터에 타서 안내판에 적힌 룸서비스 목록을 살펴봤는데, 이것 역시도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멀미가 밀려오는 것들이 몇 됐다.
예를 들면, 커튼 색을 원하는 색으로 바꾸는 서비스. 이건 붉은색 커튼 썼다가 미노타우로스 같은 종족이 눈 돌아가서 들이받지 말라는 것일 테고.
외에도 내부 습도를 100%로 조절하는 서비스. 어패류 쪽 코볼트나 달팽이 수인들 피부를 촉촉하게 만들어 주는 용도인 것 같은데, 이런 비인간적인 것들 말고 좀 인간적인 거 없냐?
내 객실 문 앞에서 직후에 하나 찾아내기는 했다. 실내 환경을 오후 9시 전후로 조성해, 원활한 취침을 보장해 주는 마법 룸서비스.
이건 좀 괜찮을 것 같다. 카드키로 문 열고 들어가 침대 위에 안내판을 던져놓은 뒤, 침대 끄트머리에 한번 걸터앉아 봤다.
파묻혀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침대는 또 뭘로 만든 거야?
주변을 둘러봐도, TV며 소파며 호텔 베란다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하며 하나같이 고급져 보이는 것들뿐이다. 심지어 바닥이불조차도 어지간한 침대보다 더 비싸 보이는 게, 참….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감탄이라도 해보려 했는데, 잘 표현이 안 됐다.
군복무 포함해 10년 가까이 죽어라고 일만 해왔었고, 이런 곳은 엄두도 내본 적이 없었으니까. 잠드는 곳은 늘 300 보증금의 월세방, 아니면 4, 5만 원 하는 모텔이었고….
“…….”
생각하고 있자니 점점 우울해지는 것 같다. 안내판을 다시 펼쳐 아까 봐뒀던 룸서비스를 확인한 뒤, TV 밑의 수화기를 집어 들어 버튼을 눌렀다.
[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그, 36번 룸서비스를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 네,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띵동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아까 밑에서 보았던 여우 코볼트가 서 있었는데, 품에 큼지막한 전구 같은 게 하나 들려 있었다.
“얼마 안 걸리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래서 기다렸다. 털 복슬복슬한 발로 총총 걸어들어와서는 방 한가운데에 선 뒤, 품에 안은 전구를 톡톡 두드리는 여우.
그러자, 전구가 은은한 달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달빛을 머금은 전구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손을 놓는데, 전구가 떨어지질 않고 헬륨 풍선처럼 두둥실 천장으로 떠올랐다.
전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천장은 밤하늘처럼 변해갔고. 원래 천장이 있어야 할 높이마저 지나쳐 떠오르던 전구가, 딱 하늘의 달과 비슷한 크기가 되어서야 멈췄다.
그 달을 올려다보던 여우가, 날 돌아보고는 슬쩍 말을 건네왔다.
“저희 호텔에서 자랑하는 서비스 중 하나예요. 어떠신가요?”
“쩌네요.”
“네?”
“어… 좋다는 얘기였습니다.”
“그쵸? 하늘의 별 개수나 달의 형태는 TV 밑의 리모콘으로 조절 가능하시고요, 혹시라도 조작이 어렵거든 다시 문의 주세요. 그럼!”
이러고는 퇴장. 밤하늘을 바라보며 느낀 게, 이게 노숙이랑 다를 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천장뿐만 아니라 주변 풍경도 묘하게 변해버렸는데, 마치 여름밤 숲속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는 듯하다.
모르겠다. 모기만 안 나오면 됐지. 침대에 다시 걸터앉아, 달이 되어버린 전구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앞주머니에서 묘약을 꺼내 손아귀 안에서 두어 바퀴 굴리며 어제부터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봤다.
엘레나 양이 말했었다.
[ 혹시라도 고민 있으면, 저한테 얼마든지 말해주셔요. 찬이 씨께서 제 얘기 들어주신 만큼, 저도 찬이 씨 얘기 들어드리고 싶어갖고…. ]또, 윤하 누나가 말했었다.
[ 어쩔 수 없는 일을 모르고 당하는 거, 알고 당하는 거. 넌 어느 쪽이 낫냐? ] [ 그럴 것 같아서 말해봤다. 우리가 남남도 아니고. 나 간다. ]또, 울프 어르신께서 말씀하셨었다.
[ 제가 처음에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장님과 이런 대화를 나눌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지요. ]교수가 내게 이렇게 물었었다.
[ 그것도 감안해서 묻는 겁니다. 생각 있습니까? 44번? ]이 질문에 대답을 못 했다.
왜냐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게이트가.
이 세상 이종족들에겐 이런 게 일상이겠지. 하지만 내겐 아니다.
어제의 벼락도, 비둘기도. 내 몸뚱어리가 이렇지 않았으면, 누나나 어르신께서 안 계셨으면 난 진즉에 죽었을 거다.
내가 무서워하는 게 이상한 건가? 벼락이나, 강철로 된 비둘기가 쇼윈도 박살 내는 걸 못 잊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거야?
못 한다고 대답하는 게 맞았다. 난 이방인이잖은가. 평생 이런 일과 인연이 없이 살았고, 아는 것 하나 없고, 신분증이 생긴 것조차 몇 주가 채 되질 않았다.
그럼에도 대답을 못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생각할 시간이 내일까지다. 내일까지 대답을 내야만 했다. 분명 내가 이걸 무서워하는 건 맞아. 맞는데. 분명 맞는데….
“…….”
답이 필요하다. 내가 진짜로 무서워하는 게 무엇인가.
가능한 한 솔직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묘약을 가져왔다. 이 묘약이 어떤 식으로든 답을 내려주길 바란다. 부작용이든, 뭐든.
생각하며 묘약 뚜껑을 열어, 몇 방울을 삼켰다. 당장은 변화가 없었다. 1분. 2분.
잠시 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고개 돌려 바라보니, 잠자리채를 든 소년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너는. 아니, 너 누구냐?”
“저는 이찬이라고 하구요. 9살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