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33)
이세계 편돌이-132화(133/331)
132화. 드래곤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1)
* * *
무인상가의 조명, 가로등 불빛, 심지어는 신고 있는 운동화마저.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형태를 잃어버렸다. 우산대마저 어그러진 탓에 내가 쥔 게 우산인지, 미역 줄기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뭔가가 달라지길 바란 건 맞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변화가 일어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으.”
토 나올 것 같다. 목젖까지 올라온 위액을 억지로 삼킨 뒤, 이를 악물었다. 오래는 못 버틴다. 빨리 판단해야 했다.
여태 내가 이런 걸 봐온 건 마법이 걸린 물건들에 한해서였다. 그 마법에 사용되는 마력이 내게는 일그러짐으로 보이는 거고.
지금은 거리의 모든 사물이 일관적으로 일그러져 있다. 원래 이런 거리여서라고는 생각 못 하겠다. 갓길에 버려진 쓰레기에마저 일일이 마법을 걸어놓진 않을 테니까.
집에서 신고 나온 내 신발이 일그러질 이유도 없고. 물건이 문제인 게 아니라면, 원래 마법이 걸린 거리라서 이런 것일 수도….
아니다. 5성 호텔에도 마법이 안 걸려있는 세상인데 먹자골목에 마법은 왜 걸겠어.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잠깐 생각하다, 적당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앞으로 나아갔다. 보폭은 평소보다 좀 더 크게, 직선으로. 빗물이 고인 웅덩이 위를 첨벙이며 걸음 수를 헤아렸다. 딱 120걸음.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은 물에 잠긴 듯 형태조차 흐릿했던 사물들이 약간이긴 해도 아까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성인 남자의 평균 보폭이 74cm, 조금 더 크게 걸어서 1m. 직선으로 120m를 걸어왔다. 120m 뒤의 거리와 이곳의 마력 농도가 다르고, 아까까지 서 있던 곳이 좀 더 짙다.
“…게이트 생긴 게, 분명.”
블랙홀이랑 똑같았다.
가운데의 한 점으로 주변 공간이 빨려 들어가는 형태. 게이트도 마력과 관련된 존재라 가정한다면, 필시 중심부의 마력이 제일 높을 것이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마력이 점점 옅어질 거고.
방금 내가 겪은 상황과 일치한단 거다. 아직까지는.
“…….”
거를 건 거르고, 인정할 건 인정해 보자. 이 근처에 게이트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게 핵심 게이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게이트가 블랙홀 형태라는 건 이미 봐서 알고 있지만, 핵심 게이트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른다.
그게 블랙홀이 아닌 다른 형태일 경우, 이 가정은 전부 안 하느니만 못한 게 되어버린다. 근거가 더 필요했다. 알 만한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맞겠지만….
그 전에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두는 게 맞다. 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한창 붐벼야 할 먹자골목이 이 꼴이 났으니, 매장에 손님 올 일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두 번째 점 위치를 짚은 뒤 우산을 고쳐 잡았다.
아직 일곱 군데 남았다. 다 돌고 나면 그땐 좀 더 명확해지겠지.
* * *
나머지 일곱 곳을 전부 돌고 돌아왔다. 시간이 새벽 4시.
그사이에 비가 더욱 거세졌다. 매장 앞 거리 배수구로 빗물이 빠지는 게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 보였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 부재중 알림 코팅지를 떼 내 카운터 위에 툭 던져놓았다.
이후 의자에 앉아, 담배 진열대에 등을 기대어 늘어졌다. 좀 쉬자.
체감상 10km는 족히 걷고 온 것 같다. 허리춤 밑으로는 죄다 빗물에 젖은 지 오래고, 운동화 안쪽은 확인할 엄두도 안 난다.
10초가량을 이러고 있다가, 이면지 한 장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펜을 집었다. 여덟 곳을 전부 돌면서 해뒀던 생각들이 좀 있다.
천천히 적어 내렸다. 우선 하나. 무언가가 있는 게 먹자골목 거리가 아닌 것 같다.
먹자골목 쪽의 반대 지점에도 점이 찍혀 있었다. 점이 찍힌 위치까지 가서 골목에서 했던 짓을 똑같이 해봤고, 똑같은 증상을 겪었었단 말이다.
방향이 반전된 채로 말야. 골목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을수록 사물들이 덜 일그러지고, 골목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심해졌다.
다른 점들도 마찬가지다. 매장 주변으로 다닥다닥 찍힌 점들 모두가 어느 한 지점을 중심으로 멀어질수록 증상이 완화되고, 가까워질수록 심화됐다.
범위로 따지면 내가 맡은 직경 1.5km의 원형 영역, 끝에서 끝까지였고. 이 무언가가 게이트인지 뭔지는 아직 몰라도, 몸집이 꽤나 큰 놈일 거다.
그리고, 다른 생각 하나 더. 여덟 점의 중심이 되는 지점이 어디였는가.
매장에서 무척 가까운 곳이었다. 먹자골목 근처, 4차선 교차로 부근. 지금도 걸어서 1분도 채 안 걸린다. 이걸 알았을 때는 기분이 더럽게 착잡하더라.
더해서 막막했던 게, 막상 그 지점을 직접 가 봐도 보이는 게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학원지구 시계탑에 열렸던 게이트를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봐도, 불 꺼진 상가 안쪽을 살펴봐도 게이트는커녕 쥐 한 마리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나마 근거랍시고 건진 게 있다면 딱 하나. 그 지점에서 눈 질끈 감고, 눈에 온 힘을 집중해 봤었다. 중심에서는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시도하는 순간 아주 잠깐. 세상이 구겨졌었다. 일그러졌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뭐야.”
볼펜 촉이 말을 안 듣는다.
이면지의 여백에 슥슥 그어보려 했는데, 남은 여백이 없다. 휘갈겨놓은 낙서며 찍은 점이며 원이며, 만취한 대여섯 명이 모여 끄적인 마인드맵 같은 꼴이다.
대체 뭘 적은 건지 내가 봐도 모르겠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뒤, 전화를 한 통 걸어봤다. 교수에게.
[ 고객님께서 통화 중이어서, 잠시 후 소리샘으로― ]폰에 불났나 보다. 하긴, 대책위원회 고문이라 했으니 전화야 무진장 받고 있겠지….
…마저 생각했다. 매장에서 2분 거리.
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헌데, 그 무언가가 눈에 보이질 않는다.
이게 마음에 걸린다. 뉴스에서 봤던 게이트는 시계탑 꼭대기에 버젓이 알을 박고 있었고, 그 중심으로 공간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관측 가능한 현상이었단 말이다. 지금 이 무언가는 관측이 불가능한 현상이고. 이 두 개를 동일한 현상이라고 보는 게 맞는 판단인 건가? 단순히 내 희망사항인 게 아니고?
“…뭔가.”
딱 한 가지가 모자라다. 내가 확인한 게 게이트가 맞는 건지 아닌지, 봐줄 누군가가 필요해.
이것만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온 세상이 찌그러져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아침 9시가 되는 대로 마법청에 전화를 걸든 어쩌든 간에….
* * *
오전 8시 반. 손님이 단 한 명도 없다. 이 시간대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올려주는 매출이 평균 50, 많으면 80이었다.
헌데 지금은 0원이다. 바깥에 버스도 몇 시간 넘도록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내가 업주였다면 장소 이전, 혹은 부동산 사기 피해를 진지하게 고려해 봤을 것이다.
물론 이해는 된다. 빗방울이 미친 듯이. 과장 없이 정말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다.
도로에 흥건한 빗물이 점점 쌓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쇼윈도는 장마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앞 유리 같은 꼴이 돼버렸고….
이 날씨에 출근하라고 독촉하는 회사가 있다면, 기업평가 사이트에서 해골 세 개를 받은 회사들뿐일 거다.
이러니 인수인계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우산꽂이와 현관 발 매트만 꺼내둔 뒤, 30분가량을 폰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등록된 연락처란 연락처에 동일한 내용으로 톡을 발송했다.
[ 편의점에 뭔 일 날 것 같습니다 ] [ 문자 드릴 때까지 가능한 오지 마세요 ]와 달라고 한들 올 수도, 올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판국에 근처 편의점을 가지, 굳이 여기까진 왜 오겠어.
―퉁, 퉁.
윤하 누나, 엘레나 양, 울프 어르신. 잠깐 고민하다, 이루엘 순경과 치와와에게도 톡을 보냈다.
―퉁 퉁 퉁.
문자 잘못 보냈다간 신고 문자인 줄 알고 출동해 버릴 거란 생각에서였다. 치와와는 반대로,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씹새야’ 따위의 톡을 날려올 게 뻔하고.
그래도 받은 게 있는 만큼, 위험한 곳 굳이 찾아오지 말라는 말 정도는 보내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점장.
…씨.
어젯밤에 보낸 톡의 숫자 1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이게 점장 용건이 바빠서 이런 건지,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아니다. 왕년의 대마법사에게 이런 날씨가 대수겠어. 털어내며 톡창을 닫은 뒤, 전화 다이얼 화면으로 전환해 번호를 눌렀다.
내가 아는 마지막 한 명. 이 녀석에게는 톡을 보낼 수가 없다. 유아용 피쳐폰에 톡 기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 뚜….
― 아조씨.
뭐냐. 왜 통화음이랑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
고개 돌려 정문을 바라보니, 노란색 우비를 뒤집어쓴 자그마한 게 편의점 정문 앞에 바싹 붙어있는 채였다.
정문 유리에 올린 두 손에는 작은 발톱이 돋아나 있다. 바로 뛰쳐나가서 문 열어줬다.
“안녕하새여.”
“야, 하나야. 이 날씨에 여긴 왜 왔어?”
성인 남성조차도 질색을 할 날씨다. 정문을 여는 동시에 커진 장대비 소리가 고막을 두들기는 마냥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7살 애가 밖에 나와도 될 날씨가 아니다. 묻자, 하나가 우비를 걷고는 자기 뿔을 한 손으로 매만지며 대답해 왔다.
“아조씨, 보고 싶어갖구….”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런 날씨에 나오면 안 됐지. 넘어져서 어디 떠내려가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래두….”
나름대로 사연이 있긴 했다. 오늘 낮 12시에, 엄마 따라서 어딘가에 가야 한댄다.
“어딜?”
“모르갯서여. 엄마야가 말 안 해주셧서.”
이 녀석도 모르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추측해 봤다. 고작 반나절도 채 안 되어서 비가 땅을 잡아먹을 듯 내려대기 시작했다.
이유는 확신은 없지만, 게이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이트가 열렸다가 자연소멸할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누나가 말했었으니까.
그리고 뉴스에서도 뚜렷한 해결방안 같은 게 나온 것도 아니니, 7살 애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이 도시가 애한테 위험하다 판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네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시냐.”
“회사애서 일하구 계새여.”
어젯밤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도 계속 일을 하고 있고, 하나 이 녀석도 회사 육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나중에 할 일들을 미리 해두고 휴가라도 쓰려고 하고 있는 건가?
“어디를 간다구 하셔갖구, 일쭈일 넘게 안 올 수도 있따구 하셔갖구.”
“어.”
“그래갖구, 아조씨 오래 못 볼 거 가타서여….”
그래서 왔댄다. 얼굴에 비 묻거든, 손으로 슥슥 닦아 내 가면서. 다리 쪽을 내려다보니, 전에는 없던 상처 하나가 생겨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 같다. 아직도 뿔을 매만지고 있는 하나에게 물었다.
“너 오면서 넘어졌었냐?”
“…내.”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려 했는데, 상처를 본 순간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의약품 코너에서 세트를 가져와 솜과 연고를 꺼냈다.
“아조씨. 저 갠찬….”
“약 안 바르면 잘 안 나아. 가만있어 봐.”
솜으로 상처 부위 빗물 닦아주고, 연고 발라주고. 의약품 세트에서 방수 반창고도 마저 꺼내 붙이며 말했다.
“너 정오까지 돌아가야 된다고 그랬지.”
“내.”
“오랜만에 얼굴 봐서 진짜 반갑고, 오늘은 딱 이만큼만 보는 걸로 하자. 집 가는 길 바래다줄게.”
전에도 알아서 혼자 돌아갔으니 길은 이 녀석이 알 거고, 또 넘어지지 않게 손이나 잘 잡아주면 될 것 같다. 말했으나, 하나가 고개를 붕붕 젓고는 대꾸해 왔다.
“진짜루 갠차나여. 저 혼자서두 갈 수 이써갖구.”
“그럼 다치질 말지 그랬냐. 어떻게 너 혼자 보내?”
“그래두여….”
뭔 생각인지는 짐작이 간다. 지가 억지로 보러온 게 맞으니, 괜히 더 피해 주기 싫다는 의도일 것이다.
지금 안절부절못하는 건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일 테고. 입 꾹 닫고 고민하는 소릴 내며, 뾰족한 발톱으로 자기 뿔을 툭툭 긁어댔다.
바라보며 물었다.
“하나야. 너 근데 뿔은 왜 자꾸 만지고 있는 거냐. 가려워?”
“내.”
“뭐 성장통, 그런 거야?”
“성장통?”
“그러니까, 음… 언제부터 그랬냐.”
한창 성장기에 한곳을 계속해서 긁적이는 건 아토피 초기 증상이다. 용이 실제로 아토피에 걸리는 건지야 내가 모르지만,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묻자, 하나가 정문 밖을 돌아보고는 대답해 왔다.
“아까, 오는 도중애 갑자기 가려워졋서.”
“오는 도중이면, 오늘부터 그랬다고?”
“내. 쩌어기, 떨어진 곳에서부터 갑자기….”
정문 앞 차양까지 나와서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는데,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는 나도 속이 점점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망할 놈의 게이트가 도대체 어디에 있냐며 헤맸던 4차선 교차로. 딱 그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