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80)
이세계 편돌이-179화(180/331)
179화. 우린 친구가 적다 (1)
* * *
이 건 외에도 유리 녀석이 내보낸 꼬맹이가 몇 됐는데, 내보낼 때 쓴 방식이 나로선 엄두도 못 낼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
무언의 압박. 아이스크림 냉동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수다만 떨던 꼬맹이 둘이 있었는데, 이 녀석들을 확인한 유리가 다가가서는 말없이 뒤통수만 빤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거의 옷깃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말이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 꼬맹이들이, 유리와 눈을 마주치고는 당황했는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어… 누구세요?”
“…….”
“야, 이 누나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모, 몰라. 나한테 묻지 마.”
“…….”
유리 녀석이 입만 열면 깨는 소릴 해대긴 하지만, 조용히 있을 때는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있다. 나조차도 부담스러운데 어린 녀석들은 오죽하겠어.
다 떠나서, 성인 여성에게 원인 모를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초등학생들에게 있어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이 대치가 수 초간 유지되다, 버티기 힘들었는지 꼬맹이들이 후다닥 뛰쳐나가 버리더라고.
꼬맹이들이 나간 정문을 바라보던 유리가, 냉동고 문을 탁 닫고는 카운터로 돌아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손 시려워요.”
“그럼 냉동고 유리창에 손 얹고 닫질 마, 인마. 계산 중이니까 기다려 보고.”
“네. 그럼 저는….”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테이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는, 자기들 먹을 걸로 실랑이가 붙어서 술래잡기 중인 꼬맹이들을 또 뚫어져라 쳐다본다.
“에이, 쪼잔하게. 그거 한입 주는 게 아깝― 엇.”
“…….”
저걸 말려야 하나 생각하다, 말았다. 가만히 지켜볼 뿐 말을 걸거나 한 게 아니니, 저 녀석들이 자기들 엄마한테 이상한 여자를 만났단 얘길 하진 않겠지….
이 상태로 20분이 더 지나 8시 50분. 초등학생 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빠져나갔고, 순식간에 한가해진 매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린 건 어제와 똑같았지만, 최소한 장난감 진열대만은 멀쩡했다. 할 일이 없어져서인지 계산대 앞에 서서 똑같이 매장을 둘러보는 유리.
그러다 테이블 위쪽 쓰레기들에 시선이 멎는다. 바로 말을 걸었다.
“저건 내가 치울 테니까, 넌 도시락이라도 하나 먹고 있든지 해라.”
“도시락은 왜요?”
“너 오늘은 밥 먹고 나왔냐?”
“배고파요.”
“아침에 밥 먹는 것도 일이야.”
“음… 아하.”
일 얘기를 하고 나서야 납득했는지 진열대에서 도시락을 두 개 꺼내 계산대 위에 내려놓는데, 한 개가 어제 내가 먹었던 그 도시락이다. 6첩 도시락.
“오빠도 일하셔야죠.”
어제 내가 이걸 좋아해서 골랐던 줄 아는 모양이다. 맛이 좋아서라기보단 단순히 값이 제일 쌌던 걸 골랐을 뿐이지만….
모처럼 메뉴 정해줬으니 한 번 더 먹고 말지 뭐. 바코드를 찍어 건네주자, 도시락을 겹쳐 들고 가서는 전자레인지에 하나씩 데우기 시작했다.
두 번째 땡 소리가 들릴 즈음 테이블 위도 정리가 끝났고, 치워진 테이블에 내 도시락을 먼저 올려놓는다. 이후엔 또 깨는 한마디.
“따, 딱히 오빠를 위해 가져온 건 아니거든요.”
“아니, 뭔 헛소리야?”
“책에서는 이러면 대인관계가 원만해진다고 하던데….”
책이 틀렸나보다― 중얼거리고는 자기 도시락을 가져오는데, 방금 말이 귀에 밟혀서 물어봤다. 책에서 이러면 뭐?
“친해지는 거요. 상대방한테 뭔가를 해줄 때, 부끄럽다는 티를 살짝 내면요.”
“어.”
“상대가 ‘아, 이 사람이 은근히 날 신경 써주는구나―’ 생각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호감이 쌓인다고 했었어요.”
“그… 책 분류가 뭐냐.”
“657번이요.”
느닷없이 숫자가 왜 튀어나오나 싶어 폰으로 검색해 보니 만화책 도서 분류 번호였다.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으면 분류가 아니라 제목을 물어볼 걸 그랬다.
그래도 대화 의도가 뭔지는 전달이 잘 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감이란 걸 쌓고 싶다잖은가, 이 녀석이. 이걸 배우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만화가 제일 재미있을 테고.
밖을 슬쩍 바라봤는데, 등교 시간이 다 지나서인지 행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나마 있는 행인들도 다들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이러면 잠깐 대화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나도 어젯밤 일로 이 녀석에게 부탁하고픈 게 하나 있기도 했고. 우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호감이 생긴다 했는데, 눈에 안 보이면 호감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모르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그럼 의미가 없는 거 아니냐?”
“모르겠네요. 혹시 호감이 생겼어요, 오빠?”
“도시락 데워다 준 건 고맙다. 여튼, 부탁이 있는데 말야.”
여기까지 운을 뗀 뒤 본론을 얘기했다. 혹시 낼모레 밤에 잠깐만 근무 서 줄 수 있겠냐. 일 마치는 대로 바로 택시를 타고 돌아오든 하겠다.
어떤 일을 보는 거냐, 혹은 교육 기간인 애한테 뭔 소릴 하는 거냐― 등의 말을 해 올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이 이것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말을 해 왔다.
“확답만 해주신다면요. 호감이 생겼나요?”
“부탁 주고받을 때 생기는 감정이 여러 개긴 한데, 보통은 호감이 맞아. 맞긴 한데… 너 이 얘기 하는 다른 이유가 있냐?”
이 녀석이 일하기로 결정한 후로 내 시선에 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건 안다. 눈치껏 테이블을 치운다든가, 내 말을 유독 경청한다든가.
그게 오늘따라 유난히 직접적이다. 혹시나 싶어 물었는데, 정답이었다.
“어젯밤에 상상을 좀 해 봤어요.”
“어떤 걸?”
“저랑 처음 만났을 때 오빠 기분요.”
“그러냐. 상상해 보니까 느낌이 어떻든?”
“이상해지더라고요.”
내 입장에서는, 이상한 수준을 넘어서 엉망이었다.
딴 세상 어쩌고 하는 게 초면에 다짜고짜 꺼낼 주제도 아닐뿐더러, 그게 왜 하필 나야. 약점 잡으려고 이러는 건가? 근거가 뭐지?
오래 보고 살 사이가 된 지금은 이 녀석도 그날 자기가 했던 짓이 다르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그걸 물을 땐 이 녀석도 여기서 일할 생각은 전혀 못 했을 테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기는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말야. 도시락 반찬을 한 점 집어 먹고 대답을 기다렸는데, 이 녀석이 그래도 아직까지는 미련을 못 버린 듯했다.
“여전히 궁금하긴 해요.”
“난 고집 센 사람 안 싫어한다. 왜 고집을 부리는지 납득되게 설명을 해 준다면 말야.”
“설명 안 하면요?”
“그땐 서로 답답하겠지. 난 있지도 않은 세상 얘길 자꾸 꺼내는 근거가 뭐냐― 할 거고, 넌 근거는 말 못 하지만 아무튼 있다― 하면서 계속 궁금해할 거고.”
“답답한 건 싫어요. 궁금한 거 참는 것도 싫고.”
서로 간의 비밀을 떼놓고 얘기하자면, 유리 이 녀석이 날 나쁜 직장 선배라 여기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고.
대신 서로 말하기 싫은 것들을 계속 캐묻기 시작한다? 그땐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주구장창 하게 되는 거다. 서로 눈 마주치면 기 싸움만 하게 될 텐데, 이런 관계가 나쁘면 나빠졌지 좋아질 리가 있나.
자기 도시락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유리가, 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깨작이고는 차근차근 결론을 말해왔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오빠랑 밥 먹는 건 싫지 않아요.”
“그러냐.”
“일 배우고, 만화 얘기 한 것도요.”
“그럼 다행이고.”
“이럴 때 사과하면 보통 받아주나요?”
“내 얘기 하는 거면, 아마도.”
“미안해요.”
“오냐.”
사람이랑 대화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녀석이니, 진심으로 사과한 적도 이번이 처음이겠지. 실제로 진심인지 아닌지야 마음을 꺼내 볼 수가 없으니 알 도리도 없다만….
진심이라 생각하는 쪽이 내게도 속 편하니, 그냥 받아들이고 말란다. 이 대화 후에는 서로 말없이 밥만 먹었고, 절반가량 비웠을 즈음 내가 먼저 물었다.
“점장님께 매장 일은 얼마나 배웠냐.”
“언니가 ‘이젠 손님 받는 것만 익숙해지면 되겠다―’라고 말했어요.”
그럼 나도 손님만 받게 하면 될 것 같다. 점장 매장 보는 방식이 나랑 같지가 않을 텐데, 두 방식을 동시에 알려주면 헷갈릴 거 아냐.
낼모레부터 근무를 서야 하니, 지금부터 바로 시작해야 할 것 같고. 밥 다 먹은 후엔 이 녀석한테 유니폼부터 입혀야겠다― 생각하던 와중, 바깥 보도에 익숙한 색의 형체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니.”
“왜요, 오빠?”
온몸이 흰색에 등에는 빨간색 책가방. 쟤가 이 시간에 여긴 왜 있냐?
대답 없이 바로 밖으로 나가 바라봤는데,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나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 한가득 화색을 띠었다.
웃는 얼굴 그대로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꾸벅인 뒤, 당당하게 외쳐온다.
“찾았서여, 아조씨!”
“하나 너, 유치원 안 가고 여긴 왜 왔어?”
“지각이애여. 큰일 나써.”
자랑이야, 아주.
싶었으나, 하나 말을 마저 들어보니 이 녀석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는 했다. 원래라면 아침 8시 반쯤 집에서 준비해 엄마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올 예정이었단다.
헌데 딱 나가려고 준비하던 도중에 엄마한테 급한 볼일이 생겨버렸고, 알아서 등교해야 할 것 같다 하고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잔뜩 데리고 가 버렸다고.
“아저씨 아주머니는 또 누구… 아니다.”
내가 얘 집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무진장 잘사는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엄마가 운전 안 하고 수행원이 리무진 몰아줄 정도면 말 다 했지.
그 수행원들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라 부르는 것일 터다. 수행원을 잔뜩 데리고 가 버렸다 하니, 얘가 혼자서 와야 할 상황이라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그, 하나 너 예전에도 혼자서 유치원 와 본 적 있어?”
“여기까지는 몇 번 와바써여. 유치언까지는 못 가봣구….”
이것도 이유를 물었는데, 유치원이 요 앞 정문에서 한참 먼 곳에 있다고 한다. 안에서 유치원 셔틀버스를 타고 20분이 넘도록 달려야 겨우 도착할 정도라고.
하여 엄마가 이미 유치원에 연락해 둔 뒤고, 여기서 셔틀버스가 자길 태우러 오는 걸 기다릴 생각이었단다.
“근대여, 아조씨가 요기루 이사 온다구 하셨섯으니깐. 그래갖구 찾구 있었는대….”
“오래 찾았어?”
“아녀? 3분.”
“미안하다.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제대로 말을 해 줄 걸 그랬네.”
7살 애들 다니는 곳이니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고만 여겼지, 셔틀버스 타고 들어가는 구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뭔 놈의 부지가 이렇게 넓어?
며칠 더 못 봤다간, 하나 녀석 폰에 29살 아재 전화의 수신기록이 남을 뻔했다. 내게 머릴 쓰다듬어지면서도 날 꿋꿋이 올려다보던 하나가, 등 뒤를 슬쩍 바라보고는 대뜸 입을 벌렸다.
“엣….”
그러고는 몸을 숙여 내 무릎을 벽 삼아 숨어 버렸다. 뒤를 돌아보자, 유리 녀석이 어느새 내 등 바로 뒤까지 구경을 나온 참이었다.
눈을 마주치자, 하나가 내 바지를 붙잡은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얼굴까지 반쯤 파묻어 버렸다. 일단 이 녀석 소개부터 해야겠다.
“하나야. 내 등 뒤에 얘, 이번에 여기서 새로 일하게 될 직원. 무서워 안 해도 된다.”
“아… 안녕, 안녕하새여.”
내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는지, 주춤주춤 고개를 숙이는 하나.
이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가, 하나와 똑같이 내 유니폼 옷깃을 붙잡고는 똑같이 얼굴만 빼꼼 옆으로 내밀었다.
“나도 안녕.”
“넌 뭐 하냐?”
“저 애가 이렇게 인사하길래,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