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87)
이세계 편돌이-186화(187/331)
186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부메랑처럼 (4)
* * *
어르신께서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는 것 같다. 말하기 직전, 이번엔 엘레나 양 폰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우리 둘을 바라보는 엘레나 양.
“저, 잠깐 전화 좀 받을게요!”
그러라고 했다. 수신 버튼을 누르고는 ‘네, 팀장님.’으로 시작해 네, 네 대답을 하거나 밖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다.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고개는 왜 끄덕이는 건지.
십수 초가량 대답을 하다 끊고는, 미안하다는 듯 말해 온다.
“죄송해요, 선배님들 거의 다 오셨다고 하셔서… 가 봐야 될 것 같아요.”
“원래 그러려고 오신 건데 죄송하실 게 뭐 있어요. 어디 있으시대요?”
“막 지하철 개찰구에서 만나셨다고….”
“그럼 지금 나가셔야겠네. 나중에 또 봬요.”
“네. 그리고, 저기.”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엘레나 양. 좋은 주말 보내시길.”
어르신 말까지 듣고 나서야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의자를 집어넣은 뒤 정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역 출입구 앞까지 걸어가서는 번호 안내판을 가만히 바라보는 엘레나 양.
그러다 쇼윈도 왼편으로 사라졌다. 만나기로 한 출입구가 저곳이 아닌가 보다.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다.
“꽤 특이하신 분이군요.”
“어떤 점에서 말씀이세요?”
“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으셨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 말을 대리운전을 하시던 때의 경험을 덧대어 설명해 주셨는데, 술에 취한 서큐버스들의 콜을 받아 대리운전을 할 때면 간혹 그 서큐버스들이 장난삼아 어르신께 말을 거는 경우가 있단다. 혹시 솔로시냐, 사귀는 여자친구는 있으시냐.
“아…니. 어르신께 그런 걸 물어봤었다고요?”
“예. 저야 이미 결혼한 몸이니 웃어넘기고 말 뿐입니다만, 간혹….”
결혼했다는 말에 흥미가 생겨서는 이 주제를 파고들어 오는 철없는 서큐버스들이 있다고들 한다.
그때면 어르신께서는 어차피 취했으니 기억도 못 할 테고, 입도 심심했던지라 문제가 안 생기는 선에서 에둘러 대답을 해주곤 하셨다는데….
“대부분의 서큐버스분들은 도중에 흥미를 잃더랍니다. 제 얘기가 지루했냐고 물어보면 다들 비슷한 대답을 하셨고요. 저라면 그렇게 사랑 안 한다― 라면서.”
그러고는 술기운에 잠긴 목소리로 저마다 자기 방식의 사랑을 어르신께 설파하려 들었다는 것. 만나 온 서큐버스들 대부분이 사랑에 대해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엘레나 양께는 그렇지 않은 듯 보여서 말이지요. 오히려 헤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도 일부는 공감이 됐다. 서큐버스들이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확고하고 개방적이다, 이건 내가 내 세상서 달고 온 상식과 비슷하다. 대리운전 불러서는 솔로냐는 얘기부터 했다고들 하니 개방적인 게 맞겠지.
헌데 엘레나 양만큼은 그 상식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단 말이다. 사랑을 하고 싶다고 얘기는 하는데, 정작 어떤 사랑이 하고 싶은지는 본인도 잘 모르는 상태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 얘기에 귀도 기울이는 걸 테고. 그 이유가 뭔지는 들은 게 없으니 짐작도 못 하겠지만 말야….
“이런 얘기도 하셨었습니까? 두 분이서?”
“하긴 했었습니다. 뚜렷한 답은 안 나왔지만요.”
솔직히 사랑이 뭐냬 어쩌냬 둘이서 떠들어댄 건 많지만, 서로가 모쏠인 이상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나조차도 뚜렷한 가치관이 없는데 뭐라고 말을 해?
그냥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떠오르는 대로 말했을 뿐이고, 그러다 친해져서 일도 같이 하게 된 거다. 말씀드리자, 잠깐 생각하시던 어르신께서 말씀해 오셨다.
“두 분이서 협업을 하신다셨는데, 어떤 일을 같이 하시는 건지요.”
“신약 개발을 제가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연인끼리 서로 솔직해지는 약인데, 그게….”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 했는데, 떠올리는 순간 말이 막혔다. 연인끼리 솔직해지는 약을 테스트하는 거라 서로 연인 흉내를 내고 있다, 이걸 씨….
“호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약에 있는 부작용을 제가 처리하는 식인데, 저도 알아가는 단계라 잘은 몰라요.”
맨정신으로는 낯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겠다. 어르신께서 여전히 의아해하시는 얼굴이라 바로 주제를 돌렸다.
“그, 아까 어르신께서 통화하실 때요. 아는 청년이랑 같이 있다― 라는 얘길 하시던데.”
“음… 아. 그랬지요. 문제 될 대화는 안 했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여쭸던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전에 저희끼리 했던 얘기도 하셨나 해서.”
물난리 나기 며칠 전, 매장 쇼윈도를 아이언둘기가 날아와 박살 냈을 때. 그 직전까지 어르신과 했던 얘기가 있다. 어르신 군인 시절의 동료분들.
어르신께서 그분들을 다시 뵙고 싶다는 눈치셨고, 난 하염없이 망설이는 것보단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찾아뵈면 좋아하실 거다―’라는 식으로 말씀을 드렸었다.
그 일을 어르신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아직 못 들었다. 말씀드리자, 말없이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대답해 주셨다.
“한번… 찾아뵈려고는 합니다. 절 반기실지는 모르겠지만, 부하로서 안부를 여쭙는 것 정도는 문제 삼지 않으실 분들이니까요. 그럴뿐더러….”
“네.”
“반려도 제 의견을 존중해 주겠다고 했고요.”
그래도 의아해하셨다고는 한다. ‘수십 년 동안 제게 안 했던 말을 하시네요, 여보야.’ 이 말에 어르신께서 어떤 청년이 등을 떠밀어줬다― 라고 대답하셨다고.
그 대답을 시작으로 내 얘기를 몇 마디 나누고는 좋은 인상을 갖게 되셨다는데, 나로서는 영 부담스러운 내용이었다. 아니, 바코드 찍는 놈 갖고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반려는 젊은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라고 하더군요.”
“그… 예.”
“본인이 아니더라도,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있다는 것도 다행이라고 했었고요.”
친구라는 표현이 내게 맞는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마음 다잡으시는 데 도움이 됐다 하니 뿌듯하긴 하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옅게 한숨을 내쉬는 어르신.
“헌데, 찾아뵐 방법이 떠오르질 않으니 원….”
“그분들 어디서 살고 계시는지는 모르시는 거예요?”
“예. 부대 특성상, 부대원들의 정보 자체가 기밀이었던지라.”
그야 그럴 터다. 중요 요인 호위하는 일이었잖은가. 정보가 새어 나가면 호위부대 사람들 가족을 찾아가 약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거고.
“…그래도 한 분께서는 멀지 않은 곳에 계실 것 같기는 합니다.”
“여기 학원지구 말씀이세요?”
“예. 도시가 만들어지기 전, 이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그분들 중 한 분이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고향 얘기를 하셨었는데….”
전쟁이 나기 전 생가가 이 학원지구에 있었고, 전쟁이 나며 죄다 박살이 났다는 듯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인 듯 말이 없으시다, 살짝 힘을 주어 반복하셨다.
“맞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늙거든, 고향에서 유유히 지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어르신께서 그립다는 듯 말씀하셨는데, 나로서는 아리달쏭했다. 먼 옛날에 했던 생각이니 지금 와서는 충분히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부정하겠단 소리가 아니다. 추억 좋네요― 공감만 하고 말 게 아니라, 나는 내 나름대로 생각을 해봐야 한단 거다. 머리 두 개를 두고 한 가지 방향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도와야 할 일인 만큼, 나도 내 방식대로 도와드리고 싶다. 전에 하수도에서 어르신께서 도와주셨던 그 수준까지는 못 하겠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지.
한다고 해 봐야, 주변에 도와달라고 머리 박는 것 말고는 없지만 말이다. 이걸 내 방식대로 어떻게 할 수 있나….
“…아. 이런.”
막연하게 생각하던 도중, 이번엔 어르신 폰에서 톡 소리가 한 번 울렸다. 폰 화면을 들여다보다 반은 난감한, 반은 뿌듯한 표정으로 내게 화면을 내미는 어르신.
“보시지요. 저희 손녀딸입니다.”
반려분께서 사진을 막 찍어 보내셨나 보다. 보여주시길래 봤는데, 사진 상황이… 아니.
“어떻습니까. 귀엽지요?”
애는 객관적으로 봐도 귀엽다. 파자마 차림에 복슬복슬한 회색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덧니는 삐죽 튀어나와 있다. 운동 잘하게 생겼다.
문제는 사진 안의 상황이 귀엽질 않았다는 점이다. 애가 침대에서 막 굴러떨어진 건지 바닥에 머릴 박은 채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데, 손에 발톱이 삐죽하게 솟아있었다.
사진 구석에는 침대보가 반으로 북 찢어진 채고. 정황만 보면 애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려다 침대를 발톱으로 찍었고, 침대보가 못 버텨서 이렇게 된 듯하다. 이게 더 신경 쓰여서 먼저 먼저 언급했다.
“어르신. 이거, 침대 찢어진 거 아닙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에 침대보는 많으니까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 오셨다. 그렇다면 뭐.
“매장에 자주 오는 애 한 명 있는데, 그 애에 비견될 만합니다. 어르신.”
“…비견될 만하다고 하셨습니까?”
어르신께서 눈매가 매서워지신 게 ‘감히 내 손녀딸과 비견된다고?’라는 느낌이었는데, 팔불출이신 걸 감안하더라도 이 말을 하고는 싶었다. 나중에 직접 비교해 보십쇼, 어르신.
“매장에 드래곤 꼬마애 한 명이 자주 오거든요. 걔가 친한 애가 많이 없고, 같이 소개시켜 두면 잘 놀까 싶어서….”
할아버지께 허락받을 겸 여쭤봤다. 둘이 공통적으로 덧니가 나 있으니 덧니 팸이라도 만들든 하지 않을까.
팔불출 어르신께서 여전히 뚱한 표정이시길래, 나중에 사진 보여드리겠다고 대답했다. 그 사진을 보시고 나면, 그 애한테 비견된다는 게 별점 몇 점짜리 대답인지를 알게 되실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 반려분께서 막 보내신 거죠?”
“예. 지금은… 아이가 우느라 한창 달래는 중이라는 군요.”
“어우. 슬슬 들어가셔야겠네요.”
애가 우는데 밖에만 있는 게 눈치가 보이시겠지. 권하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테이블에 올려뒀던 모자를 머리에 얹으셨다.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습니다, 사장님.”
“저도요. 나중에 도움 필요하신 일 있으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저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습니다.”
내 체질을 사람 찾는 데엔 못 써먹겠지만, 뭐라도 하다 보면 써먹을 데가 한 곳은 나오겠지. 내 말에 고개를 꾸벅이시고는, 그대로 폰을 바라보며 정문 밖으로 나가셨다.
이후엔 땅 딛는 발 구름 소리 한 번에 사라지셨고, 이젠 매장에 나 혼자 남았고, 벽걸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1시.
오래도 얘기했다. 카운터로 돌아와 거리 밖을 살폈는데, 행인들 대부분이 제 갈 길을 다 간 건지 휑해졌다. 멍하니 바라보다, 엘레나 양에게 톡을 한 줄 보냈다.
[ 나중에 일할 날 정해지거든 일정 남겨 주십쇼 ] [ 내일만 아니면 언제라도 상관없어요 ]일 얘기 하러 온 게 아니라길래 나도 일 얘기를 따로 안 꺼냈었다. 지금은 직장 선배들 앞에서 열심히 고기 굽고 있을 테니, 나중에 알아서 확인하겠지.
다음엔 이루엘 경관에게 톡 두 줄.
[ 내일 점장님이랑 저 어떻게 하면 됩니까? ] [ 정해지거든 톡 주세요 ]이건 10초도 채 되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 편한 복장으로만 준비해주시면 됩니다 ] [ 내일 오후 9시 반까지 찾아뵙겠습니다 ]확인하고 바로 폰 화면을 끈 뒤 생각해 봤다. 편한 복장은 또 뭐야. 내가 그 돈가방 잡겠다고 뛰어다니게 되기라도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