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188)
이세계 편돌이-187화(188/331)
187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부메랑처럼 (5)
* * *
이후엔 손님보다 아침 해가 먼저 찾아올 정도로 한가했고, 8시 30분까지도 꼬맹이들 한 명 없이 평화로웠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주 5일 등교제의 덕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대신 원래라면 한가했을 9시 이후가 약간 바빠졌는데, 주말을 맞아 놀러 나온 듯한 대학생들이 대부분. 아니, 아닌가?
찾아오는 친구들이 외관만 보면 캠퍼스 라이프를 만끽하는 인싸들로 보였으나, 남녀 따질 것 없이 일관적으로 책가방을 등이나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몇 명을 보내면서는 ‘이 세상 학구열이 생각보다 좋은가?’라고 추측했었는데 말야….
다음 손님 둘이 들어와 이 추측을 정정해줬다. 안색이 창백한 남자 한 명과 밝은색 투톤 컬러 머리를 한 여자 한 명이 나란히 들어왔는데, 정문에서부터 팔짱을 끼고 있더라.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내용은 이러했다.
“오빠, 뭐 마실래? 오늘은 내가 살게.”
“피.”
“피는 나중에 마시면 안 돼? 방에서 같이 공부할 건데, 피 냄새 나면 집중 안 될 것 같아.”
“난 피를 안 마시면 집중이 잘 안 되는데.”
“집중은 내가 시켜줄 테니까 걱정 마, 오빠. 나 노래 잘 부르는 거 알잖아?”
“음.”
시큰둥한 어조의 남자 목소리와, 코맹맹이와 애교가 조화롭게 섞인 여자 목소리. 하는 말들만 들어보면 뱀파이어와 앵무새과 수인의 조합인 듯했다.
지금은 같이 공부할 약속 잡고 만난 거고. 들은 후엔 이 두 종족이 서로 연애가 성립할 수 있냐는 생각이었으나, 카운터 앞에 와서 하는 얘길 들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공부하다가 집중 안 되면, 그땐 밖에 선짓국 먹으러 가자.”
“괜찮아.”
“어? 정말로?”
“너랑 있으면 피 생각이 덜 나.”
“…어머머. 오빠, 그런 기특한 말은 어디서 배워 왔어?”
말하는 것에 비해 실제로 느낀 기특함이 배는 더 큰 건지, 여자의 귀를 덮고 있던 옆 머리카락이 붕 떠서는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앵무새가 기쁠 때 날개를 퍼덕인다는 딱 그거 같다.
말한 뱀파이어 쪽은 서툴게나마 애정을 표현하려 꺼낸 말 같고. 어지간한 수준의 종족 특성은 애정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단 걸 재차 확인할 수 있게 된 유익한 광경이었다.
허나 이것 외엔 모쏠 입장에서 유익한 점이 단 한 가지도 없었기에, 고개 떨군 채로 얌전히 가져온 것들 계산해서 내보냈다.
나간 둘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손님이 유독 많은 이유가 퍼뜩 떠올랐다. 지하철역 앞이니 대학생들 주말 약속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긴 하겠지. 여튼….
손님이 끊이질 않았던 탓에 9시 50분까지도 담배를 다 못 셌다. 막 밑에서 두 번째 줄 담배를 세고 있는데 카운터 칸막이가 탁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돌아보니 점장이 와있었다. 와서는 날 올려다보며 씩 웃는 점장.
“오늘 장사 잘된다. 그치.”
“그러게요. 저 이것만 마저 세고 인수인계하겠습니다, 점장님.”
“천천히 해두 돼. 내가 손님들 받구 있을게.”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안 들을 것 같아서 조용히 담배나 셌다. 전부 센 뒤에 다시 자리를 잡았는데, 점장이 어느새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바라보다 농담 삼아 말해봤다.
“환복하시는 속도가 제 이등병 복무하던 시절 수준이시네.”
“그냥 조끼만 입은 건데? 찬이네는 군복이 조끼가 끝이었어?”
“바지, 신발, 내복 다 있었죠. 나약한 녀석은 살아남을 수 없었던 곳이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선임들 생활관 찾아 달려가서 점호 나오시냐 물어보고, 아침밥 메뉴 읊어주고, 근무표 말해주고― 이런 씨, 이걸 내가 왜 떠올리고 있냐.
“나약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구? 전시 상황이었어?”
“아무튼 그런 게 있었어요. 여튼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30분 전에 신용카드 분실한 손님이 한 명 있긴 했는데, 도중에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찾아갔었다. 이걸 제외하면 모쏠로서 착잡했었단 점 말곤 평화로운 근무였다.
문제는 이다음. 인수인계를 마친 뒤, 어젯밤 경관에게 받은 톡을 점장에게 보여줬다. 내일 오후 9시 반까지 편한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어 달라. 톡을 확인한 점장이 대답해왔다.
“나도 경관님께 딱 이렇게 톡 받았어, 찬아.”
“그러십니까. 여튼, 경찰 일 도울 때 편한 복장이면 뭘 입고 가야 하는 겁니까?”
이 일을 하겠단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내가 태생이 소시민이었던 놈이라 이럴 때 뭘 어째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중간에 냅다 튀기에 편한 복장을 얘기하는 건지, 길리슈트를 얘기하는 건지….
“어렵게 생각 안 해두 돼, 찬아. 반팔에 청바지?”
“점장님께서는 경찰 일 도우실 때 그렇게 입으셨어요?”
“대체로는 그렇게 입었구, 눈치 보일 때면 바닥에서 몰래 나뭇가지 하나 집어서 들고 있거나 그랬어.”
지팡이도 필요 없으신 분이 왜 그러셨냐 물어봤더니, 일 나오는 데에 아무것도 안 챙겨나오면 성의 없게 보일까 봐 그랬단다. 어지간한 마도구들은 옛날 옛적에 분리수거해서 집에 남은 게 없었다나.
더해서 입고 나갔던 옷들도 평소 입는 스커트와 가디건들. 점장 옷차림에 의구심을 표했던 경찰들이 몇 있었으나, 점장 실력을 보고는 바로 조용해졌다고.
“편한 복장이 내 마법사 유니폼이거든. 집에 여덟 세트쯤 있지.”
아무튼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는 얘기 같고, 잘 납득됐다. 걱정되는 점들을 다 물어본다 한들 또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길 게 분명하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니까. 편의점 바코드나 찍겠다고 넘어온 놈 인생이 하루가 다르게 판타스틱해지고 있는 것 같다. 말없이 회상하던 도중, 점장이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힘들겠지만, 잘 자구. 늦게 자면 내일 머리두 안 돌아갈 거 아냐.”
“그럴게요. 점장님, 근데 유리 그 녀석 내일 몇 시에 나와요?”
“9시. 어제 경관님 톡 보고 얘기해줬더니, 그때까지 자고 있겠다 하더라구. 밤새워 본 적이 여태 거의 없었대.”
* * *
걱정에 새로운 걱정이 더 얹어졌다. 밤 한번 새워 본 적 없는 녀석한테 야간을 맡겨? 이게 생선가게 길고양이랑 다를 게 있냐?
싶었으나, 막상 집에 돌아오고 나니 잠은 잘 오겠다 싶더라. 집안 꼴이 어젯밤 나왔을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찢어진 종이백 쪼가리가 온 사방에 널브러진 그대로다.
더 엉망이 되진 않았단 얘기다. 들어오자마자 베란다 앞쪽 종이 쪼가리 일부가 파바밧 흩어졌는데, 고양이 놈이 저기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은 도어락 소리에 놀라서 도망친 거고. 이 종이 쪼가리들 치우는 건, 전에 물을 치우게 만들었을 때와 똑같은 걸 시도해 보면 되나?
“아니, 됐다. 내가 치운다, 인마.”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안 떠올라서 직접 치웠다. 양말 신은 발을 빗자루 삼아 종이 쪼가리를 모으는 와중, 이 고양이 녀석이 그새를 못 참고 또 말썽을 부려댔다.
모아둔 종이 쪼가리 뭉치에 스테이지 다이브를 시도한 것이다. 내 발치 바로 앞에서 말야. 종이가 온 사방으로 휘날리는 걸 바라보다, 잡아서 들어 올려 봤다.
“우냥?”
“이게 이젠 겁대가리도 없네. 몸값 비싸다고 막 나가는 거냐?”
점장은 이놈 추정가가 수천만 원짜리라고 했었는데, 들고 있는 지금도 솔직히 실감은 안 난다. 내가 이 투명한 놈에 버금가는 신기한 놈을 하나 알고 지내서 이런 건가.
“원만하게 대화로 해결하자고, 대화로. 캣휠이 필요하다는 거야, 뭐야?”
“뺘야옹….”
이게 참나무 재질 캣휠을 원한다는 대답인지, 그냥 손에 들려있어서 답답하다는 대답인질 모르겠다. 멍멍이 녀석이라면 이게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
상상해 봤는데, 이것도 잘 풀릴 것 같진 않다. 고양이가 생후 3개월이면 사람 나이로는 1살 좀 넘은 정도인데, 사람 아기가 말하는 나이가 평균 18개월 정도 된다.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될 거란 얘기다. 막연하게 생각하며 쓰레기를 마저 치우고 바닥에 내려놓은 뒤, 내친김에 찢어질 만한 물건들을 죄다 집어 옷장에 욱여넣었다.
이후, 반쯤 기도하는 심정으로 몇 마디를 더 걸어봤다.
“나 내일 멀쩡하게 나가야 되니까, 집안 살림 찢어먹지 좀 말고 얌전히 좀 있어 봐라. 부탁이다, 어?”
“뺘옹.”
“하여간 대답은 겁나게 잘해요. 나 잔다.”
이러고 바닥에 누워 잠들었는데, 8시에 알람에 맞춰 눈을 떠보니 기적적으로 집이 멀쩡했다. 이 세상엔 진짜 기도 들어주는 양반이 있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이놈 변덕일 뿐인가. 오늘은 배가 무겁진 않고 허벅지 안쪽이 묘하게 뜨끈했는데, 몸을 일으키자마자 말랑한 무언가가 다리를 딛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음엔 발톱이 바닥을 타닥 긁는 소리. 멀리 가진 않았다. 소리가 멎은 쪽을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떠오르는 게 있어서였다.
“허. 부탁이라고 해서 부탁 들어준 거냐?”
“…….”
“뭐, 알아먹지도 못하니 당연히 아니겠지만… 아무튼 잘했다.”
“냥.”
덕분에 마음이 두 결 편해졌다. 일 끝나고 돌아오면 간식거리나 좀 사 오든 해야지.
* * *
준비를 다 마치고 9시 20분 즈음 매장으로 갔고, 카운터에 내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ㅃ… 손님.”
내가 기어이 저 녀석이 카운터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내 거친 생각과, 카운터에 서 있는 자신이 영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불안한 저 녀석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점장….
“유리야, 방금 했던 일들대로 똑같이 하면 돼. 긴장 풀구.”
점장 표정이 밝은 걸 보면 저 녀석이 다른 손님은 멀쩡하게 받은 것 같은데, 내가 뭐라고 날 저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점장을 내려다보며 묻더라.
“긴장이 안 풀려요. 언ㄴ, 점장님.”
“시간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나도 첫 손님 받을 때는 들떠서 막 어버버하구 그랬거든.”
물론 점장이 그랬을 리가 없으니, 그냥 저 녀석 위로하는 셈 치고 꺼낸 말이라 여기기로 했다. 껌 한 통을 집어 카운터에 올려놓은 뒤 내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일러줬다.
“야. 너 유니폼 지퍼 위로 솟구쳤다.”
안 솟구쳤다. 긴장 풀라고 농담으로 건넨 말인데, 이 녀석이 확실히 긴장을 하긴 했었는지 자기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며 대답해오더라.
“…손님을 대하는 제 의지를 표현하는 거예요, 오빠.”
“그걸 왜 지퍼로 표현을 해, 인마. 농담한 거니까 그만 매만지고.”
이 말에는 아예 지 가슴팍을 내려다보는 걸로 반응했다. 옆에서 바라보던 점장이, 유리한테 들으라는 듯이 내게 말해왔다.
“찬이한테 일 잘 배웠다구 보여주고 싶었대.”
“아하.”
이건 들키기 싫었는지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삐죽 내밀어버렸고. 날 손님으로 받는 걸로 일 잘 배웠다는 걸 어떻게 보여주겠단 건지가 궁금했지만, 따로 묻진 않았다.
“너 잘할 거야. 일 배울 때 싹싹하잖냐.”
“…제가요.”
“어.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어보는 거, 그것도 잘하는 거고. 모른 채로 실수하는 것보단 낫잖어.”
일의 경중과는 별개로 마음만은 대견해서였다. 진심 반 위로 반 섞어서 말해주자, 내밀었던 입술을 쏙 집어넣고는 가슴을 펴온다.
“제가 궁금한 게 많긴 해요, 오빠.”
“오냐. 똑같은 거 세 번 네 번 물어보지만 않으면 돼.”
“지금 이건 처음 물어보는 건데요?”
“?”
이게 뭘 질문하라고 짠 빌드업이 아닌데?
“두 분 오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뜬금없긴 했지만, 질문 내용이 내가 하려고 했던 것과 똑같았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점장에게 바로 물었다.
“저희 어디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까. 따로 연락 들으신 거 없죠?”
“아예 이 앞으로 오시겠다구 하셨어. 하시던 일이 좀 일찍 끝날 것 같고, 30분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다구―”
말하는 도중, 정문 밖에 부릉 하고 차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장과 같이 나가보니 비상깜빡이가 켜진 경찰차 한 대가 보도에 바싹 붙어있는 게 보였다.
열린 창문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는 경관도. 눈을 마주치자 차에서 내려 다가와서는, 경례와 동시에 말해오는 경관.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부득이하게 일반 경찰차를 가져왔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일반 경찰차랑 특수 경찰차 차이가 뭡니까?”
“중앙 가림막 유무입니다.”
경찰차도 손님 태우는 차, 손놈 태우는 차가 따로 있나 보다. 내부를 힐끗 바라보려 했는데, 경관이 손을 내리고는 묻더라고.
“두 분 준비가 다 되시는 대로 출발하려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다 됐습니다, 경관님.”
“전 안에서 핸드백만 챙겨올게요, 경관님.”
대답하고는 후다닥 안으로 달려가 버리는 점장. 짧은 사이에 어느새 유리가 다가와 있었는데, 나와 경관, 경찰차를 번갈아 보며 내게 물어왔다.
“오빠 연행되시는 거예요?”
“나중엔 몰라도 오늘은 아냐, 인마. 일하고 올 거니까 카운터 잘 지켜줘. 알았냐?”
“네. 카운터에 상처 하나 없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