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11)
이세계 편돌이-210화(211/331)
210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5)
* * *
자기들은 회의실 뒷정리를 해야 하니 우리끼리 먼저 나가라고 하더라. 차 한잔 안 마셨는데 무슨 뒷정리를 하냐 싶긴 했지만….
아무튼 엘레나 양과 단둘이 있게 됐다. 회의실 문을 등진 채 엘레나 양을 내려다봤는데,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였다. 바라보다 슬쩍 말을 걸어봤다.
“선배님들이 개성이 넘치시네요.”
“…앗. 네?”
“개성 있으시다고요. 클로에란 분은 좀 그, 자기 주관이 강하신 것 같긴 했는데….”
말실수 한마디에 코웃음 세 번 쳐 올 타입이다. 라나 양은 먼저 다가와서 우리 친하게 지내요― 하는 타입이고, 팀장은 이렇다 정의는 못 내리겠지만, 나한테 립밤 발랐고.
저분들이랑 일하는 동안 회사생활 심심하진 않으실 것 같다. 말미에 덧붙이자, 고개 숙인 채로 대답해온다.
“네… 심심하진 않아요.”
“그럼 다행이고요.”
“네.”
이후엔 적막. 한창 일할 시간이어서인지 복도에 인적 하나 없이 조용했다. 그게 어색해서 말을 걸어본 건데, 반응이 미지근하다.
복도의 화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나랑 대화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딴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앞장서서 걷자마자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도 거의 반사적인 동작 수준이고….
마저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서고, 타서 1층에 도착하고. 건물 로비를 지나 카페 앞에 설 때까지도 바닥만 보고 있다. 해야 할 말을 했다.
“커피 뭐 드십니까.”
“어… 네?”
“커피요. 커피. 얻어먹는 입장이니 주문하고 받아오는 거라도 하려고 그랬지.”
“엇, 아뇨! 저 마키아또, 저기. 제가 받아올게요!”
“그냥 앉아 계십쇼.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어떤 걱정요?”
“넘어질까 봐 그래요, 넘어질까 봐.”
말하자,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해 오는 엘레나 양.
“제가 넘어져요?”
자기가 생각에 잠겨있다는 것조차 못 깨닫고 있었나 보다. 결국 나란히 카운터 가서 마키아또랑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주문했고, 받아다 적당한 자리에 앉으려 했다.
헌데, 엘레나 양이 기어이 사고를 쳐버렸다. 햇볕이 센 창가 쪽 자리를 피해 구석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쿵 소리가 들리더라고?
“아얏!”
엘레나 양이 테이블에 골반을 찧으며 난 소리였다. 부딪치면서 중심을 잃은 건지 내게 몸을 확 기대오는데, 쟁반을 내가 들고 있었단 말이다.
덩달아 몸이 흔들리는 걸 겨우 버티긴 했으나, 이 여파로 커피컵 안의 내용물들이 위로 세게 솟구쳐버렸다. 아메리카노의 1/3가량이 쏟아져서는 내가 걸친 가보 1호를 덮쳤다.
“죄송해요, 찬이 씨… 앗.”
골반께를 어루만지며 내 쪽을 바라보다, 뚝뚝 흘러내리는 커피를 보고는 아예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물어봤다.
“골반 찧은 거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은데요, 진짜 죄송해요. 옷에 커피 엄청 쏟아졌―”
“그럼 저도 괜찮습니다. 이거 눈에 띄지도 않아요.”
“그래도요! 잠깐만요. 지금 휴지 갖고 올게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이 바람막이 방수라고 오기 전에 말씀드렸잖어.”
이렇게 말해도 여전히 안절부절못해 하길래, 근처 테이블에 쟁반을 올려놓은 뒤 바람막이를 툭툭 털어봤다. 과연 98,000원짜리여서인가, 옷에 방울조차 안 맺힌다.
“봐요. 멀쩡하잖어.”
“…….”
“이거 닦고 갈 테니까 먼저 앉아 계세요. 안 다치셨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닦는 건 자기가 닦겠다며 떼를 써왔고, 나도 똑같이 떼써서 앉혀 놨다. 난 이런 거 닦는 데에 도가 튼 놈이다. 입에 구멍 뚫린 채로 컵라면 먹는 진상들이 한둘이어야지.
카운터에서 빌린 손걸레로 커피를 다 닦은 뒤에 돌아갔는데, 엘레나 양이 무릎에 손을 모아 앉아있기만 할 뿐 자기 몫의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질 않았다. 휘핑이 그대로다.
진짜 괜찮다니까. 말해줄까 하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맞은편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커피 잘 마실게요.”
“…네.”
곧바로 빨대로 반 컵 빨아 마시자, 이제서야 조신하게 빨대를 집어 휘핑을 휘휘 젓기 시작한다. 커피를 쏟았던 것 때문인지 여전히 낯빛이 어둡긴 했지만….
“회의실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서 하게 됐네요. 저희 일 얘기.”
“아… 네.”
“지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늑장 부리기도 그렇잖어.”
일 얘기에 집중하는 게 분위기 전환은 더 빠를 것 같다. 내 말에 엘레나 양이 자기 태블릿PC를 꺼내 올려놓았고, 나도 커피잔 내려놨다. 물난리가 났던 몇 주 전에 건네받아, 호텔 방에서 마신 그 묘약.
“타인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만드는 묘약, 이잖아요. 그게.”
“맞아요. 효과는 어떠셨어요?”
“좀 우회적이었습니다. 마시는 순간 아, 이제부터는 나한테 솔직해져야겠다! 하는 마음이 샘솟거나 한 건 아니었고….”
아홉 살, 어렸을 때의 내가 나타났었다. 엄마가 해준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 학교 가기 싫다, 솔직하기 짝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나.
그 철부지 꼬맹이가 내 마음을 꿰고 있었다. 내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모르는 척 굴면서도 실은 다 알고 있더라.
“고민요? 찬이 씨께서요?”
“예. 그때 크게 고민하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어… 어떤 고민요. 털어놓기 힘든 고민이었나요?”
그땐 그랬다. 이 세상에 게이트란 게 있는데 내가 거기에 들어가야 될 것 같다, 그런 걸 쥐뿔도 몰랐던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얘길 이 세상 누구에게 털어놓겠어?
심지어 점장에게도 말 안 했었다. 이런 일 겪게 해서 미안하단 말을 할 게 뻔했으니까. 그래도 이젠 이미 지난 일이고, 희석된 대답 정도는 가능했다.
“전에 매장 근처에서 게이트 터졌을 때요. 단골분들 다 모인 자리에선 내가 가겠다, 라고 말했었는데. 기억나십니까?”
“네. 그때, 찬이 씨 엄청 멋졌는데.”
“그 멋진 척 한 번 하기 무진장 힘들었습니다. 그런 건 헌터나 마법사들이 해야 할 일이지, 민간인인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묘약에서 튀어나온 그 녀석이 날 솔직하게 만들어주더라. 내가 무서워해야 할 건 그 망할 게이트가 아니라, 거기서 도망치고 난 후의 내 미래라고.
“거기서 도망쳤으면, 앞으로도 이 동네 살면서 계속 도망만 다녔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동네요?”
“그, 사거리요. 사거리. 나 일하는 동네가 재수 옴 붙은 동네구나, 얼른 사직서 쓰고 지방으로 내려가든 해야겠다― 그 얘기였습니다.”
편히 얘기하다 보니 원래 살던 곳 얘기까지 튀어나오려고 한다. 주워담아 다시 읊조리자, 이해가 된 듯 안 된 듯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마저 말했다.
“이게 그 묘약 먹고 나왔던 효과고, 부작용은 아직까지는 없었고. 여튼….”
“네.”
“전 마음에 들었고, 그대로 나오면 전 사서 마실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요.”
말 그대로 개인적인 감상이다. 나야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 신기하게 여길 수 있다만, 이게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마법으로 재현할 수도 있을 거고.
그래도 덕분에 좋은 경험 했으니, 좋은 인상 남길 겸 얘기해봤다. 내 말에 엘레나 양이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태블릿PC의 버튼을 꾹 누르고는 말해왔다.
“자기 자신을 만나 이야기한다, 이건 저희 팀 의도대로 잘 됐다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네. 그런데?”
“동 나이가 아닌 다른 모습의 자신이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이건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개선해야 할 부분 같고….”
“예? 왜요?”
예상외의 반응이라 바로 물어봤다. 피복용자가 약빨 잘 들었다고 하면 좋은 거 아냐?
“그야… 과거의 자신을 보면서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어… 아하.”
“그 시절에 트라우마를 가지신 분도 있을 테고요. 아, 찬이 씨께서 말씀하신 게 무의미하단 얘기는 아니에요! 저희가 방향성을 잘못 잡았다는 얘기를―”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 판단한 건지 허둥지둥 설명을 늘어놓는 엘레나 양. 원래 개발 의도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되 솔직함만 더하는 거였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솔직할 수 있을 테니까, 등등.
여러 얘길 해오고는 있으나,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망치로 머릴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서다. 누군가는 과거의 자신을 추억이 아닌 트라우마로 여길 수도 있다.
이걸 전혀 생각 못 했다. 내게 똑같이 해당되는 말임에도 말야. 20년이 지난 지금이야 잠자리채 기워 쓰던 걸 추억 삼을 수 있는 거지, 그땐 나도 그게 싫었으니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 묘약으로 나타난 게 9세의 내가 아닌 다른 나였다면. 만 24세, 지칠 대로 지쳐 코피나 질질 흘리고 다녔던 그때의 나였다면.
“그래서, 찬이 씨께서 말씀해주신 걸 토대로 개선방안을… 찬이 씨?”
내 고민에 빈정대기나 했겠지. 어차피 일에 치여 죽을 팔자인데, 게이트에 들어가서 죽든 말든 그게 그거 아니냐면서 말야….
“찬이 씨. 저기….”
“…….”
“찬이 씨?”
“어, 아. 예, 죄송합니다. 무슨 얘기 중이셨습니까?”
순간 우울해졌었다. 남은 커피의 반을 빨아 마신 뒤 대답하자, 걱정스럽다는 표정의 엘레나 양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푸훗 웃고는 대답해온다.
“아까 저도 똑같이 보였을 것 같아요.”
“뭐가요?”
“생각에 푹― 빠졌던 거요. 지금 찬이 씨 반응이 아까 저랑 똑같아서.”
졸지에 거울치료를 하게 만들어 버렸구만. 나도 피식 웃은 뒤,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묻고 싶은 게 떠올랐다. 떠오르긴 했는데.
“엘레나 양. 혹시 제 설명이 모자랐다거나, 더 말해야 하거나 하는 부분 있습니까?”
“아뇨. 지금 말씀해주신 것만 개선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예. 그럼 그…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편히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찬이 씨, 늘 제 얘기 잘 들어주시니까!”
평소에 사랑 상담 꾸준히 해준 덕을 볼 타이밍인가. 웃는 상이 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 타이밍 아니다.
“…생각해 보니, 엄청 궁금한 질문까진 아니네.”
“에이. 사소한 거라도 괜찮은데요!”
큰 게 궁금하다. 아까 엘레나 양이 말했잖은가. 과거의 자신을 추억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걸 트라우마라 여길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내 주관으로는 이게, 꽤 복잡한 질문이다. 헌데 이 대답이 나오는 데에 수 초도 채 안 걸렸다. 이렇게 빨리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이 자문에 떠오른 답이 이거다. 평소에 본인이 이 생각을 자주 하고 살았든가… 아니면 본인 얘기여서든가.
억측 맞다. 그래도 가벼운 주제라면 농담거리 삼아 밀고 나가 봤을 텐데, 이런 주제로 얘길 하기엔 알고 지내 온 시간이 너무 짧다. 장대비도. 술도, 파전도 없고. 그러니까 안 할란다.
“찬이 씨, 늘 제 얘기 들어주시잖아요. 그러니까 궁금한 거 삼키지 마시고!”
“이미 삼켜서 소화 다 됐… 아니지. 그럼 제가 진 셈 치고 여쭙겠습니다.”
“네! 어떤 거요?”
“아침부터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시는 거예요?”
엘레나 양이 건물 로비에서 팀장을 만났을 때부터 회의실을 거쳐 지금까지. 족히 1시간을 넘는 시간 중 50분가량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울상인 채로 말이다.
그 이유나 좀 들어 볼란다. 묻자, 까먹고 안 하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울상을 짓는다. 이것도 그냥 안 물어볼 걸 그랬다.
“골똘히까진 생각 안 했어요.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기분은 왜 안 좋으시대요. 언제부터?”
“잘 모르겠어요. 언제인지는… 그러니까….”
횟수를 헤아리듯 자기 손가락을 펼치고 접길 반복하다, 천천히 중얼거리는 엘레나 양.
“팀장님께서 찬이 씨에게 립밤 발라주셨을 때, 라나 선배가 찬이 씨랑 가까이서 얘기했을 때… 그리고, 알바분 얘기 하셨을 때.”
“허어, 아니. 그때도 기분이 별로였어요?”
“별로인 게 아니구요! 이상해요. 그러니까… 속이, 엄청 답답해.”
자기가 얼마나 답답한지를 표현하려는 듯, 입에도 대지 않았던 마키아또를 빨대로 쭉 빨아들인다. 그러고는 내게 물어온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에요. 이게 대체 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