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27)
이세계 편돌이-226화(227/331)
226화. 편돌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6)
* * *
이후 설명은 매장으로 돌아가며 들었다. 이번 시험의 목적은, 응시자들에게 과제 하나를 던져준 뒤 그 과제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를 심사하는 것.
던져주는 과제는 심사관 재량이란다. 정확히는 6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의 구성원을 2주 전에 미리 확인한 뒤, 구성원들이 구사하는 마법의 종류나 성격에 맞는 과제를 출제하는 식이라고.
허나 나는 시험 전날에 급하게 투입된 땜빵이고, 당연히 구성원을 확인할 시간도 과제 내용을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이런 내가 뭘 어째야 하느냐.
[ 이전에 구상해뒀던 과제가 몇 있고, 지금 문자로 전송하겠습니다. 이 중 하나를 선택해… 자정, 까지 연락하십시오.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데, 원래라면 교수가 이런 제안을 해 올 양반이 아니다. 고분고분 말에 따르는 것보단 자기 할 일 알아서 찾아 해내는 사람의 값어치를 훨씬 쳐주는 사람이니까.
물론 나는 관심 밖의 일이긴 하다. 내가 부귀영화 누려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아니잖아. 평소라면 넙죽 제안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다.
“과제를 내는 게 제 재량에 달렸다, 는 말씀이시죠….”
[ 혹시 생각해둔 게 있습니까? ]“…예. 아침에 말씀 듣고 생각해 본 게 하나 있긴 합니다.”
오전에 심사관 권유를 들은 직후, 내가 심사관이라면 뭘 보고 심사를 할까― 잠깐 망상했던 게 있다. 문제를 내가 낸다는 걸 몰랐던 상황이라, 딱 망상으로만 끝내고 말았었지만….
설명을 듣고 돌이켜보니, 그 망상 중 일부를 채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즉석에서 정리해가며 늘어놓자, 잠깐 뜸을 들이고는 대답해왔다.
[ 허가하겠습니다. 어떤 게 필요합니까. ]“물론 이게 말이, 예? 진짜요?”
[ 제가 당신에게 권하려 했던 과제들도 비슷한 맥락으로 구상한 것들이었습니다. 시험 직후까지 변동사항이 없다는 전제하에, 허가하겠습니다. ]“허어….”
난 그게 말이 되냐는 소리부터 들을 줄 알았다. 옛날부터 줄곧 느껴온 거지만, 마법 시험에 한해서는 내 세상과는 통념이 무척 다르다.
객관적이어야 할 일들에 주관이 많이 반영되는데, 이게 사회적으로 허용이 되는 분위기야. 당장 내가 치렀던 시험부터가 교수 주관이 강했던 시험이기도 하고….
[ 아니면 문제 될 게 있습니까. ]“…어, 아뇨. 말씀드린 대로 할 겁니다.”
[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게 필요합니까. ]이 대화가 이뤄지는 시점에서 딱 정문 앞에 도착했고, 자물쇠 풀며 주저 없이 말했다. 시험 치를 장소에 의자만 하나 놔주면 된다.
다른 건 내가 직접 조달할 수 있다. 말하자, 딱 알맞은 제안이 돌아왔다.
[ 이전 심사관이 예약해둔 건물이 있습니다. 학교 강당. ]“학교 강당이면 딱 적당한… 이전 심사관이 예약했다고요?”
[ 응시자 그룹별로 시험 장소도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쓸 겁니까. ]“쓸게요. 플라스틱 의자 하나 주워다 쓰면 되고, 딱 좋네….”
[ 다른 건? ]하나 더 있고, 제일 중요한 거라 맨 마지막으로 미뤘다. 잠깐 누나랑 시선 교환한 뒤, 작게 숨 들이켠 후 내질렀다.
“아침에 말씀해 주셨잖습니까. 제가 경력이 짧으니까, 응시자 애들도 가능한 한 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시겠다고.”
‘민짜들 마법이래 봐야 다 거기서 거기 아냐?’ 하는 안일함과 세트로 묶어 기억해 뒀다. 그때만 해도 민짜들이 나 일하는 매장을 털어먹을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이 편의를 이렇게 써먹을 줄도 전혀 몰랐고. 운을 뗀 뒤에 교수 대답을 기다렸는데, 이 양반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답해왔다.
[ …지금 전송했으니, 확인 후 변동사항과 마찬가지로 자정까지 전달하십시오. ]바로 확인해 봤더니, 뒤에 ‘진짜정말마지막파이널최종정리목록’이라 적힌 문서가 하나 전달되어 있었다. 어딘가에 대학원생 눈물 자국이 찍혀있을 것 같은 파일명이다.
[ 다른 건? ]“이거면 될 것 같습니다. 자정까지 연락드리면 되는 거죠.”
[ 내일 오전 7시. 학원지구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오전 7시, 정문 앞. 예.”
[ 이상입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늘 그래왔듯 대뜸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젠 익숙하다.
누나는 마냥 기다리긴 지루했는지 옆에서 자기 폰 들여다보고 있고. 말 걸기 전에, 우선 파일을 열어 나열된 이름들을 확인해봤다. 1번부터 60번까지, 6명 간격으로 굵은 선―
“…뭐야. 통화 언제 끝났어?”
“방금.”
“그럼 말을 해야지, 짜식이. 여하튼, 잘 풀릴 것 같아?”
앞으로는 모르겠고, 지금까지는 잘 풀렸다. 30번부터 36번 사이, 아까 들었던 이름들이 그대로 적혀있다. 바아란, 셰릴, 엘린.
나머지 이름 셋은 헨슨, 웨어, 플로라였는데, 내가 태생이 태생인지라 누가 하피 민짜고 누가 허스키 민짜인지 분간을 못 하겠다. 이 세상 이종족들은 왜 이렇게 이름이 이국적이야?
아니면 목록에 종족명이라도 적어놓든가. 바라보다, 누나가 볼 수 있게 폰 화면을 들어 보였다.
“아까 그놈들은 있는데, 이거 목록 좀 봐줘. 누나.”
“뭘 봐주면 되는데?”
“여섯 명이 한 조로 총 60명이란 말야. 이 여섯 명이 이 중에 어느 수준의 강자임?”
19세 미만 중 최강자 수준만 아니면 된다. 10면체 주사위면 중 1만 안 나오면 된다는 심정으로 굴려본 건데, 그 1이 나와버렸다.
“얘네들이 제일 마법 잘 쓸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래.”
“아니. 이 새끼들은 이 재주를 가지고 왜….”
“몇 군데는 이름 봐도 잘 모르겠고. 근데 이건 왜 물어보냐?”
교수한테 할 변명거리를 떠올리려고 물어봤다. 심사 편하게 하라고 보내준 목록인데, 내가 정반대로 행동해버리면 의아해할 거 아냐.
이 생각이었는데, 내 말을 듣고는 태연한 어조로 대안책을 말해왔다.
“그럼 A급 헌터 지인이랑 트레이닝 센터에서 대련 몇 번 했다고 둘러대 봐. 잘 통할걸?”
“뭔 소리야. 누나랑 맞짱을 떴다고 말하라고?”
“얘네들 헌터 지망일 거 아니냐. 현직 헌터한테 몇 번 뚜들겨 맞아봐서 얘네 정도는 껌이다, 이렇게 어필을 해라― 이거지.”
진심 대부분에 농담 약간 섞어 한 말 같다. 알아서 둘러대겠다고 대꾸하려 했는데, 당장 생각해 봐도 마땅한 방안이 안 떠올랐다. 그냥 이 말대로 하련다.
“그중에 두 번은 내가 이겼다고 해도 됨?”
“됐네요, 짜샤. 난 너한테만은 꿈에서라도 안 져줄 거야. 누나가 자존심이 있지.”
“그럼 내가 다 졌다고 하지 뭐. 이젠 기분 좀 풀렸어?”
“풀렸겠냐고. 그놈들이 속을 아주 박박 긁어댔는데….”
보이냐는 듯이 자기 가슴팍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소연을 해오는데, 이 누나는 자기가 여자라는 걸 주기적으로 까먹기라도 하는 건가?
할 말 마저 하라는 의도로 누나 미간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시 뒤, 가슴께를 가리키던 손으로 허리를 짚고는 씨익 웃으며 덧붙여온다.
“그래도 너 봐서 참는다. 너가 어련히 잘할 거 같으니까.”
글쎄다. 나도 여태껏 내 인생만 조져봤지, 남의 인생 조져보는 건 살면서 처음이다. 조진다는 것도 딱 내가 받은 만큼만 돌려줄 뿐이지만, 여하튼….
“그럼 슬슬 들어가, 누나. 밤 11시 다 됐어.”
누나부터 집에 보내야겠다. 말 건네자, 자기 폰을 들여다보고는 씨익 웃고 있던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좀 더 놀아달라고 푼수를 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야, 이찬.”
“뭐.”
“언니한테 오늘 일 얘기할 거지.”
어투에 걱정이 뚝뚝 흘러나온다. 윤하 누나가 겉으로는 난폭해도 은근 외강내유 타입이다. 점장과 연관된 일에 한해서는 거의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수준이야.
나도 비슷한 놈이라 어떤 심정인지는 잘 안다. 물건값도 받았겠다, 없던 일로 해버리면 편의점 업주로서의 점장은 행복할 테니까….
“…잘 말씀드려볼 테니까 걱정 말어. 내가 그래도 말주변은 있는 편이잖아.”
허나, 왕년의 대마법사로서의 점장이 행복해하진 않을 터다. 다 떠나서, 전에 점장에게 뭔가를 숨기려 했을 때의 결과가 좋진 않았었다.
누나도 그때를 떠올리면서 이러는 거겠지. 파이프를 꺼내 뻐끔대는 누나를 바라보다, 떠오르는 게 있어 물어봤다.
“누나. 점장님께서 누나랑 알고 지낸 지 20년 정도 됐다 말씀하시더라고.”
“…그쯤 됐지. 언니가 말해줬어?”
“지나가는 말로. 근데, 점장님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20년 전이면 누나도 꼬꼬마였을 텐데, 접점이 당최 떠오르질 않아서였다. 점장이 초등학교 교사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묻자, 연기를 훅 내뿜고는 대뜸 학원지구 정문 쪽을 바라보는 누나. 고개 돌린 채로 해오는 말들 하나하나가, 내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나 사고 나서 죽을 뻔했을 때, 언니가 도와줬었고….”
“……뭔.”
“나 학교도 계속 다니게 해줬고… 가정통신문도 언니가 받아줬고….”
사고가 났었다, 이건 이세계식 사고가 났다는 얘기 같고. 학교 다니게 해 주고 가정통신문 받는 건 부모님이 해 줘야 할 일인데, 그걸 점장이 해 줬다….
“나 외롭다고 투정 부리는 것도… 다 받아줬고. 그러면서도 자길 언니라고 부르래. 나이 들어 보인다면서. 근데 내가 이 얘길 왜 하고 있냐?”
“…내가 물어봐서.”
“아냐. 남들이 똑같은 거 물어볼 땐, 그냥 어쩌다 보니 친해졌다― 대답하고 말기만 했거든. 꾸준하게 말야.”
“…….”
“희한하네.”
그러게. 참 희한한 일이다.
대꾸가 떠오르는데, 입밖으로 내질 못하겠다. 뭐라도 듣고 싶은 건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기 멋대로 결론을 내버렸다.
“예전에, 언니한테 나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단 말을 했었는데. 그래서인가?”
“어떤 동생.”
“몰라. 그냥 너랑 있으면 안 하던 말 하게 된다고. 다 징징댔으니 간다. 짜샤.”
“조심히 가. 말은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그래. 부탁할게.”
이러고는 역 출입구 계단 밑으로 내려가 버렸고, 매장 안으로 들어와 지난 근무 시간들을 죄다 돌이켜 봤다. 이런 얘길 듣게 되리란 걸 내가 미리 알 기회가 있었나…?
없었다. 한 번이라도 누나가 이런 얘길 해 왔거든 필시 머릿속에 기억해 뒀을 거다. 점장이랑 어쩌다 만나게 됐는지를 캐묻지도 않았겠지.
물론 이게 변명은 못 된다. 지금이라도 괜한 거 물어봐서 미안하다,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지금은 아니다. 부탁 잘 들어주고, 해야 할 일 다 끝내고 나서 하는 게 맞아. 바로 폰 들어 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 …여보세요…. ]“목소리에 힘이 없으시네요, 점장님.”
[ 예상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아, 찬아. 지금 깜지 쓰는데, 연필이… 연필 어디 갔지? ]도중에 의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연필이 떨어졌고, 그걸 찾으려다 이런 것 같다. 잠시 후 속삭이듯 말을 잇는 점장.
[ 이 사람들이, 나한테 깜지 20장 쓰라고 해 놓구, 연필은 한 자루밖에 안 줬어. 짜리몽땅해져서 잃어버리면 찾기도 힘들구…. ]“아이고. 주변이 많이 어두워요?”
[ 어둡고 조용해. 다들 사각거리기만 하구. 근데, 무슨 일 있어? 찬아? ]“일이 있기는 한데, 지금 진짜 통화 가능하세요?”
[ 목소리 죽여서 말하면 돼. 지금처럼. ]“그럼 말하겠습니다. 정말 별건 아니고, 매장에 도둑이 들어서 잡고 왔―”
미처 말 끝내기도 전에 의자가 자빠졌다. 이어서 숨 들이켜는 소리, 주섬주섬 자빠진 의자 바로 세우는 소리….
[ …연필 갖고 투정 부릴 상황이 아니네. 그치. ]이어서는 아까보다 열 배는 더 낮아진 점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장이 장기간의 깜지 집필로 심신이 쇠약해진 동시에, 화가 난 것 같다.
“투정 부리셔도 돼요. 그놈들 잡았으니까. 이것도 들으셨어요?”
[ 아니. 미안해, 찬아. 근데 잡았다구? ]“예. 걔네들이 민짜였고, 그리고… 처음부터 말씀드릴게요.”
경찰은 안 불렀다, 유리가 힘 좀 써 줬다. 누나랑 같이 가서 붙잡았고, 그 자리에서 훔쳐 간 물건 금액만큼 배상받아 돌려보냈다. 일단은.
[ 일단은. ]“속된 말로 재수가 없었어요. 이걸로 의견을 여쭙고 싶은 게 좀 있습니다.”
우선 이것부터 확실히 해야겠다. 우리 매장 털었던 놈들 중 리더, 그놈이 알고 보니 국회의원 아들내미더라. 그래도 끝까지 들이받는 게 맞았냐?
[ ……아니. ]더할 나위 없이 불만족스럽다는 말투였다. 점장의 감정 표현이 요새 점점 더 풍부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안 좋은 의미로.
“이유는요.”
[ 찬이 살던 곳은 국회의원 들이받으면 어떻게 돼? ]“제가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높은 확률로 머리가 깨집니다.”
[ 여기도 똑같아. 신고하고 경찰 부르면 당장은 기분이 풀리겠지. 풀리겠지만…. ]신고를 해서 경찰이 온다. 그 경찰한테 뱀파이어 민짜 놈이 똑같이 얘기를 한다. 아빠가 국회의원인데도 이러냐.
이후엔 경찰청 높으신 분들이 울분을 토해올 터다. ‘국회의원 아드님한테 수갑을 채우다니 미쳤어?! 지금 내 제복 벗기려고 작정한 거야!!’
그럴 작정인 게 아니었으니, 신고받은 경찰들이 삼삼오오 모여 말해오겠지. 애들이 반성하고 있는데 합의 보고 끝내는 게 어떨까요? 서로 피곤해지기도 하고―
이게 권유가 아니다. 내가 항복문서를 가져왔으니 여기에 사인을 하라는 뜻이지. 여기까지를 점장이 말해 왔다. 내가 아니라.
[ 거기에 사인할 때까진 절대로 안 물러날 테구, 에휴. 내가 은퇴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은퇴요?”
[ 이런 게 진짜로, 진짜로 마음에 안 들어. 매장에 건 보안 마법들, 전부 실제 사용되는 규격에 맞춰서 걸어둔 거란 말야. 그렇게 안 하면 마법 남용이다, 이렇게 안 하면 허가 못 내준다. 근데, 보안이라는 게 아무도 못 풀어야 완벽한 보안 아니야? ]“네. 맞죠. 네….”
[ 규격 맞춰 쓸 거면 보안 마법을 왜 거냐구, 그냥 쇠사슬 꽁꽁 묶고 말지. 내가 아무 문제도 없다, 유지보수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렇게 말해도 마법청 사람들은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무책임하게. 자기들이 내 매장 지켜주지도 않으면서…. ]내 기억으로는 점장이 깜지 쓰러 마법청으로 갔다. 마법청 뒷담화를 마법청 건물 내부에서 대놓고 늘어놓고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듣는 도중엔 이거 괜찮은 게 맞냐는 생각만 들었는데, 실천은 못 했다. 점장이 자기 매장에 얼마나 진심인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냥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카운터에 물건 갖고 오면 어련히 계산해 줄 텐데. 용돈을 안 받는 것도 아닐 텐데, 이 나쁜 놈들이…. ]“…그러게요….”
재미로 그런 거다. 걔네들 동기를 까먹고 말을 안 했는데, 계속 말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난 점장이 욕하는 걸 듣고 싶진 않다.
[ …유리는 괜찮대? ]“유리요?”
[ 유리 근무 시간에 도둑 들었다며. 자책하구 있을 것 같아서. ]“했었죠. 네 잘못 아니니 그러지 말라고 말해뒀습니다.”
[ 잘했어. 미안해, 찬아. 언성 높여서…. ]“죄송할 짓은 제가 했죠. 거기 조용하다면서요.”
이 말에는 대답이 없다. 정적인 곳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몸 움츠리고 있을 점장 모습이 쉽게 연상이 됐다. 슬슬 주제를 바꿔야겠다.
“…여튼 물질적으로는 합의는 봤고, 이 이후 얘기인데요. 점장님.”
[ 응. ]“말씀드릴 게 몇 개 더 있습니다. 생각해둔 계획도 있고….”
* * *
초보 반마법사가 왕년의 대마법사에게, 이세계 인생 1.5개월 차가 18년 차에게.
이것만큼은 편돌이가 아닌 반마법사로서 물어봤다. 정중하되 계산적으로. 인생 조언을 구한다는 느낌으로 물었고, 점장도 똑같이 계산적으로 대답해 왔다.
[ 반발이 좀 있을 거야. 이건 찬이 언변이 많이 중요할 것 같은데…. ]“언변 말고 더 보충할 게 있을까요?”
[ 아니. 반마법 실력은 찬이만 한 사람이 없으니까, 당위성만 보태면 돼. 시판되는 마법서들 서문 몇 개를 인용하면 충분할 테고, 또. ]어떤 말을 인용할지도 스스럼없이 말해줬고, 잠자코 머릿속에 담았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아예 이런 대화 자체를 안 하고 있었을 거다.
편의점이 그런 곳이라서다. 진상 부리는 놈 따로 있고 참는 놈 따로 있다. 도둑질하는 놈 따로 있고, 당하는 놈도 따로 있는 곳.
오늘은 못 참아준다. 여기가 이젠 그런 곳이 됐다. 내가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곳이고,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쥐여준 곳이다. 여기가 처음이다.
우리 서로 좋은 추억 만들어 보자. 그렇게 말해왔었다. 이놈들 원하는 대로, 존나게 좋은 추억 하나 쥐여서 살게 해주겠다.
[ 그리고 찬이가 필요하다구 했던 물건들… 가면이 문제인가? ]“예. 애들 장난감 코너에는 없더라고요. 지하창고 쪽 찾아봐도 됩니까?”
[ 입구에서 두 번째, 구석에 있을 거야. 음성 변조해주는 기능도 있어. ]“한번 찾아볼게요. 그리고, 따로 말씀드렸던 건….”
[ 엘프 여자애 말하는 거면, 잘될 거야. 잘될 수밖에 없는 구조거든. ]“…예. 편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장님.”
[ 난 1년 365일 찬이 편이야. 찬이도 지금 내 편 들어주고 있으니까. ]나 말릴 생각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오전 3시까지. 꼬박 이야기만 나눴다.
* * *
“오빠. 언제 집에 갈 거예요?”
“볼일 보고 갈 건데, 니는 다 먹었으면 좀 치워라. 왜 가만 바라보고만 있어?”
“아직 다 못 먹었잖아요.”
“그 정도면 다 먹은 거지. 브로콜리만 하나 달랑 남았잖냐.”
“하지만….”
오전 6시. 교대 시간 딱 맞춰 유리가 출근했고, 바로 도시락부터 데워서 쥐여줬다. 어제 힘 써준 보답이다.
보람 있게도 이 녀석이 도시락을 거의 다 비우긴 했는데, 브로콜리 하나만 플라스틱 도시락 판에 덩그러니 놓고는 한 시간이 넘도록 꼬박 바라보고만 있더라고?
왜 그러고 있냐 묻자 이 녀석이 말하길, 자기가 브로콜리를 못 먹는댄다. 마음 같아선 버리고 싶지만?
“직장 선배가 밥 사준 거 남기면 안 된대요. 실례라고.”
그래서 바라만 보고 있는 거란다. 용기 나거든 먹으려고. 밖에서 일 보고 와도 이러고 있을 게 빤히 보여서, 그냥 내가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방금 막 먹으려고 했어요.”
“웃기고 있네. 근데 유리야. 브로콜리 위에 오돌토돌한 부분 때문에 못 먹는 거면, 편의점 도시락에 들어있는 것들이 더 깨끗하지 않겠냐? 데쳐서 파는 거니까.”
“이 브로콜리는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알어. 너 아는 사람이 그러든?”
“네.”
태연하게 대답해온다. 어제였으면 그 아는 사람한테 영양사 자격증도 있냐며 빈정댔겠는데, 이젠 더는 못 그러겠다. 오오, 전지전능하고 위대하신 분. 아는 사람이시여….
“그 양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
“네?”
“이제 너 몸은 괜찮냐?”
어제 전화 끊기 직전, 이 녀석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묻자, 텅 빈 도시락을 들어 올리며 대답해왔다.
“괜찮아요. 그리고, 오빠.”
“뭐.”
“밖에.”
빈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밖을 바라보길래, 따라서 바라봤다. 지금 시간이 오전 6시 57분.
눈에 익은 외제차 한 대가 저 멀리서 슬금슬금 다가오다, 빨간불에서 멈춰섰다. 저 신호등 바뀌기 전에 나가면 될 것 같다.
“저 차 기다리는 거죠.”
“어. 나 볼일 보고 올 테니까, 너도 매장 잘 보고 있어라.”
“네. 나중에 봐요, 오빠.”
인사 나눈 뒤, 미리 싸둔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