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46)
이세계 편돌이-245화(246/331)
245. 킬각이 늘 최선의 수는 아니야 (4)
* * *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살펴봤다. 확실히 버려져 있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카드 귀퉁이가 흐물흐물한 게 물에 한 번 적셔진 듯하고, 뚜렷하게 신발 자국도 남아있고….
밟힌 것도 한두 번 밟힌 게 아닌지 일부분은 아예 찢어져 있다. 너덜너덜한 카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고개 숙인 채 마저 설명해오는 하나.
“쩌어기 정문 앞에 떨어져 있었구, 눈 색은 저랑 똑같구… 그쳐.”
“비슷하긴 하다, 하나야. 호박색이니까.”
“내. 그래서 불쌍해 보여갖구, 주어왔는대여… 아조씨.”
“응.”
“이 애는 왜 버려져 있던 걸까여?”
왜냐면, 이 카드가 짱돌겜 극초창기에 출시된 구데기 카드이기 때문이다.
시즌 1 노말 등급 마수, 토끼 소녀. 소환하는 데에 투명 마나석 2개가 필요하며, 공격력과 체력이 각각 2와 3으로 책정되어 있다.
반면 이번 시즌에 출시된 노말 등급 카드는 동일한 공격력과 체력을 지녔으나, 투명 마나석을 1개 소모한다. 공격력과 체력 합이 같음에도 비용이 절반이란 뜻이다.
왜 이런 부조리가 일어나느냐. 이 세상이 자본주의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새로 출시되는 카드가 이전 카드랑 성능이 똑같으면 새 카드를 누가 살 거며, 카드회사는 뭐 먹고 살아?
성능 좋은 카드를 쓰고 싶다는 니즈를 채워주기 위해 카드회사에서 매년 카드 평균 성능을 상향했을 테고, 이게 매 시즌 반복되며 노말 등급 마수들 성능도 덩달아 상승했을 테고….
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토끼 소녀도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구데기 카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잠깐 고민하다, 아예 방향을 틀었다.
“그… 이 토끼가 다른 당근 카드를 전부 먹어버린 게 아닐까?”
이 토끼가 능력이 부족해 사회에서 도태됐기 때문이야, 이걸 그대로 얘기했다간 이 녀석 동심이 산산조각 날 게 분명하다. 내 대답에 꼬리를 물음표 모양으로 구부리는 하나.
“다른 당근들을여?”
“어. 그래서 카드들 주인이 화가 나서 쫓아낸 거지.”
“에… 그치만, 안에 당근이 엄청 만아여. 아조씨.”
“많다고?”
“내. 주변에두 있구, 뒤에 어엄청 큰 것두 있구.”
직접 카드 집어 살펴보니, 검을 등에 맨 토끼 소녀 뒤로 온통 당근밭이 펼쳐져 있기는 했다. 맨 뒤에는 창문과 나무 문이 달린 거대 당근 집도 있고.
막 집을 떠나 모험을 시작하려는 토끼 소녀. 이런 컨셉으로 그려진 일러스트인 듯한데, 아까는 토끼랑 공격력, 체력밖에 안 보여서 몰랐다. 숫자만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어른 다 됐다.
“자기 당근이 있는대, 다른 당근을 머글까여?”
“그건…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 그랬다든가.”
“떡? 당근이 아니구?”
남의 집 당근이 더 맛있어 보였던 게 범행동기 아니었겠냐. 말해보려다, 애꿎은 토끼만 절도범으로 만드는 것 같아 관뒀다. 이것 외엔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 말을 돌렸다.
“그, 하나야. 너 낮잠 시간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어도 돼?”
“에… 아. 갠차나여, 선생님께서두 갠찬타구 하셧구.”
안 졸린 애들은 유치원 앞 놀이터에서 놀아도 된다, 아니면 보호자가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낮잠 시간 끝나기 전까지 돌아오면 된다―
이렇게 해석되는 얘기들을 서투르게 늘어놓고는, 한창 북적이는 학원지구 정문 쪽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한비 아조씨랑 슬비 아주머니두 저기 계셔여.”
전에 찾아왔던 용 쌍둥이가 오늘도 같이 따라 나왔다는 것 같다. 하나 어머니 회사에 재직 중인 직원들인 동시에, 매장 ATM 옆 공간에 앞뒤로 쭈그려 앉아 있었던 그 양반들.
첫 등장부터가 범상치 않았던 쌍둥이라 잘 기억하고 있다. 지금 여기 있는 것도 그 둘이 동의해 준 덕인 듯한데, 보호자란 양반들이 저기서 따로 뭘 하고 있는 거래?
“그거는… 잘 모르겠서여. 한비 아조씨께서, 엄청 중요한 일이 있다구는 하셧는대.”
그동안 원한다면 편의점에 먼저 가 있어도 된다, 딱 이 제안만 들었단다. 하나는 ‘그래두 대여?!’ 물어본 다음 허락받자마자 냉큼 뛰어온 거고.
듣던 도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일 보시는 데 15분쯤 걸린다 하시지 않든?”
“에? 어뜨케 아셧어여?”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지금이 하나가 온지 딱 15분쯤 됐다. 밖을 바라보자, 마침 검은 양복에 머리에 뿔 달린 남녀 한 쌍이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건너 매장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둘 다 큼지막한 배낭을 멘 데에 더해 양쪽 다 얼굴이 훤하다. 그 얼굴 그대로 매장에 들어와 날 바라보다, 슬비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이찬 씨!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전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두 분께서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길래 하던 말 멈추고 가만히 지켜봤다. 입가를 씨익 올리며 눈을 감고는, 양팔을 벌린 채 고개를 치켜들며 중얼거린다.
“지금은 승리의 여운을 만끽해야 하니까….”
카드게임 하다 온 게 맞나보다. 짱돌겜의 판당 평균 플레이타임이 10~15분이기 때문이다. 둘 다 잘 지낸 듯해서 질문을 바꿔 물었다.
“다 만끽하셨으면 대답이나 해주십쇼. 두 분 저기서 게임하다 오신 거예요?”
“아직이다. 아직 한참 멀었어…!”
“저는 게임은 안 해요. 그냥 수집만― 아, 한번 보여드릴까요? 이찬 씨?”
괜찮다고 해도 억지로 보여줄 기세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의기양양한 얼굴로 배낭에서 작은 유리 케이스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는데, 카드가 글쎄….
“볏짚이에요, 이찬 씨.”
“허어….”
“어때요. 신기하지 않아요?”
그것도 보통 볏짚이 아니라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 특수제작 볏짚이었는데, 신기하긴 신기했다. 다른 카드들 놔두고 왜 하필이면 볏짚에 금박을 씌웠대?
의견을 말하자, 아련한 눈빛이 되어서는 맞장구쳐왔다.
“그쵸. 저도 그게 신기해서 사 버렸지 뭐예요. 또 섬에서 지낼 때 볏짚 나르고 다녔던 옛날 생각도 나고….”
섬마을 농촌 소녀로 살았던 추억에 23만 원 주고 충동구매 해버렸다는데, 슬쩍 검색해 봤더니 볏짚 250kg의 현재 시가가 11만 원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와중에 자아도취가 끝났는지, 옆에서 한비 양반이 한심하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그딴 구데기 카드에 왜 그렇게 돈을 소비하는 거지?”
“뭐! 어디에 돈 쓰든 내 마음이지. 한비 니가 보태주길 했냐, 뭘 했냐?”
“사용 금지된 카드에 돈을 왜 소모하냐는 소리다.”
볏짚이 뭘 잘못했다고 사용 금지까지 당하나 싶었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볏짚이 잘못하긴 했다. ‘필드 위에 존재하는 동안, 아군 마수들에게 대상 지정 불가 효과를 부여한다.’
마수가 볏짚에 숨어버리는 개념인 듯하다. 이게 시즌 3에 출시된 카드인데, 아군 마수를 반무적 상태로 만드는 사기적인 스펙 탓에 출시 3일 만에 대회 사용이 금지됐다고.
이렇게 소장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삼일천하 당시의 강렬했던 임팩트를 기리기 위함이란다. 이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슬비 씨는 뾰로통한 표정이었으나, 한비 양반이 전혀 소신을 굽히질 않았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과 다름없지 않나.”
“웃기고 있네. 그럼 니 방에 포스터들은 왜 붙여놨어. 엿 바꿔 먹으려고?”
“포스터와 카드는 다르다. 난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할 줄 아는 남자다. 가령… 이찬.”
“뭐요.”
“너는 그런 카드를 왜 쥐고 있는 거지?”
듣는 순간 뇌 정지가 왔다. 뭐야, 이걸 내가 왜 아직도 쥐고 있냐?
“아까부터 궁금했다. 네 녀석은 그런 쓸모 따위 전혀 없는―”
“잠깐만요.”
“구데기 카드를 왜 들고 있나. 손님이 버리고 가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이 양반아, 잠깐만이라니까?”
이거 내 카드 아니고 하나 꺼다, 이 말도 못 꺼내겠다. 여기에 대고 ‘이 카드 내 꺼 아니다―’라고 말해버리면, 이 카드가 구데기 카드라고 나도 인정하는 셈이 되어 버리잖는가?
그래서 잠깐만이라는 말만 줄곧 반복한 건데, 이 양반이 기어이 한마디를 더 내뱉고 나서야 말을 멈췄다.
“휴지 대용으로도 못 쓸, 왜 자꾸 잠깐만이라는 말을 하는 거지?”
그건 이제부터 같이 생각해 보자고, 이 양반아. 착잡한 심정으로 카드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옆에서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쓸모가… 업서…?”
“…….”
“전혀…?”
“…오.”
슬비 씨가 탄식과 동시에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는데,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함께 머리를 굴려야 한다고. 한숨만 쉰다고 뭐가 달라져?
“…내 말은, 내가 쓸모도 없는 구데기라는 뜻이었다. 이찬. 오해하지 마라.”
“오해 전혀 안 했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이게 쓸모가―”
“마, 맞아요. 이찬 씨, 이 카드 엄청 쓸 만하잖아요. 한비 얘가 잘 몰라서 그런 거지.”
둘 다 뇌 정지가 쎄게 왔는지 아무 말 대잔치를 내뱉고들 있는데, 나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쓸 만한 카드라고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냐….
아까 검색했던 내용에 의하면, 이 카드는 시즌 초창기에조차 채택률이 10%가 채 되지 않았다. 짱돌겜에 종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토끼 소녀는 어느 종족에도 속해있질 않기 때문이다.
토끼라기엔 이름에 소녀가 들어가는데, 그렇다고 인간 종족으로 치기엔 이름이 하필이면 토끼야. 이 애매함 때문인지 토끼 소녀는 종족값이 없고, 때문에 어떠한 시너지도 받을 수가 없다.
이 카드를 채택하는 상황은 딱 한 가지 경우. 갓 입문한 뉴비들이 40장 어치 카드팩 지르고, 그 카드로 그대로 덱을 꾸릴 때뿐이었을 텐데, 이게 쓸만하냐고 묻는다면―
“그치만… 휴지로 쓴다매여….”
“그건 제 양복을 이야기하는 거였―”
“거 가만히 좀 있어 보십쇼. 이거 쓸만해, 하나야. 생각해봐. 이게 너랑 닮았잖어?”
“우으….”
“그런 카드가 쓸모가 없겠냐고. 말이 안 되잖아.”
이젠 뭔 수단을 써서든 쓸만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방울이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가 아까 그랬다. 이 카드 눈동자가 자기랑 닮은 호박색이라고.
그런 카드가 ‘쓸모없음’ 판정을 받아버리자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하다. 되는대로 말하며 테이블 위의 휴지를 뜯어 건네주자, 더욱 목이 메어서는 중얼거리는 하나.
“휴지….”
“휴지로 쓸만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게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 봐.”
바로 카운터 쪽으로 달려가 몸 숙이고 들어가는 사이, 바코드를 찍던 유리가 내게 물었다.
“갑자기 왜요, 오빠.”
“별일 아니고, 나 카드팩 가져간다.”
괜히 대답해서 얼간이 소릴 듣고 싶지는 않다. 카드팩 두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가위도 마저 가져와 한비 양반에게 물었다.
“아까 저 안에서 카드게임 하다 오신 거 맞죠. 이기셨고.”
이 양반도 울음보가 터지기 직전인지, 입술 꾹 닫은채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 대답해왔다. 카드팩 상자에 가위를 꽂아 넣으며 선언했다.
“들었지, 하나야. 한비 아저씨, 아까 안에서 딴 사람 이기고 왔대.”
“…내.”
“내가 이 카드로 한비 아저씨 이겨볼게. 그럼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