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58)
이세계 편돌이-257화(258/331)
257. 킬각이 늘 최선의 수는 아니야 (16)
* * *
의자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돌이켜봤다. 앞선 게임들 중, 최소 한 번 이상 공개됐던 챔피언 양반 카드가 20장 정도.
그 20장 모두 용도가 뚜렷했다. 단두대를 보조하거나, 명치를 지키거나, 상대 행동을 맞받아치거나. 덱 절반 구성이 이렇다면 나머지 절반도 비슷한 카드들로 채워 놨다고 봐야 한다.
나와 컨셉이 동일하단 뜻이다. 토끼 소녀를 보조하거나, 명치를 지키거나, 상대 행동을 맞받아치거나. 이런 컨셉의 덱끼리 맞붙을 경우,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 자, 26번째 도전자분께서 나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도전자분께서는…. ]상대방을 더 열받게 하는 쪽이 이긴다. 어떻게 해야 챔피언을 더 열받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무대에 올라갔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중간 과정이 하나 늘어났다.
[ 팔에 배틀 파츠를 차고 계시네요. 이걸 착용하신 분은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해설자가 해야 할 진행은 안 하고 내 팔을 바라보며 지저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완구가 애들에게 사주기 딱 좋은 장난감이다, 예절을 배우기 위한 감정표현 기능도 탑재되어있다―
카드회사 주관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이어서인지 자사 제품 PR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근데 이럴 거면 나한테 홍보비라도 줘야 되는 거 아니냐? 아니면 품위유지비든, 뭐든….
관중들 대다수 표정이 ‘저놈은 몇 살인데 애 장난감을 차고 있어?’ 이런 느낌이어서다. 아니면 입 다물고 게임이나 하라는 거든가. 몇 마디를 더 꺼내고 나서야 PR을 멈추고는 내게 말을 거는 해설자.
[ 이걸 차고 나오신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그….”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마력을 못 쓴다. 홧김에 탈룰라를 시전할까 고민하다, 더 좋은 말이 떠올랐다.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친척… 동생처럼 지내는 애가 한 명 있습니다. 지금 여기 있고요.”
[ 아, 그 아이가 관중석에서 보고 있다! ]“예.”
이 정도면 나름 모범답안이다. 거짓말도 아니고, 차고 싶어서 찬 게 아니라며 티 낸 것도 아니고. 하나 쪽을 바라보니, 빈 아이스크림 통을 품에 안은 채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주려고 나왔습니다.”
내 말에 해맑게 미소를 짓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좋은 추억만 안고 가자고. 우리.
[ 아무럼요, 좋은 추억이 될 수밖에! 전년도 챔피언과 대결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심지어 25연승을 깨기 위해 나오신 건데! ]헌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살짝 쫄리기 시작했다. 그새 부스 밖으로 나온 챔피언이 내 앞으로 다가왔는데, 이 양반이 얼굴에 가면을 쓴 채다. 신비주의이기라도 한 건지, 뭔지….
…여우 가면. 내가 예전에 썼던 것과 유사하게 생겼다. 심사관 노릇 할 때.
[ 그럼 챔피언께서는― 이미 나와계셨네요. 그럼 곧바로 코인 토스 진행하겠습니다! 도전자분, 어떤 면으로 하시겠어요? ]더해서 나보다 머리 반 개만큼 키가 작았고, 가면 양옆으로 툭 튀어나온 귀가 뾰족하다. 저 모양이면 종족도 분명….
“…남은 면 고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물론이죠! 그럼 챔피언. 앞면인가요, 뒷면인가요? ]확인해보고픈 게 생겼다. 해설자의 물음에도 잠깐 동안 말이 없다가, 동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대답하는 챔피언.
― 앞면.
나름 변조되긴 했으나 그 정도가 크지는 않다. 앳된 여성 목소리다. 챔피언 대답에 해설자가 곧바로 동전을 튕겼고, 앞면이 나왔다.
[ 챔피언의 선공이군요. 두 분께서 부스에 들어가시는 즉시 절차를 밟고, 게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들어가라는 것 같은데,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지금 막 확인한 사실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오늘 중에 분명 언질을 듣긴 했다. 듣긴 했는데, 그게 설마 이 얘기였을 줄은 몰랐지….
― 저기….
“예?”
― 잘 부탁드릴게요.
“어… 예. 저도요.”
인사를 받자, 가면 쓴 얼굴을 꾸벅 숙이고는 뒤돌아 걷는 챔피언. 나머지 대화는 카드로 천천히 나눠보자, 이 의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저러는 게 맞고. 그때와 입장이 정반대가 되긴 했지만, 그게 다다. 각자 할 일 하고 원하는 것 얻어서 돌아가면 그만이다.
등 돌려 부스로 들어간 뒤 문을 닫자, 부스 밖의 부산스럽던 소리들이 순식간에 먹먹해졌다. 허공으로 둥둥 떠오르던 부스가 3층보다 살짝 낮은 위치에서 느려지다가, 멈췄다.
[ 도전자분, 준비는 되셨나요? ]부스 구석에서 대뜸 해설자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 안에도 따로 장치가 되어 있었나 보다. 탁 트인 바닥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예.”
전망 한 번 좋다. 카드 게임 하기 딱 좋은 곳이네.
[ 알겠습니다! 그럼 챔피언의 선공으로― 게임 시작! ]* * *
짱돌겜의 덱 타입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어그로, 미드레인지, 컨트롤. 지향점을 초반, 중반, 후반 중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보면 된다.
초반부터 저비용 카드들을 잔뜩 내밀어 승부를 보는 게 어그로, 매 턴 보유한 마나석에 맞는 고효율 카드를 내는 게 미드레인지, 상대 행동을 받아치듯 플레이하는 게 컨트롤.
어그로 덱이 바위, 미드레인지 덱이 가위, 컨트롤 덱이 보자기를 담당하고, 이 셋이 가위바위보처럼 물고 물리는 게 현 시즌 짱돌겜의 메타다― 라고, 커뮤니티 인기 1위 공략글에서는 그러더라.
그 공략글의 인기 2위 댓글. ‘그러면요, 만약에 컨트롤 덱이랑 컨트롤 덱이 서로 만나면 엄청 지루하겠네요? 서로 받아칠 만한 행동을 안 하니까.’
그 댓글의 답글이 1위였는데, 보자기로 상대방 뺨을 먼저 후려치는 쪽이 이긴다는 내용의 답글이었다. 그 답글의 추천 개수가 8천 개였나, 9천 개였나…?
내가 추천을 하나 늘려줬다는 건 기억난다. 컨트롤 덱 매치업이 복잡한 듯하면서도 단순하다. 승리 플랜 구현을 먼저 수행하되, 상대방이 그 플랜을 깨게 두어서는 안 된다.
챔피언은 후자에 중점을 두고 플레이하는 듯 보인다. 선공 1턴째, 카드를 한 장 뽑고 턴 종료. 2턴, 3턴, 마찬가지로 카드 한 장을 뽑고 턴 종료.
4턴째인 지금도 하는 짓이 똑같다. 카드를 뽑고, 아무것도 안 하고 턴 종료를 선언. 단 한 번의 마나석 강화조차 하지 않았고, 첫 5장을 포함한 카드 9장이 고스란히 손패에 쥐여 있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챔피언은 지금 저 자리에서 25번 연속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자기 덱 구성이 낱낱이 까발려졌다는 전제로 플레이하고 있을 터다.
카운터당할 것도 마찬가지로 염두에 뒀을 테고.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컨셉대로 받아치되, 손패의 단두대를 최소 한 번은 스스로 파괴하는 것.
변화도, 강탈도 당해서는 안 된다. 변화 효과 카드에 당해버릴 경우 ‘파괴’된다는 조건이 충족이 안 되고, 아예 뺏겨버릴 경우엔 역으로 당해버린다.
그리고 현 시즌, 상대 손패의 지형지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카드는 없다. 필드 위의 지형지물을 강탈하는 카드가 1종, 변화시키는 카드가 2종.
반면, 파괴된 지형지물을 손패나 필드로 불러들이는 카드는 4종. 강탈과 변화 카드 전부로 카운터를 맞아도 복구가 가능하다.
지금 그 카운터를 방지할 수가 없어서 저러는 거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챔피언은 4턴째를 넘길 때까지 마나석 강화 카드도, 자가파괴 카드도 못 뽑았다.
이제 내 차례인데, 나도 솔직히 남 말 할 처지는 못 된다. 1턴에 키 카드 단 한 장에 받아치는 카드만 네 장이 뽑힌 데에 더해, 마나석을 강화하는 카드가 이제 한 장.
“투명 마나석 2개로 ‘지반 다지기’ 사용. 턴 종료.”
지금 손패가 후공 전용 카드 ‘돌멩이’ 한 장을 포함해 총 9장. 빈자리를 겨우 만들긴 했지만, 다음 턴이면 다시 채워져 버린다.
허나, 이건 챔피언도 마찬가지다. 5턴에 접어든 지금, 뽑히는 카드가 뭐든 간에 반드시 사용해야만 한다. 그게 유효한 카드가 아니라면 방법은 딱 하나, 단두대를 내는 것.
손패 태우는 거 솔직히 부담되잖냐. 적당히 하고, 얌전히 단두대 낸 다음에 나한테….
[ 5턴. 챔피언의 턴. 턴 종료. ]…이런 망할, 진심이야?
[ 도전자의 차례입니다. ]해설자 목소리는 게임을 시작한 직후부터 끊겼다. 소음이라고는 부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뿐이고, 딱 상대방이 한 행동만을 알려주고 멎는다. 아무것도 안 했단다.
바로 내 손패를 확인했다. 처음에 뽑은 5장 중 두 장이 각각 토끼굴, 골판지 공방.
각각 ‘아군 필드의 마수 한 마리를 보관합니다.’와, ‘사용자는 양쪽 필드의 지형지물을 1채씩 선택해 <골판지 하우스>로 변화시킨다’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전자는 토끼 소녀를 보호하려고 집어넣은 카드다. 후자는 저비용 토끼굴을 먼저 내놓고, 상대방 핵심 지형지물 하나를 무력화하는 의도로 집어넣었고.
골판지 하우스의 효과는 ‘마나석 1개를 대체합니다, 다음 턴에 파괴됩니다.’ 이게 전부다. 생으로 단두대를 내거든 이 두 장으로 끝을 보려 했다.
자가파괴가 불가능한 동안에는 단두대가 생으로 나올 타이밍이 반드시 한 번은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니면 마수를 내든가, 뭐라도 했겠지….
헌데 어느 쪽도 아니다. 손패 10장이 꽉 찬 상태에서조차 턴을 넘겼다. 이러면 단두대를 손에 쥐고 있는 건 확정이다. 문제는 그다음.
[ 제한 시간 15초 남았습니다. ]저 녀석, 내가 이 두 장을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그게 아니고서야 저러는 게 말이 돼?
아무리 후반 지향형 덱이어도 그렇지, 어느 미친놈이 카드가 탈 상황에서도 3초도 채 주저 안 하고 턴을 넘겨. 단두대를 생으로 내면 무조건 진다고 100%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짓거리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확신을 풀면 내가 이긴다.
“…마법카드 돌멩이를 사용. 턴 종료.”
임시 마나석을 한 개 더 늘린 뒤 아무것도 안 했다. 이 연계는 마나석을 낭비해서라도 한 턴을 더 볼만한 가치가 있―
[ 6턴. 챔, 턴 종료. 도전자의 차례입니다. ]“하, 씨.”
기계음이 말을 하다 말 정도로 순식간에 턴을 종료한 것 같다. 이 망할 녀석이, 상대방 열받게 하는 게임에서 내가 질 줄 알아?
카드를 뽑았다. 이제 나도 10장이다. 니가 안 낸다면 나도 안 낸다.
“턴 종―”
어디 한번 서로 끝까지 가보―
“―잠깐만 있어 봐.”
[ 잠깐만 있어 봐, 라는 카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발음해 주십시오. ]그럴 생각 없다. 입 굳게 다물고, 이대로 게임이 진행되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봤다. 저 녀석도 카드를 안 내고, 나도 카드를 안 낸다. 이걸 30턴까지 그대로 유지한다?
이 경우엔 공허 마나석 가중 데미지를 저 녀석이 먼저 받는다. 선공이니까. 공허 마나석 데미지가 누적되어 사망할 경우, 걸리는 턴이 총 9턴.
그 과정에서 튀어나올 마수들은 전부 정리할 수 있다. 이걸로는 안 죽는다. 문제는, 짱돌겜 카드들 중 ‘상대방은 카드를 1장 뽑습니다.’라는 부속 효과를 지닌 카드가 분명 있다는 것.
내가 본 20장 중에는 없었고, 난 채용 안 했다. 하지만 저 녀석 손패에 그 효과를 지닌 카드가 있다면….
…아냐. 생각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
“…….”
[ 제한 시간 15초 남았습니다. ]“…바위 마나석 1개, 투명 마나석 1개로 토끼굴. 턴 종료.”
필드에 토끼굴을 내려놓고 턴을 종료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의 챔피언이 손패 두 장을 들어 차례로 내려놓는다.
[ 7턴. 챔피언의 턴입니다. 투명 마나석 2개를 소모해 마법 카드 ‘이그드라실 10번지’ 사용. ]손패의 무작위 지형지물 하나를 필드 위에 건축한 뒤, 상대 지형지물 중 하나를 건축한 비용에 맞게 변화시키는 카드다. 비슷한 성능을 가진 다른 카드, ‘부동산 처분’의 열화판이다.
비용이 1코스트 저렴한 대신, 그만큼의 페널티가 존재한다. 이 카드에는 ‘사용 시 생성되는 카드를 다음 차례에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이 붙는다.
[ 다음으로, 투명 마나석 1개로 ‘지하괴물 등장’ 사용. 도전자께서는 카드를 2장 뽑아주십시오. ]“…….”
[ 언제라도 좋습니다. ]“망할, 게임 개 이상하게 하네.”
상대방에게 손패를 2장 쥐여주는 것. 강제 드로우 카드가 있다고 가정한 것 자체가 잘못됐다. 애초에 그 카드가 있으니까 저렇게 플레이를 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