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63)
이세계 편돌이-262화(263/331)
262. 아름다운 게임 했잖아, 한잔해 (3)
* * *
예전에 멀리서나마 본 적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생판 남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모녀간에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점이 많은 걸 넘어 공통점을 찾아보기가 힘든 수준이다. 하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애다. 머리카락과 눈썹, 같이 있을 때의 포근함까지 전부 다.
헌데 애 엄마는 그 반대다. 허리께에 닿는 머리카락과 눈썹, 풍기는 분위기. 한없이 새카맣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입고 있는 옷마저도 새카맸는데, 양복이라고만 생각했던 옷이 가까이서 보니 양복이 아니더라. 소매가 하늘거리는 원피스 드레스. 치맛단에는 금박 꽃무늬가 새겨진 게….
“대답은 안 하는 겐가?”
양복과 전통복, 그 사이의 무언가 같다. 이건 또 처음 보는 디자인이라 잠깐 시선이 팔렸었는데, 그사이에 드래곤이 두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채였다.
“어, 예?”
“물었잖나. 구면과 초면, 어느 쪽이 좋느냐고 말이야.”
다시 얼굴을 올려다봤다. 얼굴을 보니 하나와 닮은 점이 딱 한 가지 있기는 했다. 눈동자 색이 똑같은 호박색이다.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눈을 마주치자, 날 향하던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수축했다. 회사 앞 사거리에서 마주쳤던 그 눈이다. 밧줄로 옭아매이는 듯한 압박감.
“…구면인 쪽이 좋습니다.”
빈말로라도 처음 본다고는 못하겠다. 대답하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마저 말해온다.
“한번 마주친 자는 쉽게 잊질 못해서 말이지.”
“…….”
“이걸로 두 번째니, 이젠 절대로 잊지 못할 게야.”
본인에 대한 게 아니라, 나보고 들으라 하는 말처럼 들린다. 네가 나를 마주친 게 이번이 두 번째니, 이젠 절대로 잊지 못할 거다… 에이, 씨.
이렇게 쫄아만 있다간 아무것도 안 된다. 먼저 물었다.
“저, 어머님. 이 늦은 시간에….”
이날이 언젠가 올 거라고 짐작은 했다. 상식적으로 7살배기 딸이 어딘가에 놀러 간다 하거든 엄마로서 파악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는 게 맞아? 애 엄마이기 이전에 대기업 사장인 사람이 밤 10시에 리무진을, 그것도 운전기사한테 운전시켜서 직접 찾아오는 게 맞냐고. 기사 퇴근 안 시켜?
“자네 근무시간이 지금이잖나. 이찬.”
“근무시간요. 예….”
근무시간 미리 알아두고, 겸사겸사 이름도 미리 알아두고 찾아온 거란다.
뒤이어 법원에서 보자는 말을 해올 것 같아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주머니에서 검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오는 드래곤.
명함이었다. 앞면은 검은색 배경에 호박색 테의 화려한 마법진. 뒷면에 새겨진 문자도 마찬가지로 호박색에, ‘코퍼레이션 에인션트 CEO, 미리네.’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맞죠. 감사합….”
“그 명함이 내 소개이니, 이젠 자네 소개를 해주겠나?”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딸과는 어쩌다 친해졌는가?”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묻고 싶었다. 외관만 보면 20대 중반으로 봐도 무방하실 분이 말투 참 고풍스러우시다, 혹시 실제 나이가 어떻게 되시냐….
따위를 물었다간 겨우 받은 변론 기회가 날아갈 것이다. 하나랑은 우연히 만났다. 지난달 초에 하나가 어버이날 선물을 만들 재료를 사러 찾아왔었는데, 가위를 살 돈이 모자랐다.
그래서 매장 가위를 빌려줬었고, 겸사겸사 색종이 자르는 걸 내가 도와줬고, 그러다 친해졌다. 감기에 걸린 채로 놀러 왔을 땐 아카시아 꿀물을 사 줬었고, 같이 과자도 먹었었고―
“내 딸의 뿔.”
“그리고, 또… 뿔이요.”
“자네가 수를 썼을 터인데 말이야.”
“…예.”
솔직하게 고백했다. 애가 순혈 드래곤이라는 이유로 유치원 또래 애들이 무서워하고, 하나는 그 감정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검정색으로. 그 색이 무서워서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그게 안타까워서 내가 도와줬었다. 상시발동되던 마법을 지웠고, 그 덕인지는 몰라도 애들이랑 조금씩 친해져 가는 것 같다.
여기까지 설명한 뒤, 보충할 겸 반마법사 수첩을 꺼내 보였다.
“무면허로 한 일은 아닙니다. 자격증도 있어요.”
일을 벌였던 그때 하나가 내게 말했었다. 엄마는 이 마법을 축복이라 생각한다고. 그걸 내가 잠시만이라고는 해도 지워버렸으니 엄마 입장에서 충분히 탐탁잖아 할―
“과정은.”
“뿔을 손으로 살짝 쓰다듬었습니다. 그게 다예요.”
“다라고? 정녕?”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다. 대답하자,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는 내 손을 내려다본다. 꽤나 믿기 힘들어하는 눈치다.
한참을 내려다보다, 계산대 위의 수첩을 힐끗 곁눈질하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회사 앞에서 마주쳤을 때.”
“예. 그때.”
“그때를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나?”
“어…디까지인지를 물으시면, 대답드리기가 좀 모호―”
“거리에 행인이라고는 큰 봉투를 쥔 자네가 전부였고, 내 딸은 자네가 있던 보도 쪽에서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네. 환한 미소를 띤 채로 말이지. 이런 뜻으로 말한 게야.”
한 번 눈 마주쳤을 뿐인 일을 상세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큰 봉투를 쥐고 있던 것도 맞았고, 그 안에는 말하는 영물 포메라니안 한 마리 들어있었고.
그때 그 광경을 애 엄마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수상쩍게 보실 만하죠. 네.”
“그런 이유로 직원 둘을 시켜 알아봤다네. 저 수상한 인간 남성은 누구인가. 평범한 편의점 직원이란 건 그날 바로 알게 됐네만….”
겸직 반마법사인 것, 딸과 친한 사이란 걸 알게 된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라고. 허나 여기까지 알게 된 뒤에도 당분간은 지켜만 봤다는데, 바빠서였다.
“오랜만에 일정이 비었… 이건 지금 주제와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고.”
말을 끊고는 잠깐 뜸을 들이는 듯하다, 크게 상관있는 이야기를 해왔다.
“하나가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더군. 이찬 자네 말일세.”
“…그렇습니까.”
“전에 없이 말이야. 방금도 잠깐 볼일을 보고 오겠다 말했을 뿐인데….”
자택에서 나오기 직전, 하나가 후다닥 현관 앞까지 뛰어와서는 물었단다. 엄마야 멀리 가여?
오래는 안 걸린다는 말에 하나가 말하길, 혹시라도 날 보러 가는 거라면 해코지는 안 했으면 하고 간절히 부탁했다고. 여태껏 본 어른들 중 제일 착한 어른이다, 오늘도 같이 놀아주셨다, 엄청 즐거웠다….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딸 얼굴에 불을 내뿜는 짓을 할 수는 없잖나.”
“…저도.”
즐거웠다.
“응?”
“아닙니다.”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려다 삼켰다. 얼굴 보고 직접 말하는 게 더 호소력 있지. 그나저나, 볼일의 내용을 어떻게 알았는지가 의문이다.
마음이야 흰색이나 검은색으로 보였다 쳐도, 그게 전부 아닌가? ‘날 만나러 온다’라는 마음 색이 어떤 색이었길래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거지?
“그 애가 그렇게 부탁하는 것도 처음이고 말이지.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길래 그 애를 그렇게 따르도록―”
“헹.”
이건 내가 낸 소리 아니다. 그냥 친하게 지냈을 뿐이다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코웃음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출처는 점장이었다. 내려다보자, 얼굴을 찌푸린 채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볼멘소리로 대답해온다.
“코가 간지러워서.”
“휴지 드릴까요?”
“아냐. 이제 나아졌어.”
“…요지는.”
내가 딸을 해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는 얘기였다. 외에는 오늘 대화로 딸한테 나쁜 의도가 없다는 건 잘 알았다, 그냥 얼굴만 보러 왔을 뿐이다, 등등의 내용들.
“찾아온 보람이 있어….”
마지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폰을 꺼내 화면 구석을 들여다본다. 나도 반사적으로 POS기를 확인해 봤는데, 9시 58분이었다.
“…혹시 수표도 취급하나?”
“수표요. 예. 합니다.”
10만 원 수표까지는 취급한다. 대답하자, 문제없다는 듯 카운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편의점이 물건을 파는 곳이니 뭐라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보면서는 몸의 긴장이 쫙 풀렸고. 나는 니가 뭔데 니 딸을 데리고 노냐― 이러면서 브레스 한 발 맞고 대화 시작할 줄 알았다. 이 정도면 엄청 잘 풀린 편 아니야?
애 엄마도 걱정한 만큼 꽉 막힌 드래곤은 아닌 듯 보인다. 하나한테 애정이 크지 않은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신원까지 파악하려 들 정도면 오히려 애정이 과한 거라 해석하는 게 맞지 않나….
당해서 좋은지 아닌지는 별개로 치고. 나도 부모 동의 없이 놀아준 건 잘못 맞으니 쌤쌤 치련다. 생각하는 사이, 애 엄마가 장난감 진열대 앞에 서서는 내게 물었다.
“이건 장난감인가?”
손가락으로는 뽑기 장난감을 가리키고 있다. 세로로 20cm 정도 되는 사이즈에, 내부에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구슬을 애가 직접 채우는 구조다. 레버를 돌릴 때마다 구슬 한 개.
원하는 색 뽑고 좋아하라고 만들어진 장난감이다. 가격은 단돈 5천 원. 하나가 저걸 가지고 놀지 아닐진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다.
“그거 뽑기 장난감인데, 다른 애들 손님이 가끔 가지고 놀아도 되냐며―”
경청하는 듯싶다가, 툭 내뱉는 한마디.
“쓸모없군.”
“―예?”
“과자는 어디, 아.”
뒤이어 홱 몸을 돌려 과자 코너로 가서는 낱개 진열된 곡물 과자 한 움큼을 집어 가져온다. 하도 안 팔려 유통기한이 다 된 것들을 내가 치웠었고, 그 기억 덕에 가격도 외우고 있다.
개당 2천 원. 수표도 조회해보니 정상이다.
“16,000원…입니다.”
“즐거웠다네. 다음에 또 보세나, 이찬.”
바코드를 미처 찍기도 전에 과자를 다시 챙겨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리무진의 부드러운 엔진음이 울렸고, 떠났다.
하여 카운터에는 점장과 나, 검정색 명함. 그리고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짤랑거리는 걸 멈춘 정문벨을 바라보던 중, 옆에서 나지막이 점장이 말해왔다.
“저분이 찬이를 마음에 들어하나 부다.”
“마음에 들어한다고요? 저를?”
“내 생각은 그래. 거스름돈 안 가져가셨잖아.”
이걸 달리 해석하면 ‘자기 재산을 떼어 내게 주었다’라는 게 되는데, 드래곤들이 자기 재산에 대한 집착이 이 동네 어느 종족보다도 강하다고 한다. 살아온 기간이 오래됐을수록 특히.
비밀스러운 공간에 금은보화를 잔뜩 쌓아두는 드래곤, 이런 전승과 비슷한 맥락인가 보다. 말하기에 앞서, 당장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물었다.
“그건 둘째 치고, 지금 거기 뭐가 있어요?”
점장 손동작이 이상해서였다. 양손을 각각 머리 위, 배 아래로 뻗은 채 보이지 않는 밧줄 같은 걸 꽉 움켜쥔 모양새다. 내 질문에 질문으로 먼저 대답해오는 점장.
“찬이는 저 미리네라는 분 어떻게 생각해?”
“저는… 잠깐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점장님께서는요?”
“무례해. 이거 봐봐, 찬아. 집중해서.”
투명한 무언가를 빨래 짜듯 힘차게 꼬아서는 계산대 위에 툭 내려놓는다. 일단은 상사가 시키는 대로 눈에 집중해 봤, 아니 이건 또 뭐야?
“이 시꺼먼, 이거 사슬 아닙니까?”
“정확히는 사슬처럼 생긴 고대 마법이야. 아니면 고대 마법처럼 생긴 사슬일 수도 있구.”
그 두 개가 뭔 차이가 있는진 몰라도 아무튼 사슬은 맞는 것 같다. 형체 없이 일렁이는 고리 수십 개가 엮여 계산대 위, 나아가 한쪽 끝이 바닥까지 주륵 떨궈진 채다.
반대쪽 끝은 살아 움직이듯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고. 진동하던 사슬을 점장이 손바닥으로 찰싹 후려쳤는데, 이놈은 또 맞고 나니까 얌전해졌다.
“아무리 자신 있어도 그렇지, 남의 매장에서 이러고 가면 어떻게 해.”
“점장님. 이걸 어디 쓰는지는 둘째 치고, 이거 저분이 만들고 가신 거죠.”
재차 묻자, 이번엔 폰과 명함을 집어 드는 점장. 명함 앞면을 바라보며 꾹꾹 폰을 조작하고는 폰을 내게 들어 보인다. 업무 소개용 배너가 회전하고 있는 한 회사의 홈페이지였다.
“에인션트, 마법의 설계 및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에, 최근에는… 허어….”
“배너 옆으로 옮겨줄까?”
“아뇨. 지금 돌아갔습니다….”
자동으로 돌아간 배너가 대충 이렇게 적혀있다. 주력 개발 상품, 반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