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72)
이세계 편돌이-271화(272/331)
271. 소주를 안주 삼은 추억 한잔 (1)
* * *
인복이 있다는 얘길 듣거든 늘상 떠올렸던 반박이 하나 있다.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 아닌가? 인복이 있어서 사람을 잘 만나는 게 아니라, 결과를 해석해 보니 그런 것 같다는 거 아니야?
헌데 이런 경우를 하도 자주 겪다 보니, 이젠 진짜로 나한테 뭐가 있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놀러 간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코볼트가 지인이 찾는 귀인일 확률이 높진 않을 테니까.
“보스를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아니. 어쩌다?”
“우연히 만나 뵀습니다. 만나 뵀다는 것도 솔직히 과장이고, 몇 시간 저 안에서 볼일 보다가 우연히….”
“어떤 볼일 말씀이신지?”
딱지 칠 곳 찾아다니고 있었다. 만 29살 먹고 평일 대낮에 카드 슬래쉬를 했다는 게 부끄러워서라도 둘러대려 했는데, 내게 묻는 어르신 어조가 더없이 진지하다. 뭐라도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듯했다.
그래도 꿋꿋이 둘러댔다. 진짜로 사소한 볼일이었고, 그 볼일 때문에 학교 근처를 지나가다 늑대 경비원 한 분을 마주쳤었다. 흰털 늑대는 아니었지만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더라.
“허면… 어떤 종류의 위압감이었는지 여쭤봐도 될런지.”
“그건, 위압감에도 종류가 있어요? 어르신?”
“있다마다요.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하는 압박감,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오싹함 등. 물론 상대방의 의도나 상황, 심리적인 요인으로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합니다만….”
그분 경우에는 전자의 압박감을 지니셨다고. 근데, 3m 좀 안 되는 늑대가 눈 시뻘겋게 뜨고 노려보는 판에 옴짝달싹하면 그게 이상한 거 아냐?
내가 압박감 종류를 구별할 만큼의 복무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여 불확실한 것들이 아닌 딱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했다. 경비복에 훈장을 달고 계셨다.
“훈장을…?”
“예. 금색에 마법 지팡이가 새겨진 훈장이었고, 말투가 좀 무뚝뚝하셨고… 어르신?”
“…….”
훈장 얘기를 꺼내면 어르신께서 긍정하실 줄 알았는데, 보이신 반응이 오히려 그 반대다. 한쪽 귀를 접고는 깊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절모를 내려다보는 어르신.
“혹시 다른 분인가요?”
“아뇨. 직접 만나 뵈어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하신 뒤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몸을 돌리셨고, 바로 양복 옷깃 붙잡아 멈춰 세웠다. 이 부분은 나도 나대로 확신이 있다.
“저, 어르신. 지금 바로는 말고, 시간 먼저 정하고 가시죠.”
“시간… 아.”
“제가 그분 만나 뵌 게 정오였거든요. 낮 12시 낀 시간에는 근무하신다는 거니까, 방문하더라도 근무시간대 고려해서 방문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직원소개란에 직원별 근무시간이 적혀있던 건 아니지만, 사진이 세 장 올라가 있었다. 셋이서 3교대를 한다고 치고, 낮 12시를 낀 근무시간이면 추정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찾아가도 이때 찾아가는 게 맞다. 오늘이 주말이니만큼 아예 근무를 안 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그때 문제고, 괜히 안 해도 될 헛걸음을 할 필요는 없잖아.
“…사장님 말이 맞습니다.”
내 말에 뛰어나가려던 자세를 바로잡고는 대답하는 어르신. 들고 있던 모자를 다시 머리에 얹고는 내려앉은 어조로 작게 중얼거리신다.
“제가 약간 흥분했던 것 같군요.”
“그러실 만하죠. 반가운 분 만나 뵈러 가는 건데.”
슬슬 진정되신 것 같아 마저 말했다. 예상 시간이 오전 8시이긴 해도 8시에 딱 찾아가긴 또 애매하다. 인수인계 받느라 바쁠 거 아냐.
찰리 덕분에 시간을 많이 벌었으니, 원래 약속했던 대로 9시 즈음에 딱 찾아가자. 말하자, 손목시계로 슬쩍 시간을 확인하시고는 날 바라보셨다.
“3시간이 좀 안 되게 남았군요. 그동안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깐 눈이라도 붙여둬야죠. 밤에 또 출근해야 되는데.”
대답을 들으신 뒤엔 완전히 진정이 되셨는지,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을 붙들어 매서 미안하다며 내게 연신 사과를 해오시더라. 매뉴얼대로 대답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오전 9시에 정문 앞에서 봬요. 어르신.”
이렇게 대화를 마쳤고, 어르신께서 고맙다며 피로회복제 두 병을 선보수로 건네주시고는 나가셨다. 까딱이는 정문을 가만 바라보던 도중, 유리가 등 뒤에서 소감을 말해왔다.
“신사다우신 것도 같고, 혈기왕성하신 것도 같고.”
“뭐가. 어르신?”
“네. 방금 뛰어나가려고 하실 때요. 몸에서 마력이 확.”
느껴지는 게 있었는지 양손을 밖으로 펼쳐가며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체질 써서 잡았으니 망정이지, 유리가 잡았으면 어르신께 그대로 끌려 나갔겠구만….
“뭐 하시는 분일지 궁금하네요.”
“저분 대리기사셔.”
“기사요?”
“어. 대리기사. 나 들어가서 잠깐 눈 붙일 거니까, 너도 이거 하나 먹어라.”
두 병 사 주신 것도 이러라고 사 주신 거겠지. 뚜껑 직접 따서 한 병을 건네줬고, 두어 모금 홀짝이는 걸 확인하고 나도 뚜껑을 땄다.
손가락 끝으로 뚜껑 꼬다리를 만지작거리던 도중, 뜬금없이 묻고 싶은 게 하나 생겼다. 곧바로 물어봤다.
“유리야. 지금 하는 일은 잘될 거 같냐? 아는 사람이 뭐래?”
“안 물어봐서 모르겠네요.”
“아. 그러냐.”
“그래도 그건 있어요, 오빠.”
“뭐가 있는데.”
묻자, 말없이 내 손에 대고 손가락을 까딱이기만 한다. 병뚜껑을 달라는 의미 같아 건네줬고, 받아들면서는 무덤덤하게 한마디.
“잘되든 잘 안되든 너무 우울해하진 말라는 거.”
그건 또 뭔 뜻이냐. 물어보려다 관뒀다. 안 물어봐서 모르겠다 했으니 그냥 위로로 한 말이겠지….
* * *
집에 돌아가서 8시 반까지 자다 일어났고, 털뭉치는 아직까지도 코빼기조차 안 보였다. 이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집에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다. 배고프거든 알아서 먹고 가겠지― 라는 생각으로 사료 배급기에 꾸준히 사료를 채워 왔는데, 양이 줄어 있더라. 물통의 물도 마찬가지고.
베란다 창틀에는 못 보던 스크래치 자국도 남아 있는 게, 뭘 하는 건진 몰라도 밖에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염동력도 쓸 줄 아는 놈이니 어디서 해코지를 당하지야 않겠다마는….
최소한 리본이라도 한번 비춰 줬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찝찝한 기분으로 배급기의 사료와 물을 채운 뒤 적당히 씻고, 정문 앞에 도착했을 즈음이 8시 55분.
어르신께서 먼저 와 계셨었다. 미리 매장을 들르신 건지 봉투째 손에 들고 계신 데에 더해, 아예 도로변을 등진 채 학원지구 정문 안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신다.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나신 것 같다. 가까이 가기 전까지도 모를 정도로 말야.
“어르신. 저 왔습니다.”
“…아, 오셨습니까. 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잘 잤죠. 그런데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예요?”
방금 꺼냈을 봉투에 이슬이 안 맺혀 있는 게 역으로 의아해서 여쭤봤다. 내 물음에 너스레를 떨며 대답해오는 어르신.
“얼마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1시간 정도?”
“어… 허어.”
“그 전까지는 꽃밭에 물도 주고, 손녀가 틀어놓았던 선풍기도 끄고, 반려한테 잠깐 외출을 다녀오겠다며 인사도 건네고….”
충실하게 아침을 마무리 짓고 오셨단다. 말하는 내용이며 들뜬 어조며 기분이 잔뜩 들떠 있으신 게 빤히 보인다. 말을 마친 뒤엔 곧바로 앞장서려다, 멈칫하고는 내게 물으셨다.
“헌데 사장님, 식사는 하셨는지요?”
“이따가 11시 즈음 먹으려고요. 새벽에 도시락 먹은 게 소화가 덜 돼서.”
“그렇다면… 찌개류는 어떻습니까. 자주 가는 단골집이 한 곳 있습니다.”
“어우, 사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길 잘 아니까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어르신.”
이번에 가는 게 두 번째이긴 하지만, 난 한번 다녀간 길은 안 까먹는다. 가는 데에 걸린 시간이 20분에 갈림길에서 꺾었던 게 세 번.
기억하는 대로 쭉 걸었다. 구석구석에 카드팩 비닐이 널브러진 보도도 지나고, 한창 철거에 열중인 카드 게임 대회장도 지나고. 이틀 전에 비해 생긴 게 많이 달라지긴 했다.
길 걷는 행인들도 마찬가지다. 이틀 전에만 해도 카드 게임에 누구보다도 진심인 사람들만 득시글거렸는데, 지금은 온 사방에 오손도손한 가족들 뿐이다.
― 콰아아아―
“아빠! 풍선 화력이 너무 약해!”
“그러네. 가서 풍선 몇 개 더 사올까?”
“응! 20개!”
애들이 괴랄한 걸 가지고 놀긴 했지만 말이다. 해발 5m 높이에서 불을 뿜어대는 쌍두용 풍선이 왜 어린이 공원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걸 만든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날씨가 무척 후덥지근하군요. 괜찮으십니까? 사장님?”
“어, 네. 어제보다는 그래도 시원해서….”
말없이 쭉 걷기만 한 게 적적했는지 어르신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나야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라 괜찮은데, 어르신께서는 오전에 입었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오셨다.
그럼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계신다. 이대로 날씨 얘기만 쭉 해도 금방 도착하겠지만, 이것보단 더 나은 대화 주제가 있다. 되는대로 물었다.
“날씨 좋은 것 같네요. 그런데 어르신, 저 궁금한 것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부대원분들에 대한 거요. 지금 찾아뵙는 분이, 그… 어떤 분이신가요?”
어르신께서는 이분을 보스, 라고 부르셨다. 직함이 부대장일 것 같은데, 이것 말고는 그 늑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단 말이다. 머리는 절대로 못 쓰다듬겠다는 것 정도?
혹시라도 신선한 고기를 좋아하는 늑대일 수도 있잖은가. 하필이면 내가 담배를 끊은 지 꽤 지난 참이라 몸이 신선해졌단 말이지. 내 질문에 반색하셔서는 열띠게 말을 늘어놓는 어르신.
“제게는 좋은 분이셨습니다. 부대원분들 모두가 젊었던 만큼, 대장님께서도 과격한 면을 보이기는 하셨습니다만….”
3m가 조금 안 되는 거구로 무리 없이 장비 손질을 해낼 만큼 손재주도 좋았고, 업무 수행 능력도 탁월하신 분이었다고. 그 부대에 복무할 때만 해도 작전 한 번마다 훈장을 받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하셨단다.
“그래도 결코 선을 넘은 적은 없으셨었습니다. 당시 시기를 생각해보면, 다른 부대의 대장분들보다는 훨씬… 이성적이셨죠.”
성격에 대해 들으려고 여쭤본 거였는데,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불안만 더 커지는 것 같다. 선을 넘는 행동에 대한 예시를 들어달라 하는 게 맞냐, 안 하는 게 맞냐?
고민하다, 생각이 헛도는 것 같아 이것도 관뒀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물지는 않겠지.
외에도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던 내용들이 ‘나는 대련에서 그분을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러고도 그분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더라.’ 등등….
이 주제가 나올 즈음부터 목적지가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을 맞아 굳게 닫힌 대문에 한적한 운동장, 50m가 남았음을 알리는 안내판.
당연히 2층 건물 높이의 검은털 늑대도 보였다. 경비복 복장에, 체구에 전혀 안 맞는 이쑤시개 같은 대빗으로 느릿느릿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제가 뵀다던 분이 저분인데요. 어르신.”
“…….”
“저분이 맞나요?”
여기에 대답하는 대신 손에 든 봉투를 내게 건네셨다. 받아 들자,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끌어안으신 뒤 뚜벅뚜벅 늑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보스.”
잠시 후엔 목소리 높여 늑대를 부르는 어르신. 부름을 들었는지 나뭇잎을 쓸어내리던 앞발을 멈추고는, 몸을 반만 돌려 어르신 쪽을 지그시 바라본다.
이렇게 수 초 뒤.
“…고기.”
“보스?”
“아니, 어르신! 저분이 지금 저희보고 고기라고 하신 거 아니에요?!”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냐, 미처 물을 새도 없었다.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늑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쓰고 있던 빗자루가 채 쓰러지기도 전에 어르신의 앞에 나타나서는, 빗자루가 쓰러짐과 동시에 주먹만 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이게 얼마 만의 고기인지 모르겠군.”
직후, 앞발 풀스윙으로 어르신의 옆구리를 후려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