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73)
이세계 편돌이-272화(273/331)
272. 소주를 안주 삼은 추억 한잔 (2)
* * *
순간 일이 잘못돼도 아주 단단히 잘못된 줄 알았다. 소리가 무슨, 아니. 사람 몸을 후려치는데 왜 중장비로 건물 부수는 소리가 나냐?
이뿐만이 아니었다. 늑대와 어르신이 맞부딪친 자리 주변으로 흙먼지가 훅 일어나질 않나, 잠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푸드득 날아오르질 않나. 이걸 멀리서 들었거든 폭탄이라도 터진 줄 알았을 거다.
정작 당사자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야.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나서야 다시 어르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원래 서 계셨던 자리에서 딱 한 발자국가량을 옆으로 밀려난 채였다.
한쪽 손은 머리 위로 떠올랐던 중절모를, 다른 손은 늑대가 후려친 앞발을 각각 받치고 계신다. 이 상태로 수 초가량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다, 늑대가 입꼬리를 올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질긴 거 하나는 여전하군.”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보스.”
어르신께서도 마찬가지로 웃고 계신 걸 보니,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 부대분들 특유의 문화 같은 거였나보다. 평범하게 말로 하면 될 걸 왜 이렇게 전투적으로 인사를 하는 건데….
서로 한마디씩을 나누고는 동시에 자세를 푸셨고,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몸의 긴장이 풀렸다. 날카롭게 세웠던 발톱을 거둔 늑대가 어르신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묻는다.
“말투는 많이 연해졌지만 말이야. 그간 어떻게 지냈나.”
“평화로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로는 여러 일을 했었고, 최근에는 대리운전을 시작해서―”
“대리운전?”
“예. 글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일자리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지 뭡니까.”
들뜬 어조로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말을 늘어놓는 어르신, 그걸 굽은 허리로 묵묵히 듣는 늑대. 난 수십 년 만의 재회인 만큼 훨씬 감성적인 광경이 펼쳐질 줄로만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결혼? 네놈이?”
“예. 저도 가끔은 제가 손녀까지 보았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손녀 녀석이 글쎄, 웃을 때마다 덧니가 보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한 번은 가족 얘기도 하고.
“보스께서도 여러 일을 하셨던 겁니까?”
“했고, 대리운전은 못 해 봤다. 내 몸에 맞는 택시를 가진 회사가 있어야지.”
“하하하! 하긴, 군용 차량도 늘 엎드린 채로 탑승하셨었으니까요!”
한 번은 까불던 어르신께서 허리를 한 대 더 얻어맞기도 하고.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군요, 보스.”
“흘렀지.”
한 번은 서로 지나간 세월에 푸념도 해보고….
“다시 뵐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마지막에는 고개를 떨군 어르신의 등을 늑대가 툭툭 두드려주고. 둘의 회포는 이렇게 나지막하고, 또 조용히 풀렸다. 나도 나이가 들어 옛 지인들을 다시 만나거든, 똑같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등을 두드리던 앞발을 멈추고는 어르신에게 묻는 늑대.
“여긴 어떻게 찾아왔나.”
“자력은 아닙니다. 저기 저 이찬이라는 청년과, 찰리라는 이름의 치와와 코볼트가―”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만. 늑대 물음에 어르신께서 모자를 쥔 손으로 날 가리키셨고, 늑대와 한 번 더 눈을 마주치게 됐다.
곧바로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날 내려다보는데, 전에도 느낀 거지만 눈이 무섭긴 더럽게 무섭다. 입을 한 번 다시는 것조차 입술이 메말라서인 건지, 내 육질이 기준치를 통과해서인 건지 분간이 되질 않으니….
“전에 봤던 인간 고기 놈이군.”
말을 이렇게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구분을 하냐고.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진 않아서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 저 기억하고 계세요?”
“팔에 장난감을 차고 다녔었으니까. 그 꼴이 꽤나 우스꽝스러웠지….”
이건 의외라면 의외다. 장난감을 찬 건 나밖에 없었다 쳐도, 등에 브로마이드를 덕지덕지 달고 다니던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놈들도 허다한 판에 굳이 인간 편돌이인 나를?
생각하고 있자니, 힐끔 고개를 들어 내 등 뒤를 바라보는 늑대. 따라서 돌아보자 아까 지나왔던 공원에서 보였던 사람들이 멀리서 이쪽을 기웃대는 게 보였다.
방금 났던 소음 때문인가 보다. 뒤이어 코를 두어 번 킁킁대고는, 어르신을 향해 목소리 높여 읊조린다.
“덥다. 들어가자.”
말한 후엔 먼저 경비실로 허리 숙여 들어가 버렸고, 따라가기에 앞서 먼저 어르신께서 내 쪽으로 다가오셨다. 내가 먼저 말씀드렸다.
“소주 제가 들고 들어갈게요. 이러려고 온 건데.”
“아, 예. 서 계시게 만들어 송구하군요, 사장님. 오랜만에 만나 봬서 그런지 주체가….”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런데 저, 어르신.”
나란히 경비실로 걸어가면서는 궁금한 걸 한 가지 물어봤다. 저 늑대가 어르신이고 나고 왜 죄다 고기라고 부르는 거냐. 단백질 부족도 아니고 뭐야?
정말로 단백질 부족이셔서 그렇다 하시거든 냉큼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어르신께서 무척 말을 아끼셨다.
“보스께서 부대원분들을 부를 때의 입버릇입니다. 전쟁 때는, 그러니까… 음….”
“네. 전쟁 때는요?”
“…함께 가리라 생각했던 전우들이, 순식간에 다른 무언가로 변해버리고는 했었으니까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잠깐 고민해봤고, 이해한 뒤엔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전쟁터에서 전우가 변한다면 두 가지밖에 없잖은가. 전역, 혹은 사망.
사망해서 고기가 된, 아니면 곧 고기가 될 사람들을 부르느라 입버릇도 저렇게 굳어졌단 거다. 전쟁이 다 끝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저러는 건지….
* * *
어르신 뒤를 따라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고, 바로 튕겨져 나왔다. 내부가 사람 셋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온통 박스와 캐비넷으로 가득했고, 더해서 담금주.
담금주는 내가 잘못 본 건 줄 알았는데, 고개만 안으로 들이밀어 확인해보니 진짜로 담금주였다. 누르스름한 액체가 가득 담긴 투명 통 내부에 정체 모를 이파리가 잔뜩 침전되어 있고, 통 표면에는 날짜를 적어놓은 라벨이 붙어 있다.
한약 냄새는 안 나고 있으니 술이 맞을 텐데, 경비실에 이렇게 술을 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그사이에 앞발질 두어 번으로 박스를 모조리 치운 늑대가 의자 하나를 슥 끌어 어르신 앞에 놓고는 말했다.
“앉아라.”
“예, 보스.”
“너는 박스 하나 아무거나 잡아서 앉고. 안 무너져.”
아니, 늑대 어르신. 손님 대우가 너무 박하신 거 아니에요? 박스에 앉으라니?
라고 말을 꺼냈다간 그 즉시 사경을 헤매게 될 게 분명했다. 조신히 박스 중앙에 걸터앉아 문을 닫자, 벽 구석의 에어컨이 삑 소리를 내며 찬 바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봐라, 울프. 이 인간 고기 놈이랑, 다른 누구?”
“찰리라는 이름의 치와와 청년이 도와줬습니다. 노트북을 엄청 잘 다루는 청년인데….”
“노트북?”
“예. 노트북을 잠깐 만지고는, 보스께서 있을 만한 곳을 전부 찾아내서 제게 주더군요. 그 덕에 찾아뵐 수 있었….”
“그거 말고. 노트북이 뭐지?”
이건 또 뭔 소리야. 어르신께서도 마찬가지로 움찔하셨으나 이것도 잠깐, 언제 당황했냐는 듯 자연스럽게 설명을 풀어 놓으셨다. 컴퓨터를 소형화시킨 게 노트북이고, 모니터랑 본체가 같이 붙어있는 식이다―
까지를 설명하던 찰나, 늑대가 코웃음을 치고는 대꾸하더란다.
“난 이런 것에 의지하지 않아. 어떻게 끄는지도 모르고.”
“그…럼, CCTV를 아예 안 보신다는 얘기세요? 경비 일 하실 때?”
그게 가능한가 싶어서 물어봤다. 이 질문에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하길, 굳이 이런 화면으로 감시하지 않아도 냄새로 어지간한 교내 침입자는 다 미연에 처리할 수 있다나, 뭐라나.
“아. 냄새요.”
“마력마다 풍기는 특유의 향취가 있으니까. 네놈도 마찬가지고. 고기 놈 너 말이야.”
“저한테서도요?”
그런 거면 내 몸에서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게 정상일 텐데 말야. 의아해서 재차 물었더니, 이번엔 역으로 본인이 의아하다는 듯 날 앞발 발톱으로 가리키며 말해온다.
“네놈은 희한하게도 아무 냄새가 나질 않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건… 어제 빨래할 때 섬유유연제를 덜 넣긴 했는데요.”
“알면서 말 돌리지 마라, 고기 놈. 몸에 마력이 없는 거냐?”
아까는 장난감이니 뭐니 얘기하더니만, 그게 아니라 내 몸에서 마력 냄새가 안 났던 걸로 날 기억한 모양이다. 그때 감기에 걸려서 그랬던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잠깐 떠오르긴 했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보단, 적당한 거리를 던져주는 게 좋은 상황 같다. 뒷주머니에서 자격증 수첩을 꺼내 보이자, 미심쩍어하면서도 나름대로 수긍하는 늑대.
“꽤 쓸만한 재주군. 정말로 숨기는 거라면 말이야.”
“그런 말 자주 듣긴 합니다.”
“자만하지 마라. 그러라고 물어본 게 아니니까. 넌 이제 돌아가라.”
“예? 돌아가다뇨?”
“난 마법으로 이 고기 놈을 해칠 생각이 없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거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 싶어 어르신을 곁눈질했는데, 어르신께서도 마찬가지로 날 바라보고 계셨다.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우리끼리 눈만 껌벅이고 있자, 이번엔 자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우릴 바라보며 묻는다.
“그 목적이 아니라면, 네놈은 여기 왜 따라온 거냐? 반마법사?”
“저요. 저는 반마법사라서 따라온 게 아니고요. 저… 그게….”
“제가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스. 홀로 찾아뵙는 것이 두려워서…라는 이유에서였지요.”
혼자 가기 부끄러워서 사람을 부르신 거다. 이게 내가 꺼내기는 실례될 이야기라 말을 아꼈는데, 어르신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여기에 곧장 되묻는 늑대.
“뭘 두려워한 거지.”
“제가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적의 피를 뽑아내고 시체 더미 위를 걷는 경험들 모두를 그때는, 대의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에둘러 말하고는 마저 말을 이으셨다. 이 때문에라도 서로 만났을 때 서로를 똑같이 악몽이라 느낄 거라 생각했다. 그걸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찾아뵐 생각을 못 했었다.
헌데 이 이찬이란 청년이 그러더라.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찾아뵌 것이다.
“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가능하다면 술을 한잔 대접하고 싶어 찾아왔던 것입니다, 보스. 또, 다른 분들이 어찌 지내시는지에 대해서도….”
“아예 아무 소식도 못 들은 채로 지내 온 거냐?”
“소식을 말입니까?”
“그래. 너 말고 다른 고기 녀석들. 상하거나 썩지는 않았다. 단지… 말로는 힘들겠군.”
도중에 벌떡 몸을 일으켜 캐비넷 위의 담금주 통을 집는 늑대. 다시 앉아서는 손톱 끝으로 뚜껑을 따서는 술의 냄새를 한번 맡은 뒤, 어르신 쪽으로 통을 까딱이며 묻는다.
“잔은 가지고 왔나? 울프?”
“…예.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꺼내라. 내가 먼저 들겠다.”
술을 권하는 것 치고는 대화 내용이 이상하게 들렸다. 술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근데 그건 그렇다 치고, 경비실에서 근무 중에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되는 거야?
“뭘 빤히 쳐다보고만 있나, 고기 놈.”
“아뇨. 지금 근무복 입고 계시니까….”
“너도 한 잔 들어라. 비싼 술이니까 흘리지 말고.”
밤에 카운터 봐야 되는데 술은 뭔 놈의 술이야. 마음 같아선 사양하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차마 거절을 못 하겠다.
빈 컵을 들어 내밀자 늑대가 술을 쪼르르 따라줬는데, 세상에 냄새가 무슨….
“어우, 냄새가. 이거 뭘로 담근 술입니까?”
“뭘로 담갔는지가 중요한 술이 아니야. 뭘 담그는지가 중요하지.”
듣고 나서는 내가 냄새만 맡고 벌써 취해버린 줄 알았다. 한창 말을 이해해 보려고 머릴 굴렸는데, 늑대가 자기 잔을 찰랑이고는 곧바로 해답을 말해줬다.
“기억을 담가 빚는 술이다. 기억 한 줌에 소주잔 한 잔 비율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