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74)
이세계 편돌이-273화(274/331)
273. 소주를 안주 삼은 추억 한잔 (3)
* * *
기억을 담가 술을 빚는다. 들은 직후엔 뭔 소린가 싶어 늑대 얼굴만 멀거니 바라봤다. 이러는 내가 우스웠는지 피식 웃고는, 그르렁거리며 묻는 늑대.
“이런 종류의 술을 마셔본 적이 없나 보군. 그렇지?”
“예. 술은 맥주나 소주 말고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말 그대로의 뜻이다. 기억을 담고, 들이키면 끝이야.”
그 말 그대로가 이해가 안 돼서 이러고 있는 건데 말이다. 술을 MP3 레코더나 일기장을 숙성시켜서 만든 것도 아닐 테고, 머릿속에 있는 걸 어떻게 끄집어내서 담는다는 거야?
“간단한 원리입니다, 이찬 청년. 처음 술을 따르는 자가 공유하고 싶은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린 뒤, 그 잔을 나누면 그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식이죠.”
마찬가지로 웃고 계시던 어르신께서 설명해 주셨고, 이제야 좀 이해가 됐다. 물리적인 수단이 아니라 블루투스로 기억을 술잔에 담는다는 얘기였구만.
효과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여전히 짐작이 안 됐지만 말야. 술에 대고 킁킁대는 사이 늑대와 어르신께서 들고 있던 잔을 들었고, 나도 얼른 술잔을 들었다.
마셔보면 알겠지. 잔 밑부분에 술잔을 부딪친 뒤, 2개월 만의 술을 들이켰다. 식도가 부지깽이로 지진 듯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다. 어우….
“…화약 향이 나는군요. 보스.”
“익숙한 향이지.”
두 분은 아무렇지 않아 하시는 반면, 나는 한 잔 들이켠 것만으로 세상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유리창 밖 하늘도 점점 노을이 지고 있는 게 술을 괜히 마신 것 같은―
아니다. 노을뿐만이 아니었다. 바깥 풍경이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전쟁터가 됐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전차의 기동음으로 바뀌었다. 전차 외에도, 깃발, 군복을 입은 채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병사들 등등. 병사들 중에는 목발을 짚은 이도, 팔에 붕대를 감은 이도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멀쩡하게 서 있는 한 무리가 있다. 한가운데에 선 채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고, 한 명은 3m가 넘어 보이는 체구를 빳빳이 세운 흰색 털의 늑대였다.
“어떤 게 보이시는지요, 이찬 청년.”
“흰색 털… 늑대 한 분이 보이는데요. 이거 혹시….”
“나다. 옛날에는 허리가 멀쩡했었으니까.”
생각한 게 맞았다. 지금 경비실 창밖에 과거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저 흰색 털 늑대는 색이 바래기 전의 늑대일 테고, 그럼 저 은색 귀에 어깨에 군복을 걸친 남자는 분명….
[ 다른 데로 가게 됐다는 게 뭔 소리야! 보스! ]“어?”
[ 윗대가리 새끼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름도 못 댈 새끼들 지키라고 오만 개같은 곳에 다 던져놓고는 보답이 겨우 이거라고? 대장은 시골로 날리고, 우린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거? ]은색 귀에 군복을 걸친 남자가 내뱉고 있는 말들이다. 연신 말을 쏟아내면서도 불만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몇 번이고 바라보는데, 우릴 보고 하는 말은 아닌 듯 보였다.
저 순간에 지휘부 건물이 이쪽에 있었다거나, 혹은 상관이 서 있었다거나 그런 거겠지. 근데 저 사람이 진짜 어르신이 맞나…?
“넌 매번 씹어먹고 싶은 말들만 골라서 했었지. 울프.”
“…저 때는 죄송했습니다. 보스.”
늑대 말에 중절모를 머리에 꾹 눌러쓰시는 어르신. 저 남자가 옛날의 어르신이 맞는 것 같다. 수염도 중절모도 없고, 눈빛도 눈 마주치는 걸로 사람 하나를 골로 보내겠다 싶을 만큼 매섭긴 했지만….
[ 상부 명령이다. 토 달지 마라. ] [ 집어치워, 보스. 부대 박살 났으니까 이제 내 상사도 아니잖아. 당장 찾아가서 지팡이를 배에 박아버리든, 우리 앞에 무릎을 꿇리든― ] [ 명령이라고 말했다. 토. 달지. 마라. ]늑대가 읊조리는 말에 분하다는 듯 바닥을 발로 걷어차는 젊은 어르신. 그러고는 다시금 이쪽을 바라보는데,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주륵 떨어지고 있었다.
[ 빌어먹을. 그 고생을 같이 했는데, 이렇게…. ]내게 늘 그러시듯, 저 때도 정이 많은 건 여전하셨나 보다. 입술을 꽉 깨문 젊은 어르신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부대원들을 둘러보며 말을 마저 늘어놓는 흰털 늑대.
[ 그간 즐거웠다, 고기 놈들아. 네놈들이 사고 치고 돌아올 때마다 늘 속이 터지긴 했지만…. ] [ ……. ] [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었어. 그러니, 너희도 이 몇 년을 좋은 기억으로 안고 계속해서 살아가라. 상사로서의 마지막 명령이다. ]이 말에 부대원들 반응이 제각각이더라. 어르신과 늑대 외의 부대원들이 각각 고블린, 드워프,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뱀파이어.
고블린은 시큰둥하다는 듯 코를 긁적이고, 드워프는 무덤덤하게 젊은 어르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연신 콧김을 내뿜어대는 게 말만 안 할 뿐이지 어르신만큼 감정이 차오른 것 같고….
[ 부대 해체 시한은 언제입니까? ] [ 금일 오전 0시 0분. ] [ 그럼 명령이니, 따라야겠군요. ]뱀파이어는 사무적으로 늑대에게 묻고는 자세를 잡아 경례한다. 이 움직임에 고블린, 드워프, 미노타우로스도 따라서 손을 머리로 가져갔고, 어르신이 마지막이셨다.
[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보스. ] [ …그래. ]이 경례를 늑대도 똑같이 받아 자세를 잡는 게 보였고, 직후에 창밖에 가득했던 부대 분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병사들, 전차, 하늘 가득했던 노을까지 전부 다.
이윽고 다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르신이나 늑대 둘 다 창밖만 바라볼 뿐 말이 없길래, 적막을 깰 겸 적당한 걸 여쭤봤다.
“실례지만, 저 때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사장님과 비슷했었습니다. 저는 훨씬 더 철이 없는 편이었지만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이건 내가 봐도 철이 없으셨던 게 맞다. 부대 상사 앞에서 저럴 수 있다니, 나 이등병 시절에는 저러는 건 꿈도 못 꿨는데 말이지….
“헌데, 저 기억은 어째서 술에 담그신 겁니까. 보스.”
“예고편이다. 부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된 건 저 때지만, 내 부대 대장으로서의 업무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신―”
“너희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매달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나 스스로의 행적도 마찬가지였고.”
아는 게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밀부대의 일원으로서 요원을 호위하며 하달받은 명령들, 혹은 정보를 목적으로 요원을 호위하며 얻게 된 전략적 정보, 뭐 그런 것들.
그중 일부만을 꺼내는 것으로도 그 당시 복무 중이던 상부 인원들 절반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단숨에 결론으로 나아가는 늑대.
“그만하겠다고 했었다. 거래를 했어.”
“거래를… 감시를, 그만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는. 울프 너는 그나마 잘 지냈었지. 하지만 다른 녀석들은 아니었어. 겔록, 그 코 큰 고깃덩어리 놈이 서서히 변해가는 걸 난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감시와 개입은 다른 거니까.”
이 물음에 어르신 얼굴이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다, 서서히 착잡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늑대는 더 말을 잇는 대신 술을 다시 따르는 것을 택했다.
어르신이 먼저 받았다. 그다음이 나. 이걸로 두 잔째다. 늑대가 잔을 드는 걸 확인한 뒤 어르신과 동시에 술을 들이켰고, 경비실 유리창 밖 풍경이 한 번 더 변화했다.
병원이었다. 병원이었고, 새하얀 침대 위에 곰팡이가 얼굴 가득 낀 고블린 한 명이 누워있었다. 겔록이란 이름이 왠지 고블린스럽다 했었다.
외에는 병실 침대 옆에 의사와 간호사가 한 명씩. 고블린이 병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데, 말하는 내용이 썩 좋지는 않았다.
[ 다 도망쳐!! 전쟁이야, 곧 폭탄이 정수리 위로 떨어질 거라고. 내가 계산했으니까!! ]듣자마자 알았다. 이 병원 정신병원이구나.
[ 오늘 치 진정제는 다 투여한 건가? ] [ 네. 추가분을 가져올까요? ] [ 가져오고, 마력 억제제도 같이. ]짧은 대화 이후엔 간호사가 팔에 끼고 있던 차트가 클로즈업됐는데, 발음하는 것조차 모를 온갖 약물명들이 가득하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었던 게 맨 밑의 딱 한 줄. ‘예의주시할 것. 특히….’
특히 뭘 어쩌라는 건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또다시 창밖 풍경이 바뀌어버렸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폐건물의 내부였고, 흰털 늑대가 기둥 뒤에 모습을 감춘 채 한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병원으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흰털 늑대가 폐건물에 모습을 숨긴 채, 병원 안의 고블린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기둥을 앞발로 짚고 있던 늑대가 잠시 후, 수첩 하나를 펼쳐 뭔가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전 호위기사단 소속, 마법기계 전문 부사관. 중사 겔록. 정보 유출의 염려 없음.’
내용을 적은 종이를 뜯어 폐건물 밖으로 날려 보내자, 두둥실 떠오른 종이가 순식간에 어딘가를 향해 맹렬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매개로 한 전서구인 듯하다.
종이가 날아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이며 딱 한 글자를 읊조린다.
[ 후…. ]짚고 있던 기둥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걸 끝으로, 창밖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번에 먼저 말을 꺼낸 건 어르신이셨다.
“겔록 중사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겁니까?”
“그래.”
“…어째서입니까?”
“마력이 고농축된 기계를 다루며 신경계에 이상이 왔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긴박한 상황이 잦았었고, 방호복 없이도 늘 기계를 다뤘었으니까―”
“그걸 여쭤본 게 아닙니다, 어째서 보고만 계셨는지를 묻는 겁니다.”
말씀하시는 목소리도, 다리도 떨리고 있다. 무척 충격을 먹은 얼굴이셨다. 떨리던 다리를 손으로 억누르고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잇는 어르신.
“겔록 중사가 저런 대우를 받을 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보스.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단, 찾아가서 뭐라도―”
“내가 그 임무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임무는…!”
벌떡 일어나려던 어르신 옷깃을 얼른 손으로 붙잡았다. 아직 이야기를 덜 들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자세로 몸을 멈춘 어르신을 바라보며, 늑대가 가라앉은 어조로 대답했다.
“상부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었다. 정보 유출의 방지.”
“그 모두가 알기도, 입에 담기도 싫은 것들뿐입니다. 그런 걸 구태여 저희가 왜 말을 한단 말입니까?”
“글쎄. 인간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뜸 대상을 바꿔 내게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을 해, 어르신께서 상부 나부랭이들를 이해 못 하듯 상부도 호위부대원들을 똑같이 이해 못 하는 거지….
제3자 입장에서야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나야 그 정보들이 얼마나 기밀인지를 전혀 모르니까. 하지만 늑대가 굳이 대상을 나로 바꾼 이유는 잘 알겠다. 어르신 진정 좀 시켜보라는 거다.
“…그건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아까 거래 얘기를 하셨었잖습니까.”
“그래. 했지.”
“그게 어떤 거래예요? 이것도 기밀인 거면 굳이 말씀 안 하셔도―”
“머리에 침을 박았다.”
이 한마디로 어르신 얼굴이 아예 사색이 되어버리셨다. 어르신께서 주춤했던 자세 그대로 의자에 털썩 앉는 사이, 손톱 끝으로 집은 잔을 까딱이며 답을 마쳤다.
“기억을 서서히 지우는 침이지.”
“…기억을 정확히 어떤 걸, 얼마나 지우는 겁니까.”
“전부 다. 정보, 추억, 악몽, 이름, 내 나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