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75)
이세계 편돌이-274화(275/331)
274. 소주를 안주 삼은 추억 한잔 (4)
* * *
한 부대의 구성원 중 제일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부대장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래도 그 덕분에 성립된 거라고 한다. 억지를 부린다면 못 부릴 것도 없었겠지만, 3m의 체구로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자를 억누른다는 게 상부 입장에서도 결코 반길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상부를 늑대가 먼저 찾아가 ‘누설될 만한 모든 정보를 십수 년에 걸쳐 지우는 마법’을 스스로에게 건다는 거래를 제안했고, 덥석 물었다.
문제는, 기억이라는 게 한 부분을 콕 찝어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전달받은 모든 명령서에 서명했었다. 지금은 내 서명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
“서명… 말고, 다른 건 어떻습니까?”
“요인을 호위하는 과정에서 만난 다른 정보원들이 있었다. 그자들과 때로는 기밀을, 때로는 시답잖은 주제를 주고받으며 술을 기울이곤 했었…겠지.”
“확신이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추측이니까. 옛날에 난 기밀부대에서 근무했었고, 그러니 정보원을 만났을 거고, 내가 먼저 술을 권했겠지. 난 아직도 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간.”
안쓰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늑대는 잊어야 할 기억에 더해, 잊지 말아야 할 기억들마저 점차 잊어가고 있다. 기억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매장에 출근한다고 치자. 저녁 9시 반에 깨어 집을 나설 테고, 출근길을 걸어 매장에 도착해 점장을 만나겠지. 이 중, 9시 반에 잠에서 깼다는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출근했다는 기억 자체가 없던 게 되어버리는 거다. 일어나질 못했는데 출근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추측은 가능하다. 난 매장 정직원이고, 점장은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매장의 정직원이라는 기억마저 사라진다면. 그땐….
“대답을 하질 않는군. 머릿속이 복잡해졌나?”
“…그런 건 아니고요. 합리적인 추측이라고는 생각했는데, 말씀드릴 말을 고르느라.”
“가감 없이 말해라. 이것도 조만간 잊어버릴 기억이니까. 그래서, 합리적인 추측이라는 게 네 생각이다?”
“…예.”
“그래. 지금 내 기억의 대부분은 추측으로 만들어낸 것들이다. 방금 것들은 워낙 뇌리에 깊이 남아서인지, 아직 잊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심란한가? 울프?”
도중에 말을 끊고 어르신을 바라보는 늑대. 나는 안 봤다.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꽉 움켜쥐는 소리, 그리고.
“…그래도. 말이라도.”
목이 멘 목소리. 굳이 눈으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말이라.”
“그렇습니다. 말이라도. 거래를 하셨다면, 그 뒤로는 저희를 찾아 말씀하셔도 됐던 거잖습니까. 보스가 저희 자유를 대가로 추억을 잃는 것, 그런 걸 저희가 진정 바랄 거라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난 보스가 아니고, 너도 이젠 내 휘하 부대원이 아니야. 너희는 내게 있어 그저 감시대상일 뿐이었다.”
매몰찬 대답이었다. 이 말에 감정이 복받치신 건지 어르신 쪽에서 발을 한 번 구르는 소리가 났다. 허나 내 일이 아니어서인가, 늑대가 말을 굳이 세게 가져가는 이유가 내 눈에는 빤히 보이더란다.
늑대가 어르신께 벽을 치고 있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라.
“난 감시 대상에게 뭔가를 설명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네 녀석도 잘 알잖나. 울프.”
“…예. 물론이지요.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어르신께서 기억하고 있는 걸 다행이라고 말한 게 아닐 터다. 자기가 아직 잊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 말하는 거다. 눈을 내리깐 채 바닥을 내려다보다, 나지막이 말을 내뱉는 늑대.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어차피 살날도 많이 남지 않았어.”
“…….”
“이 담금주는 네가 가져라, 울프. 혼자 마시기엔 양이 많아. 다른 누군가와 기억을 나누어도 좋고, 기억을 담그어 흘려보내도 좋아. 내 기억은 조만간 다 사라질 거다.”
“그 조만간이 정확히 언제입니까?”
“잊었다. 아니면 상부에서 처음부터 말을 안 해줬을 수도 있겠지. 오늘은 이쯤 하고….”
잘 가라. 짧지만 즐거웠다.
말하며 뚜껑을 닫은 담금주 통을 어르신께 건넸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다. 두 손을 깍지끼어 모은 채, 오로지 늑대만을 바라보고 계신다.
“뭐 하나. 안 받고.”
“…피곤하십니까?”
“그래. 피곤하다.”
“다음에, 다시 한번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이 말엔 늑대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서도 느끼신 것 같다. 나중에 다시 늑대를 찾아오거든, 오늘보다도 과정이 훨씬 더 번거로워질 게 분명하다.
하루 이틀 만에 퇴직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진 모르겠지만, 늑대가 방금 말했다. 어차피 살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하는 판국에 제대로 된 퇴직 절차를 밟을 리도 없다.
곧바로 잠적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아. 적어도 지금 분위기로는 그렇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늑대의 표정을 보면, 뭔 말을 하더라도 핑계를 대며 더 들으려 하질 않을….
“…죄송한데요. 두 분.”
“뭐냐. 인간.”
“무엇인지요, 이찬 청년.”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말을 꺼냄과 동시에 눈동자 두 쌍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이 분위기에 이딴 소리를 하는 나도 미친놈이다.
소주병이 든 봉투를 들며 말했다.
“이 소주요.”
“소주?”
“네. 소주. 이거 아직 뚜껑도 못 땄는데요.”
당장 떠오르는 건 전혀 없었으나, 뭐라도 말을 해야 될 것 같아서였다. 어르신께 부탁받은 건 같이 늑대를 만나달라는 게 전부였다. 이 뒤로는 내 소관이 아냐.
그래도 끼어들었다. 보는 내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기껏 수십 년 만에 만나게 됐는데, 술잔 두 번 기울이고 영영 이별이라면 너무 아깝잖아.
“…여기 두고 가라. 후번초, 전번초 근무자와 알아서 나눠 먹으마.”
“다른 분들이랑요? 혼자 안 드시고?”
“나눠 먹는다니까. 아까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나?”
“그게, 이 소주 어르신께서 20분간 고민하시다 사신 거라서요. 술을 좋아하신다고 하시면서― 아.”
말 한마디마다 늑대 얼굴에 차곡차곡 주름이 쌓이기 시작했으나, 다행히도 도중에 할 말이 떠올랐다. 이 대화 초반에 늑대가 말했던 것들 중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게 하나 있다.
“두고 가라고, 말했다.”
“예. 소주는 두고 갈게요. 그런데, 저 궁금한 거 두 개만 여쭤봐도 될까요?”
“빨리 말해라. 피곤한 건 거짓이 아니니까.”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거다― 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 말씀 하실 때, 저희가 어떤 이유로 찾아온 거라 생각하신 거예요?”
묻자, 그걸 굳이 물어야겠냐는 듯 늑대가 눈살을 찌푸린다. 나도 아까는 몰랐지만 이젠 짐작하고 있다. 누군가를 감시하는 게 당사자들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잖아.
자기들을 감시했다는 걸 미리 파악하고, 그걸 추궁하러 온 게 목적이라고 판단했었을 것이다. 뒤가 켕겼다는 뜻이다. 내 질문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이긴 했으나, 그래도 대답은 해줬다. 어르신께.
“아까도 말했지만, 너 역시도 감시대상이었다. 울프.”
“…예.”
“행복해 보였지. 전쟁에서의 일은 다 잊은 걸로 보였을 정도로. 바라던 바였어. 때문에 네가 나를 찾아오거든, 과거를 완전히 끊어낼 각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그런 마음을 먹은 적 없었습니다, 보스. 여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요.”
“…그것만은, 앞으로도 내가 그걸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어르신을 바라보던 표정이 누그러들었으나, 내게는 아니었다. 다음엔 뭐냐는 듯, 콧김을 훅 내뿜고는 내게 몸을 가까이하며 묻는 늑대.
“하나는 대답했다. 다른 하나는 뭐냐. 고기 놈.”
이건 반대로 내가 대답을 못 했다. 질문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있는데, 이걸 묻는 게 맞는 건지를 도저히 모르겠다.
지금 나는 제3자일 뿐이지만, 이걸 묻는 순간부터는 내가 제3자가 아니게 된다. 내뱉은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머리에 침이 박혔다, 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돌출되어 있다. 피뢰침 같은 꼴이 참 우스꽝스럽―”
“그럼 오히려 잘됐네요.”
지금은 맞는 일이 아닌 옳은 일을 하겠다. 내 마음이 이게 옳대.
“그 침 좀 잠깐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 * *
말한 후에는 뒷주머니에서 다시금 자격증 수첩을 꺼냈다. 내가 이 세상 구성원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신분증이요, 내 마패 되는 놈이다.
꺼내서 내밀자,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치는 늑대. 콧김에 책상 위의 종이 몇 장이 허공으로 훅 날아올랐으나, 늑대는 주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결국 그 얘기군.”
“예? 이거… 맞다. 아까 수첩 보여드렸었지.”
“네 재주가 쓸만하다는 건 인정하마. 대화하는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조금의 마력 냄새조차 풍기질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난 네 장난에 어울려줄 마음이 조금도 없다.”
이러고는 내게 침을 보이기 싫은 이유를 구구절절 말해오는데, 이유가 무척 구체적이었다. 내 자격증 수첩만 봐도 내가 경력이 얼마 안 된 초짜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자기 머리에 박힌 침은 수십 년 경력의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해낸 기억 봉인구다. 지우는 순간 마법청 쪽에서 즉시 마법이 제거됐단 걸 파악할 수 있다.
일개 초짜 반마법사가 잠깐 들여다본다고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논지 같다. 그러니까, 마법이 제거되거든 신호 마법 같은 걸로 전달이 된다는 얘기인가?
“마음은 받아주마. 하지만 거기까지―”
“알았으니까 보여주십쇼.”
“뭐라고?”
“저 일 나쁘지 않게 해요. 울프 어르신께서 보증해주실 겁니다.”
이 부분은 어르신께 말을 돌렸다. 나보다는 어르신 말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까. 말하며 어르신을 바라보니, 할 말을 고르는 듯 입가에 손을 올리고 계시더라.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시다. 한참을 가만히 계시다, 날 바라보며 한마디.
“이찬 청년에게는 늘 신세만 지는군요.”
“찌개 사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밥값은 해야죠.”
“…보스. 혹시 지난달, 도심지 시내에서 게이트가 열려 벌어졌던 일에 대해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하다마다. 이 주변도 따라서 물바다가 되었으니까. 그 일에 이 고기 놈이 기여를 했다는 얘기냐?”
“기여한 수준이 아닙니다. 그 게이트핵을 소멸시킨 게 이찬 청년입니다.”
이걸 내가 말했다면, 이 편돌이 놈이 술 두 잔에 정신이 나가서 이러냐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끝이었을 것이다. 설명을 마친 어르신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시 날 돌아보며 묻는 늑대.
“네 소속이 어디지, 인간.”
“저 역 앞 편의점에서 카운터 보는데요.”
“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아뇨. 아르바이트생은 아니고 정직원이요. 저 겸업이라서.”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생각에 들은 그대로 대답했는데, 좀 더 긴장하고 있을 걸 그랬다. 어이없다는 듯 한 번 더 콧김을 뿜어내고는 어르신께 재차 묻는다.
“넌 이 고기 놈을 믿나? 울프?”
“예. 보스의 옛 말버릇을 빌리자면, 특상품입니다.”
“…하!”
이 대답에 늑대가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이를 훤히 드러내며 눈가를 부여잡고 웃다가, 몸을 움직여 양반다리로 바닥에 털썩 앉고는 고개를 숙인다.
“정수리 쪽에 박혀있고, 헤집어봐도 좋다.”
딱 봐도 그것 말곤 답이 없게 생겼다. 지나가던 멍멍이조차 탐낼 정도로 머리털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아예 손을 파묻어 헤집어보기는 했는데, 털 말고는 당최 손가락에 걸리는 게 없으니―
― 툭.
다행히도 세 번 헤집음 만에 성공했다. 운이 좋군….
손가락으로 건드렸으니 내 역할은 끝이다. 머리숱을 손으로 빗어 정갈하게 만든 뒤 물러서자, 늑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내게 물었다.
“찾아냈으면 마저 일을 해라. 왜 물러서는 거지?”
“일 다 끝났어요.”
“끝났다고?”
“네. 전화번호 알려드릴 테니까, 나중에 문제 생기거든 연락 주십쇼. A/S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