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c Realm Convenience Store Worker RAW novel - Chapter (277)
이세계 편돌이-276화(277/331)
276. 소주를 안주 삼은 추억 한잔 (6)
* * *
술을 들이켜기 직전, 몰래 어르신과 늑대의 잔에 손가락을 갖다 댔었다. 술에 담긴 마력을 전부 지우려는 의도에서였다.
한창 좋게 헤어질 분위기에 저딴 걸 뭐 하러 보여주냐고. 저 풍경은 별 한 개도 못 되는 졸작이었다. 시연회를 열거든, 5분도 안 되어 관객석이 텅 비어버릴 거라 자신한다.
[ 차라리 태어나질 말았어야 됐는데…. ]안 그랬다가는 수 시간, 길게는 수 개월이 넘도록 저 대사만 들어야 할 테니까. 나도 보기 싫었다. 허나, 난 내 체내에 들어간 액체의 마력을 지워본 경험이 없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시도는 했었으니까. 그 덕인지, 앞서 마셨던 두 잔과 풍경이 펼쳐진 건 똑같았는데, 이후가 사뭇 달랐다.
얌전하던 풍경에 지직 노이즈가 끼고, 내가 겪었던 적 없는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난 저 때, 단 한 번도 손에서 폰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유일한 광원마저 사라진 방 속에서 옛날의 내가 느릿느릿 몸을 움츠린다. 기껏해야 계속 질질 짜는 게 전부이겠거니― 생각했으나, 그러진 않았다.
저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눈물에 젖다 못해 텅텅 부어버린 눈을 한 채, 목멘 소리로 나를 향해 중얼거린다.
[ 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마라. ]“…….”
[ 그곳이라고 다를 거 하나 없으니까. 똑같아. ]나도 아니까 잠이나 자. 너 피곤하잖냐. 나도 해봐서 잘 알아.
[ ……. ]속으로 생각했더니, 이젠 반대로 저놈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비슷한 놈끼리는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통한다―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내 체질이 이제야 제대로 일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놈이 몸을 움츠린 반동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쓰레기 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옛날의 나를 파묻어 버렸다.
그 뒤에야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먹먹한 기분으로 어르신과 늑대 눈치를 한 번씩 살폈는데, 둘도 마찬가지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아무것도 못 봤다는 변명은 안 통할 것 같다.
“…두 분, 마지막으로 한잔하실래요?”
가능한 한 너스레를 떨며 소주병을 들었다. 뚜껑을 따는 시늉까지 보였으나, 그래도 내가 어린놈이어서인지 늑대가 배려를 해주더라고.
“괜한 짓을 했군.”
“무슨 괜한 짓 말씀이십니까? 달라진 거 하나 없는데―”
“알겠으니까 그만 일어나라. 얼굴이 빨갛다.”
* * *
반쯤 쫓겨나듯 경비실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날 밀어내고는 잠깐 기다려 보라길래 경비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10초도 안 되어 늑대가 소주병 두 병을 따로 들고 나왔다.
안에 든 액체의 색이 노랗다. 아무래도 담금주 내용물을 병에 따로 옮겨 담은 것 같은데….
“원래 들어있던 건 어디 갔습니까. 다른 병에 따로 옮겨 담으신 거예요?”
“내가 다 마셨다.”
“그걸 다요? 360ml짜리를?”
“다음에는 좀 더 잔이 큰 걸 가져와. 너도 받아라. 울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치고는 어르신께도 담금주 통을 건네는 늑대. 한 팔로 담금주를 받아든 어르신을 내려다보다, 내게 곁눈질을 하고는 덧붙인다.
“이 고기 놈 집에 잘 보내줘라. 그리고….”
“예. 보스.”
“이야기도 좀 해보고.”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보라는 건지는 말 안 해줬다. 이렇게 말을 마친 늑대가 열쇠고리를 짤랑이며 교내로 향했고, 어르신과 나란히 교내 앞을 벗어나―
근처 벤치에 드러누워 뻗었다. 이젠 진짜 한계다.
“어우, 머리야….”
“술은 오랜만인가 봅니다, 이찬 청년.”
“예….”
이 세상에서도 처음이고, 대낮에 고등학교 경비실에서 술 먹어본 건 아예 인생 처음이다. 휘청거리면서도 겨우겨우 걷고는 있었는데, 어르신께서 보다 못하셨는지 벤치에 날 드랍해 두셨다.
그 뒤에는 자판기에서 오렌지 음료 한 캔을 뽑아 가져다주셨고, 겨우 몸 추스르고 앉아서 받아 마셨다. 날이 더워서인지 술기운이 유독 잘 올라오고 있다.
“평소 주량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 소주 두 병 정도 돼요. 그런데 이 술은 식용 알코올을 들이부으시기라도 한 건지, 무슨….”
“취하실 만도 합니다. 도수가 80%쯤 됐을 테니까요.”
“세상에, 80도짜리면 불도 붙겠… 근데 그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보스께서 선호하시는 술 도수가 늘 그즈음이었거든요. 지금도 같을 거란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럼 맞겠지. 앉은 채로 시큰거리는 코를 어루만져도 보고, 머리를 툭툭 두드려도 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얌전히 주신 거나 먹는 게 최선 같다.
조용히 캔이나 홀짝이고 있자니, 자기 것의 캔을 톡 따시며 말씀하시는 어르신.
“오늘 일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김치찌개 맛있는 거 사 주신다면서요. 그거면 됐지.”
“그 정도로 끝낼 수준이 아니란 건 청년도 잘 알지 않습니까?”
전혀 모른다. 술 담은 봉투 잠깐 들어드리고, 적당히 말동무해 드리고, 머리에 침 잘못 떠 놓은 거 손으로 살짝 건드리고. 그게 전부 아냐?
“저희 부대원들은 아니었지만, 저 침이 박힌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익히 봐 와서 알고 있습니다. 보스야 늘 의지가 강한 분이셨던 만큼, 꽤 오랫동안 저항해 내셨습니다만….”
“예.”
“대다수가 비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자기 팔에 이름을 새겨 놓고는 어째서 이름을 새겼는지를 잊는 자들이 허다했는데, 오죽했겠습니까.”
아까 어르신께서 왜 사색이 되셨나 했더니, 그 침을 예전부터 알고 계셨어서 그런 거였나 보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캔을 양손으로 모아 잡고는 마저 말을 이으셨다.
“그리고… 보셨다시피, 제가 오늘 꽤 감정적이었습니다.”
“잠깐이었잖아요. 저 없이도 잘하셨을걸요.”
“아뇨. 보스가 저희를 감시했다고 말씀하셨던 순간, 솔직히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청년이 옆에서 중재해 주지 않았다면 오늘 만남은… 오늘이 끝이었을 겁니다.”
“생각한 대로의 상황이 아니어서요.”
“예. 생각한 대로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옛 추억을 꺼내어 화포를 풀지는 못했다. 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늘어놓고, 마냥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역으로 고민만 더 늘어난 만남이었다.
옛 부대원들 중 한 명이 정신병동에 입원해서는, 다 끝난 전쟁이 시작됐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잖은가. 다른 부대원들이라고 상황이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을 터다.
제3자인 나조차도 이 정도인데 어르신 속이 어떨지야 불 보듯 뻔하다. 옆모습을 바라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찾아가실 거죠. 다른 분들도.”
“그러려고 합니다. 다시 0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도와드릴 일 있으면 부담 없이 말해주세요. 저야 뭐 시간도 많고― 오메.”
말하다 음료 캔을 놓쳐 버렸다.
바닥에 엎어져 버린 캔을 얼른 주워 들었으나, 이미 한참은 가벼워진 채였다. 이미 흐른 건 어쩔 수 없어도 음료 캔은 3초룰 적용 안 되는 거 아닌가? 맞나?
확신이 없다.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내용물을 짤랑거려 보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웃음기 섞인 어조로 말씀하셨다.
“식사 자리는 나중에 가져야겠습니다. 이찬 청년.”
“네? 아뇨, 저 취한 게 아니고 그냥―”
“기운이 없는 거겠지요. 잘 압니다. 약속을 미루게 된 대신, 다른 약속을 맺어 도와주신 보답을 치르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싫었다. 친한 사이끼리 ‘네가 이만큼 해줬으니 나도 이만큼 해주겠다―’라며 손익 따지는 거, 난 전혀 안 내키거든. 헌데 날 바라보는 어르신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근엄하셨다.
일단 들어나 보라는 느낌이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자기 가슴팍에 가져다 대는 어르신. 정확히 심장이 있을 위치였다.
“저는 청년만큼 임기응변이 뛰어난 것도, 반마법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을 쓰는 일, 사람을 지키는 일. 그리고 적대적인 상대를 먼저 제압하는 일에 약간의 소양을 가졌을 뿐이지요.”
“그건… 예.”
“이 재주를, 당분간은 이찬 청년을 위해 쓰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 호위 계약이었다. 내가 위험하거든 언제든 달려오겠다. 시간에도, 장소에도 구애받지 않겠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잠깐 말을 흐리는 어르신.
“물론 세상이 옛날 같지 않은 만큼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야 않겠습니다만, 제가 봤을 때 이찬 청년은….”
“팔자가 사납죠. 꽤 많이.”
“예. 제 눈엔 그렇게 보입니다.”
이건 나도 인정한다. 어르신과 만난 첫날부터가 그랬었다.
근무 1주일도 안 된 시점에 매장 코앞 사거리에서 사고가 나서는 운전자들끼리 쌈박질을 하질 않나, 그걸로도 모자라 자동차 문을 뜯어서는 서로 후려치질 않나.
그 뒤로는 오크 열댓 명이 들어와 시비를 걸기도 했었고, 매장이 물에 잠겼을 때는 어떻게든 해보겠답시고 달랑 한 개 있는 목숨마저 걸었었다. 팔자를 백분위로 나눈다면 하위 1%쯤 되겠지….
“…언제까지요?”
“제가 만족할 때까지.”
심지어 기한조차 미정인 불공정계약이다. 아니, 내가 언제 맘 바꿔서 나 몰라라 할 줄 알고 이렇게까지 하신대?
내가 그렇게까지 믿을 놈이 못 된다. 말하며 어떻게든 없던 일로 하고 싶었으나, 어르신께서 가슴팍에 얹은 손을 아직까지도 떼질 않고 계셨다. 저것도 뭔가 의미가 있는 행위겠지.
심장을 거는 맹세,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 이것마저 없던 일로 치부해 버리면, 그때야말로 믿을 만한 놈은 못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결국 내가 한 수 접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어르신.”
내 대답을 듣고서야 가슴팍에서 손을 떼시는 어르신. 뒤이어 가라앉은 어조로 몇 마디를 더 말씀하셨다.
“또, 혹시라도.”
“네.”
“말 못 할 고민이 있으시거든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말에 조심이 가득 묻어 있다. 내가 경비실에서 내 기억을 봤고, 그걸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걸 이미 짐작하고 계신 것 같다. 마음은 고맙다. 고맙지만.
“그렇게 할게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여기라고 다를 것 없을 테니까. 말을 한다 한들, 한심하다며 손가락질이나 받을 게 뻔해.
* * *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나 집에는 대체 언제 들어온 거냐?
누운 채로 되새겨봐도 언제는커녕,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 분명 학원지구 정문 근처에서 한 번 휘청거린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폰을 켜 톡을 확인해 봤다. 내가 몸을 아예 못 가눴거든 어르신께서 걱정하시는 톡 한 줄이라도 보내셨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아니면 다음에는 술을 좀 적당히 마시라든가.
다행히도 그런 내용은 없었고, 톡을 끄자 화면 정중앙에 단출하게 현재 시각이 떠올랐다. 오후 8시다. 출근까지 한참 남았으니 알람 맞추고 잠이나 마저 자야겠―
“먀아옹!”
“…어, 뭐야. 너 언제 들어왔냐?”
머리맡에서 털뭉치 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털태식이 이 녀석, 살아있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불렀으나, 이놈 성격이 내 걱정 따위를 전혀 신경 쓸 놈이 아니다. 가슴팍 언저리에 800g 정도의 중량이 실리는 것과 동시에 연거푸 푹신거리기 시작했다.
더해서 눈앞의 리본이 들썩거리는 게, 정황상 나를 다연발 냥냥펀치로 연타하고 있는 것 같다. 답답함에 리본째로 들어 올려 물어봤다.
“넌 인마, 언제 들어왔냐는 말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데?”
“먀아앙! 먀옹, 우냐아앙!”
그렇다고 한다. 다시 이불에 내려놓자, 아직도 꼬장부릴 게 남았는지 쏜살같이 방 밖으로 달려가 버리는 털뭉치. 수 초도 되지 않아 돌아왔는데, 이번엔 빨간 리본뿐만이 아닌 다른 뭔가가 더 딸려 왔다.
각각 실오라기 몇 가닥, 명함으로 추정되는 너덜너덜한 종이 한 장이었다. 이 둘을 이불 옆에 보란 듯이 놓고는 절도 있게 울어대는 털뭉치.
“먀옹! 먀앙!”
이것들 좀 봐라, 라는 의도로 이러는 것 같다. 우선은 실오라기를 집어 눈앞에 가져와 봤는데, 실이라기엔 끄트머리가 익숙한 각도로 휘어있는 게 마치….
“…이 실오라기 같은 거, 멍멍이 꼬리털이냐? 혹시?”
“먀아옹.”
정답인 것 같다. 아니었으면 날 한 대 더 때렸겠지. 다음에는 명함으로 추정되는 종이를 들어 확인해 봤다.
명함 자체는 특별할 게 전혀 없다. 이름도 처음 보는 이름이고. 허나 직함 부분을 확인하는 순간, 말이 안 돼야 정상일 가설 하나가 머릿속에 딱 떠오르더란다.
“야, 털뭉치야. 이거 직함에 인권 운동가라 적혀있는데 말야.”
“냥.”
“멍멍이 그놈이 자기 이런 거 하고 싶다고 하든? 영물권 운동가?”
묻자, 리본이 위아래로 힘차게 까딱거렸다. 이 멍멍이 놈이 기어이….